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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5화 〉 처음 받는 상냥함. (255/289)

〈 255화 〉 처음 받는 상냥함.

* * *

"....그렇게 해서 결국 마무리했지."

강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느라 칼칼해진 목을 향이가 내준 차를 마시며 풀어주었다.

애슐란에서의 일을 끝마친 강하는, 다시 주막으로 돌아와 자신들을 기다리던 직원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중간중간 힐라가 자신이 그 전장에서 얼마나 위풍당당했는지 끼어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잘 마무리 지었다.

"그래도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 모든 이야기를 경청하던 향이는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셰프님에게 저희 나라가 몇 번이나 구원받았는지…."

애슐란이 고향인 파렌은 예전부터 강하를 우상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젠 거의 숭배하는 듯이 강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서…..결국 저 분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던 중, 벼루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주막의 2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일단 대화가 좀 통해야 뭘 하든가 할 텐데…"

강하는 머리가 복잡하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애슐란 왕성에서 소란을 일으킨 후, 간신히 진정시켜 주막으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녀를 위해 준비한 방에서 꼼짝도 안 하고 박혀있었다.

어떻게든 대화라도 해볼까 싶어 방을 방문해도, 방의 제일 구석진 곳에 쪼그려 앉아 벌벌 떨기만 하니….하루빨리 류월과 백설의 힘을 되찾아야 하는 강하의 입장에서는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치니까 뭘 할 수도 없고…."

"참 웃긴다. 일단 우리의 적 아냐? 그런데 이리 어화둥둥 해 줘야 해?"

강하의 말에 매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탁자를 치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이러고 있냐…

"그나저나, 어제 밤,부터 지굼까지 한 끼도 안 드신 것 갓은데….괜찬을까오?"

일단 적이라곤 해도, 겉모습은 상처 입고 가련한 여성이었기에, 그저 걱정되던 마오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강하에게 물었다.

"응? 애초에 용 아니야? 용은 굳이 밥을 먹을 필요가 없잖아?"

마오의 말을 들은 혁수는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며 의문을 가졌다.

"넌 아까 뭘 들었냐? 용이기는 한데, 힘을 봉인 당했다고. 지금 류월이랑 백설 님. 그리고 저 골칫덩이는 평범한 인간의 몸이야. 당연히 먹고 싸….큼...죄송…"

"아냐~ 괜찮아. 네 말이 다 맞단다~"

자기가 목이 따갑게 일장 연설을 했건만,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지 이해를 잘 못 하는 혁수에게 버럭 화를 내다가, 바로 옆에 앉아있는 장본인들을 슬쩍 바라보며 말을 줄였다.

지금 제일 불편한 것은 저 둘일 텐데, 괜히 미안해졌다.

"이 몸은 매우 불편하다! 어떻게 고기를 한 접시밖에 먹질 못하는가!"

"....너는 태평하구나…"

그래도 언제나처럼 고기를 찾는 류월을 보자, 강하는 피식 웃을 수 있었다.

"아무튼….내가 처음 봤을 때가 3일 전 이었는데….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단 말이지...그래서 뭐라도 먹이려고 하는데...자꾸만 뱉더라고."

"그럼 어쩌지?"

"몰라….그냥 무언가 목에 넘어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던 눈치더라고…"

어젯밤. 물 하나 마시지 않고 축 늘어진 청룡을 보고, 일단 물이라도 먹이기 위해 호리병을 들고 날뛰는 청룡을 구속해 물을 먹이니, 자꾸만 억지하고 토하고 뱉어내는 모습에 물조차 먹이지 못했다.

"처음 말로는 주술을 건 장본인이 죽으면 두 사람에게 걸린 봉인식 또한 풀리기는 한다고는 했는데…."

강하는 애슐란에서 힘을 봉인당하기 전에 보았던 청룡의 말을 떠듬떠듬 떠올려 보았다.

`내가 직접 만들어 낸, 드래곤들의 힘을 봉인하는 마법이야! 정말로 당연하겠지만, 이 마법을 풀고 싶다면 내가 직접 마법을 해제하거나, 죽이는 수밖에 없어~`

그때의 말이 사실이라면, 청룡을 죽이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된다.

아니, 굳이 죽일 필요도 없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죽을 정도로 그녀는 너무나도 쇠약해져 있었다.

그런데.

".....잘 모르겠지만, 껄끄럽네…"

그녀의 처참한 몰골을 봐서 그런 걸까.

예전처럼 그녀를 처치한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류월, 너는 어쩌고 싶어?"

잠시 고민하던 강하는 고개를 돌려, 이 자리에서 청룡과 제일 연관성이 있는 류월에게 청룡의 일을 물었다.

"....그렇군. 확실히 나는 저 년을 죽이겠노라 말했다."

강하의 물음에 탁자 위에 올려둔 간식을 주워 먹던 손을 멈춘 류월은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나도 모르겠구나. 저렇게나 망가진, 용의 힘도 없는 지금의 나조차도 간단히 죽여버릴 수 있게 된...청룡을 죽인다고 해서, 내 한이 풀릴 것 같지는 않구나."

"백설, 알려다오.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내면의 혼란스러움을 가득 품은 류월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백설에게 말했다.

"......월아. 네가 과거에 저 아이와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단다."

울상인 류월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은 백설이 대답했다.

"저 아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얼마나 원한이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단다.

여기 있는 모두는, 네 의견을 존중할 거란다.

그 누구도 너를 비난하지 않고, 네 뜻을 따를 거야.

그러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무나."

그렇게 말하는 백설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류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정말...인가?"

"그럼~ 에그, 울지 말렴. 예쁜 얼굴이 망가지잖니."

"무...무슨…! 아니다! 안 울었다!"

백설은 자신의 소매로 류월의 눈가를 닦아내자 류월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지만,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크흠...그러니까...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백설의 품에서 빠져나온 류월이 헛기침하며 강하에게 말했다.

이미 멋있는 척하기에는 늦은 것 같지만 말이다.

"....좋아. 그럼 일단 제일 큰 문제는….밥이야."

일단 이야기를 나누려면 정신을 차려야 하고, 정신을 차리려면 일단 살아 있어야 한다.

"현대처럼 링거로 수액을 놔 줄 수도 없으니, 이대로라면 아사하고 말 거야. 어쨌든 스스로 밥을 먹어야 하는데…어쩌지?”

지금 시대에서는 어떻게든 스스로 무언가를 삼켜야만,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기에, 혁수는 머리를 감싸며 말하자.

“뭐….방법이 있겠어? 우리가 가장 잘하는 걸 해야지.”

밥을 안 먹는다면, 먹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면 된다.

“그럼, 먼저 들어간다.”

어느새 꺼낸 앞치마를 두른 강하는 가볍게 몸을 풀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

괴롭다.

눈을 뜨면 지옥이고, 눈을 감으면 어두웠던 그곳이 떠오른다.

[크…하…!]

청룡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글거리는 인두.

자신의 피가 번들거리는 강철채찍.

나를 현세에 묶어두었던 붉은 포션.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뒤덮어, 끝없이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아크…윽…!]

청룡은 자신의 손톱을 새워, 양 팔뚝을 긁어내렸다.

살짝의 따끔함과 이어지는 핏방울이 팔뚝과 손톱에서 일렁거렸다.

그 끔찍한 경험이, 계속해서 그녀를 몰아세웠다.

언제나 위풍당당하고, 인간들을 하찮게 여기던 자신이, 그 인간들에게 각종 고문을 당하고 이렇게나 고통스러워한다니, 웃긴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녀의 뇌는 생생하게 그때의 일들을 떠올린다.

자신의 오른팔을 잘근잘근 썰어 내던 톱.

몇 번이나 도끼를 내려쳐, 잘라낸 왼 발목에 새빨갛게 달군 인두를 지지는 소리.

오른쪽 시야를 앗아간 송곳이 푹 하고 꽂히던 감각.

그 모든 기억이 끔찍했고, 충격적이었다.

특히나 고문이라는 것에 하등 무지했던 그녀였기에, 더욱더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크..헉…!]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목을 졸랐다.

평범해진 자신의 몸은, 인간들처럼 산소를 갈구했고, 힘차게 산소들을 공급해주던 폐와 심장의 박동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왼쪽의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고, 의식 또한 점점 감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다시는 그 기억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청룡은, 그렇게 의식을 잃어갔다.

그 순간.

달그락.

[흐헉..!]

조용하던 방 외부에서, 무언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소리에 청룡은 화들짝 놀라며 언제나 그렇듯 방구석으로 도망쳤다.

당장이라도 닫힌 문을 들고, 소름 돋게 웃으며 각종 고문 기구를 들고 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만.

제발 그만.

청룡은 그저 사시나무처럼 떨며, 양손으로 귀를 막고 한쪽밖에 남지 않는 눈을 감으며 빌었다.

그런 그녀의 기대가 통해서 그런 걸까?

어느 순간 문밖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은 사라져버렸다.

[......]

고문하지 않는 건가?

그러자, 청룡은 감았던 눈과 막았던 귀를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느껴졌다.

질리도록 맡았던 비릿한 피 냄새가 아닌, 따뜻하고, 무언가 안정감 있는 냄새.

[......아.]

지금은,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은 청룡은 그제야 자신이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디 용이라면, 수십 년 동안 그 무엇도 먹지 않아도 되지만, 그녀의 몸은 현재 평범한 여성.

허기를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청룡은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허기와 느껴지는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바닥에 팔을 뻗어가며 기어가 문을 열었다.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자, 곧바로 무언가가 청룡의 눈에 띄었다.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과 수저.

그 안에는, 새하얀 쌀로 지어진 죽이 담겨 있었다.

[....읏!]

청룡은 그 그릇에 무심코 손을 가져다 대자, 느껴지는 따뜻함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었다.

새하얀 쌀을 갈아 부드럽게 익힌 죽에, 황색의 무언가가 곱게 갈려 위에 올라가 있었다.

고소한 향이 청룡의 코를 자극하자, 벌름거렸다.

죽의 모습이 너무나도 고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처음 겪는 강렬한 허기를 감당하지 못한 것일까.

청룡은 어느새 자신의 손가락이 숟가락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푹.

청룡은 숟가락을 죽에 꽃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새하얀 죽과 황색의 가루가 잘 섞였다.

죽을 휘휘 젓고 한 숟갈 뜨자, 윤기 나는 죽이 자신을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에, 청룡은 이내 그 숟가락을 그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하흐…!]

따끈한 죽이 뜨거웠던 청룡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죽을 씹었다.

부드럽게 입 안에 씹히는 죽과 달콤하면서도 짭짤한 것이 그녀의 혀를 자극했다.

이내 죽을 삼키자, 마지막에 느껴지는 고소함이 더욱, 그녀가 숟가락질하도록 유도했다.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이어지는 숟가락질에 그녀의 입이 터질 정도로 청룡은 죽을 욱여넣었다.

[.....맛있…다…]

배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녀를 상냥하게 감싸 안았다.

그녀가 인간이 된 이후 처음으로 느껴지는 상냥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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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청룡이 먹던 죽 위에 올라간 황색의 정체는 바로, 북어 보푸라기 입니다.

이런식으로 마른 북어를 강판에 곱게 갈아, 설탕이나 고추가루, 간장으로 간을 맞추어 내는 반찬 중 하나인데요.

특히 죽과 찰떡 궁합이라 죽에다가 넣어서 비벼 먹으면 끝짱 납니다.

그리고 이 요리는, 과거 조선시대 임금들의 수라상에 올라갈 정도로 고급지고, 유서깊은 요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한식 자격증 메뉴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난이도도 적당하고, 특히 자격증 공부할 때 직접 만들어서 먹어 본 결과....밥, 아니 죽도둑이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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