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 그녀의 선택.
* * *
“어….어어…향아…어쩐 일이야?”
갑작스런 향이의 방문에 강하는 간신히 침착한 척, 여유를 부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널브러진 이불, 이마에 맺힌 땀방울, 어수선한 복장.
그녀의 겉모습은 금방까지 마구 굴렀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어? 무, 물론이지~ 들어와.”
향이는 강하의 허락에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
“.......”
어색한 침묵.
두 사람은 그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무슨…일이야? 이런…시간에…”
그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쪽은 강하였다.
그녀 또한 알고 있다.
향이가 지금 이 시간에 뜬금없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청룡의 말, 때문이겠지.
“....도령님은, 돌아가실 건가요?”
강하의 예상과 아주 정확하게, 향이는 곧바로 본론부터 들어갔다.
“아..? 하하….그건…그…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니까 당황스럽네..”
“............”
“........나도 모르겠어.”
향이의 질문에 푸확 하고 웃으며 너스레를 떨던 강하는, 그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향이의 시선에 그녀 또한 본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니까, 한의 스타 주막 주모 강하, 가 아니라. 현대의 미슐랭 레스토랑의 강준 시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
매일 아침 일어나, 레스토랑으로 가서 그날의 일을 해결하고, 살아가는 그때의 자신을 떠올린다.
“나는….어릴 때부터 요리가 좋았지.
즐거웠거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해졌고, 그러다 보니 직접 만들게 됐어.
초등학교 3학년….그래, 이 시대로 따지자면 막 사당에 들어갈 정도인 나이 때부터, 어머님 곁에서 열심히 요리를 도왔지.
처음에는 달걀 깨는 것도 잘하지 못하고, 그저 방해만 될 뿐이었어.
그렇지만,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나를 나무라시지는 않았어.
그저, 곁에서 날 도와주셨지.
달걀은 어떻게 깨는 건지, 재료는 어떻게 손질하는 건지, 같은 걸 말이야.”
어머니는, 언제나 웃으며 자신을 도와주는 강준을 기특하게 여겼다.
“그러던 날. 딱 한 번. 엄청나게 화를 내신 적이 있었어.”
그날은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생일날 때 미역국을 끓여주셨던 기억이 있었던 어린 시절의 강준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직접 미역국을 끓여서 깜짝 놀래키고 싶었다.
그렇게 미역을 사서 물에 불리고, 냄비를 불 위에 올려두었다.
“깜짝 놀랐지. 미역이 그렇게나 커질 줄은 몰랐거든.”
건 미역은 작아 보여도, 물을 먹으면 수배, 수십 배는 팽창하며 부풀어 오르는 재료였다.
그 사실을 잘 몰랐던 강준은, 깜짝 놀라 그릇들 밖으로 뛰쳐나오는 미역들을 수습하느라, 냄비를 불 위에 올려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냄비에 미리 둘러두었던 기름이 타고, 완전 난리가 났지.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해.”
아주 다행히, 잠시 집을 비웠던 그의 어머니가 돌아와 아들의 사고를 간신히 수습했다.
“그리고, 엄청 혼났지….그때 처음으로 어머니가 그렇게나 화를 내실 수 있었구나 싶었어.”
말 그대로 그의 어머니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아주 엄하게 그를 혼냈다.
그때는 자신은 그저, 어머니를 위해서 한 행동이었기에 서러웠었던 강준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어머니는, 내가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아들이, 요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못 했기에, 그를 걱정하는 마음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그때부터, 그저 가볍게 생각했던 요리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어.”
부모님을 졸라 요리 학원에 다니고, 요리를 할 수 있는 학교로 진학했다.
그렇게 자격증도 따고, 조리과가 있는 대학에 진학도 하고.
직접 다른 나라의 요리를 배우기 위해 머리를 싸매며 영어 공부를 했었다.
특히 영어는 매우 힘들었지만, 그 시절의 고통이 강하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간 날.
그는 상상과는 다른 현실에 잠시 주눅이 들었다.
“실제로 요리를 파는 음식점에서 처음으로 일을 했었을 때, 뭐만 하면 이국의 언어로 온갖 욕이라는 욕은 다 쏟아져서.
그토록 바라던 요리는 해보지도 못하고, 매일같이 허드렛일에, 재료 손질만 주구장창 했었지.
그래도….즐거웠어.”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지만, 즐거웠다.
저 음식을 조리할 때는, 저런 향신료를 쓰는구나.
저 도구는 뭐지? 아~ 그 요리를 쓸 때 그런 식으로 쓰는 거구나!
요리에 관련된 정보들이 많아지고, 그것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몸은 고되고, 정신적으로 피로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강준은 기죽지 않았다.
“그렇게 드디어 내가 직접 손님들께 나갈 요리를 만들고, 셰프가 그것을 인정해 주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
‘아, 나도 이제 진짜로 요리사가 된 거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벅찼어, 너무나도 기뻤지.”
그렇게 강준은 해외의 경험을 살려, 한국에서도 그의 특기를 보여주며 쭉쭉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켰다.
“그렇게…세계에서도 인정해주는 미슐랭 스타의 주방장이 될 수 있었어.”
“정말…대단하세요…”
“뭘…적어도 나는 네 나이 때 그런 실력은 없었어.”
“저는 그저…셰프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인걸요?”
“그래….? 하핫…그건 기쁘네…”
“정말요…정말이에요…!”
향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강하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는, 도령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마을 계집이었죠.
하지만, 그 삶을 도령님이 부셔주셨어요!
처음 먹었던 볶음밥.
처음으로 만나는 드래곤.
처음으로 가본 왕궁.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있을 곳이 있는 이 주막.
제 모든 처음은, 도령님이 있었기 때문에 있는 거였어요.”
“....아냐…”
“맞아요!”
덥썩.
“햐…향아…?”
향이는 어느새 강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좋아해요.”
“....뭐?”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 한마디에, 강하의 마음은 울렁거렸다.
“처음 이 감정을 가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마음이 바뀐 적이 없어요.”
“향아….하지만..”
“좋아해요….정말로….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
향이는 지금까지 언제나 강하의 곁에 맴돌며 그녀에게 호감의 표시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이처럼 진솔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고백한 적은 없었다.
강하는, 자신의 품에 안긴 향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그저 어린 소녀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어느새 이렇게나 컸던가.
“있지…난…그…모르겠다…너, 너를 싫어하는 건 정말 아냐…! 하지만…내 모습을 봐.
예전이라면 몰라도, 난 여자인걸….”
강하는 향이의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지금의 자신은 어떤가.
현세의 남자가 아닌, 어린 소녀의 외형 아닌가.
그런 자신이, 향이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애초에 나이는?
원래의 나이로 치자면 거의 20 언저리나 차이 나는데, 정말…이게 괜찮은 건가?
“......그것 하나만 말해 주세요.”
“....어떤..?”
자신을 밀어내는 강하의 손을 맞잡은 향이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령님은….저를 좋아하시나요…?”
“아…”
그랬다.
강하, 그녀는 지금까지 향이를 의식해 왔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밀어내기 바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을 전부 제쳐놓고, 자신은 향이를 어떻게 생각하지?
그저, 보호해야만 하는 아이?
아니면….하나의 여성으로?
“나는….나는….”
강하는 고심 끝에,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
“형님, 정말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니까….나도 지금 당황스럽다. 진혁아.”
어느새 강하가 말한 다음 날 아침.
진혁은 늦은 밤, 힐라가 다급하게 전해준 소식을 듣고, 곧바로 텔레포트하여 스타 주막에 도착했다.
이곳은 이미 날이 밝았으며, 주막의 인원 모두가 마당에 모여 그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셰프님…우릴 두고 가시려는 걸까?”
살짝 먹먹해진 목소리로, 벼루가 힘없게 말했다.
“글쎄…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일지도 몰라.”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힐라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 또한, 귀를 추욱 늘어뜨린 상태였다.
그렇게 모두가 강하만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모두 다 모였네?”
““““셰프님!!!””””
드디어, 이 모든 일에 종막을 찍을 인물이 나타났다.
“그래, 결정했어?”
강하가 나타나자 청룡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결정했다.”
그리고, 강하는 대답했다.
확실히, 어젯밤 처럼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시선이 아닌, 확고한 의지가 깃든 눈동자였다.
“그래, 이미 술식은 다 짜 두었다, 아줌…아니 언…니…가 도와준 덕택이지. 너를 매개체로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잇는 통로를 잠시 열 거야. 그 사이 네가 들어가면, 너는 돌아갈 수 있어.”
“....사이가 좋아졌나 보네?”
“무…무슨…..! 그, 그런 소리 하지 마…”
어느새 백설과 친해진 모습에 강하가 웃으며 묻자, 청룡은 얼굴을 붉히며 짜증을 내었다.
뭐, 그렇게나 싫은 모양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어서 결정이나 해.”
“....그래…..참 길었다….”
강하는 눈을 감으며, 다시금 기억을 되새겨본다.
이 한에 도착하고 난 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도무지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일들도, 어떻게든 해결하며 여기까지 왔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추억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그녀의 결정을 기다리는 그 순간.
“.......나는….”
그녀, 강하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