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성군(??)이란.
* * *
그 시각, 애슐란.
글란이 본격적으로 선전 포고를 밝혔습니다!
현재, 국경선 바로 근처에 있는 변방 마을을 기습, 점령 후 계속해서 수도를 향해 진군 중입니다!
국견성 근처의 변방이라면….아후로 변경백의 영토일 텐데, 한때 전쟁의 영웅이라 불리던 변경백이, 이렇게나 쉽게 쓰러지다니….
가뜩이나 막기 힘든 A급 마물을 이용했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나….
카이제르를 필두로 급히 긴급 대책회의를 열기는 했으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정체 모를 방법으로 마물들을 조종하는 글란, 소드마스터의 죽음.
하나만 닥쳐도 나라가 흔들리는 재앙이 연속적으로 덮쳐오니, 대책을 마련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국왕 폐하! 제가 나서겠습니다! 이 검으로 글란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습니다!
그때, 지금까지 묵묵히 상황을 보던 한 남자는 아주 거대한 대검을 한 손으로 들어 보이며 외쳤다.
육중한 덩치와, 그에 걸맞은 거대한 대검.
애슐란의 소드마스터 삼인방 중 한 명, 거인 발토르였다.
저에게 군사를 내려 주십시오! 그놈들에게는 그 애송이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발토르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처럼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건….안 된다. 우리는 이미 귀중한 소드마스터를 잃었다. 여기서 또다시 나라의 보물을 잃을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바이제르는 그런 발토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바이제르 또한, 마음만 같아서는 허락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냉정해져야 한다.
애슐란은 이미 어이없이 소중한 보물을 잃었다.
여기서 발토르를 보낸다고 한들, 영락없는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어째서…! 국왕 폐하!!
하지만 이미 전장으로 달려 나갈 준비를 마쳤던 발토르는 출정을 허락하지 않는 바이제르의 말에 발끈하며 소리쳤다.
....진정해 발토르…네 마음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냉정해져야 해.
그때, 그런 발토르의 어깨를 두들기며 그를 말리는 여성이 말했다.
붉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등에는 쌍도가 메어져 있었다.
그녀가 바로, 마지막 소드마스터.
쌍도 카를린이었다.
카를린…!
나도 마찬가지야.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놈들의 목을 따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
....!
자신을 막아 세우는 카를린에게 무어라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발토르는 자신의 어깨에 놓인 그녀의 떨리는 손을 보았다.
이것은 공포에 의한 떨림이 아니었다.
분노에 의한 떨림이었다.
....미안하다. 침착함을 잃었군…
카를린의 설득에 발토르는 자신의 검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국왕 폐하. 지금 막지 못한다면 글란의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영지를 점령해 나갈 것입니다! 이대로 시간을 끈다고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나도 잘 알고 있네….
발토르의 말이 맞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애슐란의 영지가 줄어들게 될 것이고, 더욱 불리해질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당장은 방어적으로 나서며 무언가 방법을 찾던지, 아니면 모든 병력들을 이끌고 나라의 존망을 건 도박을 걸지.
선택 한 번에 모든 것이 결정 난다.
무겁다.
자신의 선택이 애슐란의 모든 백성의 목숨을 좌지우지한다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무겁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다.
그는 이 나라의 주인.
애슐란 디 바이제르였다.
......당분간은 근처 영지들의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마땅한 수단을 찾아야….
그렇게 결정을 끝낸 바이제르가 입을 여는 그 순간.
아바마마!
벌컥, 하며 방문이 열렸다.
아니…아델리아?! 그리고….진혁?!!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자신의 막내딸 아델리아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진혁이 모습을 보였다.
뭣이?!
진…진혁!
염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소드마스터 진혁, 금방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놀란 와중, 진혁은 천천히 걸어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기…기적이군! 자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살아있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진혁의 복귀에, 금방까지 모두들 쳐져 있던 얼굴들에 화색이 돌았다.
헌데…그 쪽은….! 당신은..!
분명, 강하 공 아니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그 뒤에서 따라오던 강하를 목격한 그들은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다.
애슐란에 새로운 요리법을 선사하고, 왕가 살해 미수범을 체포한 영웅. 강하를 모르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강하 공. 오랜만이군.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폐하.
그리고 그를 반기는 바이제르에게 다가선 강하는 무릎을 꿇으며 안부 인사를 건넸다.
참으로 반갑네만….상황이 상황인지라 접대를 해주지 못한 것에 사과를 건네네.
아닙니다. 진혁과 공주님을 통해, 상황을 전달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강하의 뒤쪽에서 두 여성이 나타났다.
“오랜만이군, 인간 나라의 왕이여.”
오랜만이네요. 평안하셨는지?
바로 흑룡 류월과 화이트 드래곤 백설의 등장이었다.
*
“저도 갈래요!”
애슐란 왕국으로 떠나기 전, 향이는 강하의 손을 붙잡으며 강력하게 호소했다.
“글쎄 위험하다니까?”
애슐란에 가기로 결정한 순간, 강하는 같이 갈 직원들을 따로 추려내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직원들 전원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류월과 백설, 자신과 마찬가지로 반룡인 창, 엘프인 힐라, 이렇게 총 다섯명이 애슐란으로 가고, 나머지 직원은 주막에 남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향이는 반드시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호소하는 상황이었다.
향이가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며 부탁하는 상황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강하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치만…그런 곳에 강하 도령님이 간다니…너무 걱정된단 말이에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참….”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으며 자신의 손을 꼼질 거리며 만지는 향이를 보던 강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향아. 걱정하지 마. 나 엄청나게 강하잖아? 알지?”
“그건 그렇지만…”
강하는 그런 향이의 머리를 까치발을 들어서 간신히 쓰다듬었다.
“네가 위험할까 봐 그래. 그리고 주막도 열어야지? 네가 여기서는 제일 선배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주막과 남은 사람들을 잘 부탁해.”
“....네….꼭 무사하셔야 해요!”
“걱정하지 마!”
강하의 설득에, 향이는 간신히 잡았던 강하의 손을 놓았다.
“다녀올게~!”
그렇게 강하는 애슐란에 향하는 마법진 위로 올라탔다.
*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글란에 드래곤이?
다시금 애슐란에 돌아와서.
강하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정리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글란이 현재 청룡과 손을 잡았으며, 마물을 조종하는 힘은 청룡의 힘이라는 것을.
어째서 드래곤이 글란에게 손을 내밀었을까….
그…그렇다면….우리로서는 대처할 방법이 없는 것 아닙니까…!
아….대정령 애슐란이시어….!
강하의 설명이 끝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들고 말았다.
드래곤.
먹이사슬의 최상위 종족이자, 막대한 힘을 가진 존재.
그 힘은 나라 하나쯤은 가볍게 날려버린다고 할 만큼, 차마 상대한다는 발상조차 들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적국과 손을 잡고 쳐들어온다는 것인데, 패닉에 빠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패닉에 빠지지 않고, 진중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렇군…..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야….허나, 강하 공. 그렇기에 자네들이 온 모양이야.
예.
잠시 뜸을 들이던 바이제르는 낮은 목소리로 강하에게 말했다.
그리고.
벌떡.
....폐하?
...아버님?
바이제르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옆자리에서 당황하는 첫째 아들을 지나치고, 패닉에 빠진 대신들을 지나치고, 무릎을 꿇은 강하를 지나친 그는 그제서야 멈춰섰다.
바로 류월과 백설의 앞이었다.
글란은 지금도 우리 영토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습지만, 저희 애슐란은 그 청룡이라 하는 드래곤의 막강한 힘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
털석.
아버님!
폐하! 지금 무엇을…!
그리고 이어지는 바이제르의 행동에 대신들과 그의 아들 카이제르가 경악에 빠지며 기겁을 내었다.
바이제르, 애슐란의 주인인 그가, 무릎을 꿇었다.
너무나도 염치가 없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나라와 제 백성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드릴 테니,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드래곤이시어.
왕으로서의 위엄? 자존심?
그딴 것 들은 백성들을 위한 것에 비하면 하등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바이제르는 자신의 체면 따위는 집어던지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드…드래곤이라니…?
폐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지만 대신들은 국왕의 행동에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의 아델리아가 친 사고로 드래곤을 목격한 사람들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에, 바이제르가 백설에게 부탁해,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기억 속에 드래곤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기 때문에, 대신들은 백설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자신들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바이제르를 바라보던 두 드래곤은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그대는, 진정한 왕이로군요.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나라가 태어나는 것을 보았고, 그 나라들이 멸망하는 것 또한 지켜보았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가지각색이나, 대부분 암군의 잘못된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멸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허나. 그대는. 진정으로 백성들을 아끼며, 필요할 때는 그대가 가진 모든 지위와 명예를 벗어던지고 간절히 간청할 수 있습니다.
화이트 드래곤, 백설의 이름으로 그대의 간청에 대답하겠습니다.
물론, 이라고요. 후훗~
흠….뭐, 태도는 나쁘지 않구나.
그래. 인간들은 너무나도 약하니, 위대한 이 몸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것쯤은 당연하지!
내 청룡에게도 볼 일이 있으니, 너의 부탁을 이 흑룡, 류월이 들어주도록 하마!
“아, 내 펜던트! 어느새…!”
그리고, 두 드래곤은 한 인간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복받친다.
애슐란 디 바이제르.
애슐란의 국왕이기 전에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한 인간인 그는 마치 구원을 받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훗날, 이 광경은 [성군 바이제르와 두 드래곤] 이라는 노래로 퍼져, 변방의 작은 술집에서도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