〈 225화 〉 나를 끌어 올려줘!
* * *
여기는 한의 수도 서라벌.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나라의 수도인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작은 초가집부터 으리으리한 기와집.
그리고 그중에서도, 웬만한 기와집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거대하고 큰 권력을 가진 양반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양반가의 삼남, 화륜.
세상 무서울 것 없을 것 같은 양반가의 삼남이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심약하고 상냥한 소년이었다.
그런 모습을 탐탁지 않아 하는 자들 또한 있었고, 마음이 여린 화륜은 그런 존재들이 늘 무서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
자꾸만 다리가 안절부절못하고 바들거렸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동공은 갈 곳을 잃어 이리저리 방황했다.
하지만, 지금은 용기를 내야 할 때.
"부...부인...어딘가 언짢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렇게 결심한 화륜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의 용기는 이 순간, 빛을 발했다!
"어머, 제 기분을 신경 쓰시는 겁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영감님.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 상관은 하시지 마시고 편히 쉬시지요."
"아...으…"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륜이 용기를 짜내어 물었으나, 채현은 그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딱딱하게 대응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렇다.
화륜은 결혼한 지 이제 몇 개월이 지난 따끈따끈한 신혼.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이 분노한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라면 자신을 향해 방긋 웃어주는 채현이 이렇게 싸늘하게 대하니, 화륜의 마음은 더더욱 나락으로 향했다.
"저….저는 잠시 자리를 비, 비우겠습니다. 부인. 펴...편히 쉬시기를."
결국, 이 분위기를 감당하지 못한 화륜은 급하게 자리를 비웠다.
*
"하아….이걸 어찌하면 좋을꼬…"
방에서 나온 화륜은 마당 길을 정처 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멸시와 호통은 그에게 아주 흔한 것이었다.
사내답지 못하다며 혼을 내는 아버지와 그런 자신을 멸시하는 형님들.
하지만 괜찮았다.
자신이 못난 탓이니, 그저 혼자 꾹 참고 넘기면 되었다.
상처받는 것에 익숙해지고, 순응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채현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그녀가 화륜에게 철벽을 두자, 그의 마음은 너무나도 쓰라려 왔다.
어떻게든 이 마음을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때까지 화륜은 그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넘기는 것에만 치중했다.
그러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묵묵히 있자니, 자신이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결하려고 말을 걸면, 채현은 무뚝뚝하게 대응만 할 뿐이니 화륜의 속은 자꾸만 앓게 되었다.
그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마당을 걸을 때였다.
"어머, 화륜 나리 아니십니까?"
그런 그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온 자가 있었으니.
"아…! 고순!"
바로 채현이 본가에 있을 때부터 그녀를 섬기던 고순이었다.
"금방 마님을 뵙고 오는 길인데,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싶은데…"
"그, 그렇네! 부인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뭘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구나….이런 남편이라니….부인에게 정말 미안하네…"
고순의 입에서 채현의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시무룩해지는 화륜.
"흠….그러면 그건 어떠신가요?"
"그거...라니?"
잠시 그런 화륜을 보며 고민하던 고순은 금세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정말 그러면 부인이 마음을 풀어 주실까…?"
"걱정하지 마세요! 본가에 계실 때도, 그거면 한 번에 확 풀리셨다니까요!"
고순의 말을 들은 화륜은 반신반의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고순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 어서 마님께 가서 말씀드리셔요!"
"자, 잠깐만…! 마음의 준비가!"
그런 고순에게 등을 떠밀린 화륜은 어영부영 채현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
그 시간.
"음….내가 너무 심했나?"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칠칠찮게 드러누운 채현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뭐, 자신이 삐진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그 때 이후로 분명, 대화는 많아졌다.
하지만….
"서방님! 떨어지는 낙엽이 참 아름답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서방님! 오늘 식사는 어떠셨어요?"
"맛있었습니다."
"서방님!"
"예."
언제나 자신이 먼저 말을 걸고, 그 말에 응답해 주기는 하나, 언제나 단답식.
이게 결혼 생활인지, 아니면 깨진 독에 물 붓기 있지 싶어서,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한번 기분이 나쁜 티를 팍팍 내보이자. 화륜이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이미 기분은 다 풀림.)
그러다가 결국, 때를 놓치고 계속해서 기분 나쁜 티를 내보이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긴 했지…."
슬슬 사과해야 하는데…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벌컥!
"뭐...뭐야!"
갑작스럽게 방문이 열렸다.
화들짝 놀란 채현이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 쪽으로 바라보자, 마치 잘 익은 홍씨 처럼 얼굴을 붉게 물든 화륜의 모습이 보였다.
"그….저….나...날씨도 좋은데! 같이 스타 주막에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채현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내가 그런 것에 쉽게 넘어가는 여자로 보는 거야? 눈 깜짝 하나 봐라…!`
*
"주문 도와드릴게요~"
"어디 보자~! 오늘은 뭘 먹을….헛!"
채현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열다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뭐...뭐야? 나...어느새 이미 스타 주막에 와 있었잖아?!`
채현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스타 주막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분명, 자신은 쉬운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필 할 기회였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 마성의 말에 꼬여버린 채현이었다.
`끄응….! 뭔가 그대로 넘어가는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한데….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안 먹기에는 너무 힘들고….`
메뉴판을 부여잡고 슬쩍, 앞을 바라본다.
그 곳에는 메뉴판에 보이는 화려한 음식 그림들에 정신이 팔린 화련이 보였다.
귀엽다.
`헛! 정신 차려! 난 지금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태잖아! 차갑게, 응.`
"주문은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웅얼거리는 사이, 벼루가 다시금 주문을 물었다.
`이...일단 아무거나 시키자..!`
"이걸, 하나 줘."
"티라미수 말씀이시죠?"
"티라미…? 아. 응. 그걸로 부탁해."
성급해진 채현은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아무거나 지목하자, 벼루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 저도 같은 걸로 부탁드릴게요..!"
"네에~ 티라미수 두 개 주문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얼떨결에 시킨 주문을 받아들인 벼루는 금세 후다닥 달려 나갔다.
"........."
"........."
그렇게 벼루가 떠나자, 두 사람만 남은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어...어쩌지? 지금이라도 괜찮다고 말할까? 아냐….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 못해! 하지만….서방님이 불쌍한데….`
겉으로는 완벽하게 무표정을 유지하던 채현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렇게 1초가 1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주문하신 티라미수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오게 되었다.
`이게 뭐지…? 일단 대충 찍기는 했는데….초콜렛?`
그녀가 시킨 티라미수는 유리 그릇에 담겨 나왔다.
`와...뭐야..? 단면이 엄청 예쁘잖아?`
티라미수.
이탈리아어로 티라레(Tirare), 미(mi), 수(su). 의 합성어로.
영어로는 Pick me up. 우리말로는 나를 끌어올려 줘. 라는 뜻이다.
나를 업 되게 하다. 나를 기분 좋게 하다. 라는 뜻으로 통하고는 한다.
에스프레소에 핑거 쿠키(손가락 모양의 부드러운 과자.)에 에스프레소를 적셔, 바닥에 깔고, 커스터드 크림과 마스카르포네 치즈와 섞은 크림을 그 위에 올리고, 다음에 또다시 핑거쿠키, 에스프레소, 크림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디저트이다.
최초의 티라미수는 1967년, 북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의 도시 트레비소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트레비소의 레스토랑 `레 베케리에(Le Beccherie)`의 오너 셰프, 아도 캄페올(Ado Campeol)이 시작품을 개량하여 현대와 같은 형식의 레시피를 만들어 내었다.
“그...그럼, 먹을까요?”
“...영감님 먼저 드시지요.”
파들파들.
곧바로 숟가락을 들 뻔한 손을 멈춰 세운 채현이 화륜에게 먼저 권했다.
‘....맛있겠다…’
꼴깍.
“....그럼, 염치 불고하고, 먼저 맛보겠습니다.”
그런 채현을 이기지 못한 화륜이 숟가락을 들어, 티라미수를 산 숟갈, 퍼냈다.
위쪽에는 부드러운 코코아 파우더, 내용물은 부드러운 크림과 군데군데 박혀있는 초코칩, 그리고 커피를 잔뜩 머금은 핑거 쿠기가, 한 숟가락에 모였다.
‘아….모르겠다.’
“에잇!”
“앗.”
그 아름다운 단면을 보고,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채현은 자기도 모르게 화륜보다 빠르게 숟가락을 들어 티라미수 한 숟갈, 떠 먹었다.
우물우물.
꿀꺽.
“부, 부인! 무슨 일이에요?!”
“...있다.”
“...부인?”
“서방님 이거 지인짜 맛있어요! 이게 뭐야?? 와…. 위에는 초콜릿 가루 같은게 입 속에 달라 붙고, 크림은 치즈…? 저번에 먹었던 크림치즈와 무언가 농후한….달걀! 달걀이 섞여 있는데 그 조합이 환상적이네요! 그리고 가끔 씹히는 초코칩이 식감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데다가, 층층이 쌓인 씁쓸하면서도 부드러운 빵의 맛이 지나치게 달 수도 있는 이 맛을 잡아주는….....헛!”
그야말로 환상적인 티라미수의 맛에, 지금까지 취해오던 무표정의 얼굴은 어디 가고, 평소보다 더욱 열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말을 늘어놓던 채현은 한참을 말하고 나서야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아…..그...그게….”
“다행이다.”
“네?”
무언가 뻘쭘해져서 숙연해진 채현에게, 화륜은 말했다.
“부인은 역시,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웃어주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화륜은 손을 꼬물거리며 베시시 말했다
“......그, 그렇게 칭찬 한마디에 제 기, 기분이 풀릴 것 같나요?”
풀렸다.
이미 분노나 서운함은 어디 가고 귀여운 남편의 얼굴에 풀릴 것 같은 입을 어떻게든 간신히 굳혔다.
“저는, 역시 아둔합니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서투르고,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
“이번 사태도 제가 답답하여 부인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 같아 정말 미안합니다.”
“...그, 그렇지만은 않은데…”
“부인과 대화를 할 때면, 언제나 아름다운 답변을 주고 싶은데. 제 혀는 자꾸만 굳어버려 무뚝뚝해지고 맙니다.”
“그런…”
그렇다.
사실 화륜은 더욱 아름다고, 번지르르한 말들을 들려주고 싶다.
하지만, 부인의 앞에서는 더욱 입이 굳어버려, 간신히 대답하는 것이 전부.
“앞으로도 부인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부인이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래도, 그럴 때는 언제나 이 가게에 찾아오고 싶습니다.
이 가게에서는, 저는 양반가의 삼남이 아닙니다.
그저, 아름다운 부인의 남편이 되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화륜은, 웃었다.
“....저도 미안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 혼자서 풀이 죽기나 하고, 참….저도 아직 멀었나 봐요.”
그런 화륜의 말에 채현은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이상하다.
진작에 이렇게 말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과라는 것은 어찌나 꺼내기 힘든 것일까.
그런데, 화륜은 매일 자기 잘못을 탓하고 사과를 건넸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부인, 일단 티라미수를 먹을까요?”
“...네!”
채현은 생각한다.
앞으로도 우리는 또 오늘처럼 싸울지도 모른다.
서로의 마음을 상처 주고, 우울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이곳이 있으니까.
그가 내 앞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채현은 다시금 숟가락을 들어 티라미수를 맛보았다.
달콤하고 씁쓸한.
그런 맛이 났다.
*
티라미수 입니다!
마치 케이크 같으면서도, 아닌. 기묘하지만 훌륭한 맛을 티라미수!
저는 개인적으로 초코칩이 들어간 게 맛있더라고요!
부드러움 사이에 바삭하게 씹히는 식감이 참 좋아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