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남에게 죽창을 꽂았으면, 자기도 꽂힐 각오를 해야지.
* * *
“...우리가 친구라고 부를 사이었나? 마침 잘 됐군, 여기 없으면 또 어디를 가야 할지 몰랐는데, 제 발로 나왔구나.]
청룡의 등장과 동시에 류월은 손에 검은 기력을 두르며 비아냥거렸다.
[이제, 끝장을 보자.]
[.....끝장?]
[그래. 이 악연을 끊을 때가 왔다. 네가 죽든, 내가 죽든.]
[.....푸하하하하!!! 흑룡. 아니, 류월. 너는 예전부터 그랬어. 너무, 너어무 진중하고, 고리타분해.
뭐, 그 덕에 지금까지 고작 ‘그 일’ 가지고 그렇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건 재미있기는 하지만….]
[....이 년이…!]
청룡이 그런 류월을 비웃으며 도발하자, 참다못한 류월이 그녀를 향해 달려 나가려는 그 순간.
“류월, 잠시만.”
[...! 이거 놓아라! 백설! 난 기필코 저년의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말 것이다!!!]
백설이 류월의 옷깃을 붙잡으며 그녀를 말렸다.
“그래,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보렴.”
[.....끄응…!]
“그래….아이야. 일이 어떻게 되었든, 우리는 이렇게 다시금 모이게 되었구나.
네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항복을 하는 것을 추천한단다.
아무리 네가 뛰어나다고 한들, 우리 둘을 상대하기에는 좀…벅차지 않니?”
[....말은 잘해요…내가 나타나자마자 저번보다 더 강력한 결계를 쉬지도 않고 이중, 삼중으로 씌워 놓았으면서…]
백설이 말은 좋게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은 결국. “네까짓 게 아무리 용써봐야 우리를 상대로는 뭣하나 할 수 없을 테니, 어서 손들고 항복이나 해라.”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이해해 주었다면 고맙구나. 그래, 아이야. 만약 나라면, 굳이 우리를 상대하는 험한 길은 선택하지 않을 거란다.”
백설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는 무슨, 아줌마. 성격 참 괴팍해~]
“아줌…!”
꿈틀.
인자하고 자비로운 그녀의 얼굴에, 가느다란 핏줄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왔다.
"그래….이렇게나 버릇이 없는 아이는, 한번 제대로 혼쭐이 나 봐야 하는 때도 있지…."
[일단 정정해야 할 것 두 가지.]
"....뭐?"
백설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도달한 순간, 청룡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그녀의 말을 잘라내었다.
[첫째. 내가 미쳤다고 혼자서 싸우러 왔겠어? 치사하게 두 명을 상대로?
그리고 두 번째. 나는 금방 말했던 것처럼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죽이러 온 거지.]
반짝.
청룡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자, 밝은 태양 빛에 의해 굴절되며 빛을 내었다.
[저건…!]
“흐음….”
그것은 바로, 류월과 백설의 힘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인간들은 우리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천하고, 어리석지.
마치 개미라고 할까?
인간과 개미. 그 둘의 관계가 딱 맞아.
우리들의 자그마한 힘에도, 마치 개미처럼 덧없이 쓰러지고, 짓뭉개지지.
그래서 말인데….한 번 개미가 되어보는 건 어때?]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병 입구를 막던 마개를 빼내자, 밝게 흔들리던 불꽃이 일렁이며 밖으로 나왔다.
그 마력을 그대로 잡아챈 청룡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싹.
“멈춰!]
백설은 그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청룡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감각이 미친 듯이 외치고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고.
[늦었어~]
그러나,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두 사람의 마력이 지직 지직 거리며 스파크를 튀기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본래의 주인인 백설과 류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너무나도 순식간이었기에, 백설과 류월은 그대로 원래 그들의 마력을 흡수시켰다.
그리고.
[으…으윽….! 이…이건….!”
[크헉…! 모…몸이…! 어째서…!”
“류월!!!! 백설 님!!!”
갑작스러운 고통에 류월과 백설은 몸부림치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하는 금방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한 얼굴을 굳히고는 곧바로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으큭…! 으…..으….몸이….이상…하….다…!”
“힘이…빠지고 있어…”
“그게 뭔…..어…? 어어…??!”
두 사람을 부축하던 강하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쓰러진 그들의 전신을 살펴보았다.
“마…마력이….없어…?”
본디 그들의 몸을 가득 채우던 드래곤의 마력이. 한 톨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마치….용이 아닌, 평범한 인간처럼….
[어때? 지고하고 위대한 용에서 한낮 개미가 된 기분은…? 응? 응? 놀랐지?
내가 직접 만들어 낸, 드래곤들의 힘을 봉인하는 마법이야! 정말로 당연하겠지만, 이 마법을 풀고 싶다면 내가 직접 마법을 해제하거나, 죽이는 수 밖에 없어~]
"....미친….!"
하늘을 지배하고, 땅을 울리는 드래곤.
그 드래곤의 힘이 사라진 이상, 이 둘은 그저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내가 말했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죽이러 온 거라고.]
청룡은 마치 개미처럼 땅을 기어 다니는 류월을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이...이년…!"
그 모습을 본 류월은 발끈하며 즉시 일어나려고 발을 딛었지만, 언제나 자신의 몸에 깃들었던 힘이 사라져, 그저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끝이다.
거슬리는 아줌마도, 나를 즐겁게 만들어주던 꼬맹이도.
이젠 전부 끝이었다.
".......청룡."
[응? 아아~ 아직도 거기 있었나? 그렇지이~! 내가 약속했지? 너를 믿어주는 류월의 등에 칼을 꽂으면서까지 네가 간절히 바라는 것.]
침묵을 지키던 강하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청룡을 바라보자, 그녀는 아~ 너도 있었지?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약속.
청룡은 강하에게 그녀들이 담긴 유리병을 건네는 조건으로, 하나의 약속을 청룡에게 받아내었다.
그것은 바로, 강하가 살던 원래의 세계로 보내주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약속이었다.
[그래에….이제는 방해꾼도 없고….그깟 차원문 쯤이야 충분히 열어줄 수 있지.]
청룡은 흥미롭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제 턱선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일 성가신 방해꾼 두 명은 이미 제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
아무리 강하가 날고 긴다고 한들, 진정한 용에게는 상대가 되질 못했다.
“그렇다면…?”
[싫어.]
하지만 청룡은 입가를 올려 히죽거리면서, 아주 가볍게 약속을 깨버렸다.
자신은 이미 승리자다.
그런데 어째서, 하등하고 미천한 개미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
왜?
그녀 스스로 약속을 깬다고 한들, 그 누구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강함.
세상에는 오직, 강함만이 존재하고.
그녀는 여기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강력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그녀는 자만했고, 그것이 파멸을 불러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렇게 마무리를 짓기 위해 공중을 활보하던 청룡이 점점 류월을 부축하는 강하에게 다가왔다.
승리는 정해졌고, 이젠 개미를 밟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이제는, 믿을 구석이 사라진 건방진 개미의 절망적인 표정을 바라보며, 짓이겨 죽여버릴 생각에 청룡은 가벼운 쾌감을 느끼며 홍조를 붉혔다.
근데. 이건 몰랐을걸?
"백설 님."
"....그래. 어떤 꼼수가 있을 것 같았기는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로구나.
.
.
발동하렴."
“네.”
한참을 침묵하던 강하는 백설을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뭘 하려는 걸까?]
강하는 백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작은 구체를 하나 소환해내었다.
그리고, 구체의 안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가 빽빽하게 적혀있는 부적 한 장이었다.
"그거 아나?
남에게 죽창을 꼽았으면, 자기도 꼽힐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 잠깐! 멈춰!]
무언가 불안했다.
저 종이를 그대로 놔두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저 개미와 종이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청룡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늦었어."
강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적을 부욱. 하고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 즉시, 부적은 강렬한 빛을 내며 사라져 버렸다.
[.....뭐...뭐야~ 괜히 놀랐잖아! 이게…..진짜 가만 안 둬…!]
순간 부적의 빛 덕분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던 청룡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강하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며 더욱 격분한 채 곧바로 그녀를 향해 빠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닥.
[...? 어….어라? 이게…..왜 이래…?]
분명 공중에 떠올라 날아가던 청룡은, 어느새 지면으로 내려와 발을 땅에 딛었다.
[모...몸이 무거워…!]
전신이 무겁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평소보다 훨 어색하게 느껴졌다.
[기...기력이?! 어…? 어어…?]
갑작스런 괴현상에 급히 손바닥 안에 기력을 모아 강하를 공격하려던 청룡은 심히 당황스러워하며 손바닥을 펼쳤다.
기력이 모이질 않았다.
아니, 애초에 몸 안에 기력이 없어지는….!
[아….아아아아아악!!!!!!!”
사라졌다.
기력도, 용의 힘도.
모든 것이 그녀의 몸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자신이 저 두 사람에게 걸었던 봉인식마냥….
….설마?
"어때? 네가 그렇게 무시하던 개미가 된 기분은?"
“이…이….개년아아!!!!!!!!!!!!”
청룡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강하를 죽일 듯이 쳐다보며 발악했다.
허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을 뿐.
그렇게 세 용은 인간이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