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검성은 어디에 (3)2022.02.03.
소호객잔의 문이 열리며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일광이었다. 찢어진 천 옷 사이로는 날카로운 무기에 베인 듯한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후…….” 평소 왈패들 사이에서는 영역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크고 작은 다툼이 잦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분명 단순한 영역싸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일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객잔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소무의 시선이 식탁 위에 올려진 일광의 양손으로 향했다.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짙은 피로 얼룩져 있다. 그것은 분명 일광의 피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눈빛에 남아있는 옅은 살기(殺氣).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온 것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일광은 주방에 있는 소무를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호객잔의 고기국수가 먹고 싶었어. 지금 당장 돈은 없는데, 국수 한 그릇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국수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지금 우리 백양현이 휘나라의 개새끼들에게 약탈당하고 있어. 후. 이놈들의 대갈통을 다 부숴 놔야 하는데.” 일광은 연신 씩씩대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소무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의아함이 떠올랐다. 아직 이 근처엔 병사들이 들이닥치지 않았기에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이 마을을 떠나면 되지 않았습니까?” “내 비록 왈패지만, 여기는 나의 고향이야. 게다가 그동안 상인들로부터 보호비까지 받아왔잖아. 이 일광을 그렇게 의리 없는 놈으로 봤던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그럼 상인들을 보호하다가 휘나라 병사들과 한판 붙은 거군요?” “뭐 그런 셈이지. 안타깝지만 모두를 지킬 수는 없었어. 우리 애들도 모두 죽었지. 국수나 한 그릇 빨리 주고, 너도 어서 떠나.” “네. 국수 금방 나갑니다~.” 잠시 후 식탁 위에 국수를 내려놓은 소무는, 그와 마주 앉고 턱을 괴었다. “그럼 앞으론 어쩌실 겁니까?” 입안에 가득 찬 국수를 꿀꺽 삼킨 일광은, 육수 한 모금을 마신 후 피 묻은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이제 이곳에선 밥 빌어먹기도 틀렸잖아. 마침 한중에서 신병을 모집하고 있다더군. 무과시험을 볼 자격은 안 되고, 그곳에서부터 새로 시작해볼 생각이야.” 그때였다. 난데없이 객잔의 문 앞이 소란스러워지며 이들의 대화를 방해했다. 휘군이 들이닥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벌써 놈들이 찾아온 것 같군. 이곳은 내게 맡기고 주방에 숨어있게. 이 상도덕도 없는 새끼들. 국수만 마저 먹고 다 죽여버리겠어.” 말을 마친 일광은 국수그릇을 통째로 들고는 다급히 흡입하기 시작했다. 소무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들이 고스란히 그의 감각으로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무공을 익힌 인물도 있었다. 비록 일광이 왈패들의 두목이라지만, 무림의 기준으로는 기껏해야 삼류를 조금 넘어서는 수준이다. 혼자서는 결코 당해낼 수 없는 전력이었다. 타앙-! 일광은 깨끗이 비운 그릇을 식탁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찰나. 돌연 소무의 왼손이 일광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일광의 목 뒤에 자리한 천주(天柱)혈이었다. 푸욱-! 일광은 영문도 모른 채 눈이 스르륵 감기며 식탁 위로 고개를 떨궜다. 풀썩-! “다시는 무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어쩔 수 없군. 점혈 정도라면 괜찮겠지.” 기절한 일광을 뒤로한 소무는 객잔의 문을 열어젖혔다. 검은 전투복 위에 철갑을 걸친 십여 명의 병사들. 객잔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한 병사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답했다. “비켜. 죽이기 전에.” “안에는 손님 한 명만 있을 뿐이오. 모든 걸 가져가도 좋으니 우린 그냥 보내주시오.” 병사들은 소무를 무시한 채 문틈으로 내비친 일광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 중 한 명이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저놈입니다.” 이들을 지휘하고 있는 십호장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둘 다 죽여.” 소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목숨을 단 한마디로 결정하다니. 이것은 용담호혈(龙潭虎穴)인 무림에서도 흔치 않은 무자비한 일이었다. “정말 이럴 것이오?” 더는 대답조차 없었다. 대신 병사들의 검날이 자신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지켜보는 소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촤아악-! 푸욱-! 병사들의 얼굴에 당황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헛손질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앞의 사내가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객잔 주인은 어느새 자신들의 틈새로 파고 들어와 손가락을 내지르고 있었다. 푹-! 푸푸푹-! 소무의 손가락이 한 번씩 뻗어 나갈 때마다 병사들은 하나둘씩 지면으로 고꾸라졌다. 불과 한 호흡 만에 다섯 명의 병사가 쓰러지고야 말았다. “뭐, 뭐야?”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남아있던 네 명의 병사들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네 자루의 검이 다시 움직임을 발하며 소무의 사방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상대는 가볍게 몸을 흔드는 것만으로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이, 이 새끼 정체가 뭐야? 병사들의 얼굴이 황당함에 물들 무렵. 소무의 손가락이 다시금 움직임을 발했다. 푹-! 푸푸푹-! 순차적으로 지면을 향해 머리를 처박기 시작하는 병사들.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지켜보던 십호장이 다급히 소리쳤다. “물, 물러가겠소!” 수준이 미약하긴 했지만, 십호장은 무공을 익힌 병사였다. 눈이 마주친 소무는 망설임 없이 그자의 목젖을 향해 검지를 내질렀다. 푹-! 십호장은 피해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동공이 풀리며 쓰러졌다. 풀썩-! “너의 눈빛에는 굴복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눈앞의 인물을 보내준다면 다른 병사들을 이끌고 올 것이 분명했다. 구태여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다시 객잔으로 들어선 소무는 기절한 일광을 어깨에 둘러멨다. 곰처럼 거대한 체구였지만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객잔 밖으로 나온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백양현에서도 외진 곳이었기에 인기척은 없었다. 목적지를 정한 그는 오솔길을 따라 한참이나 걸어갔다. 일각이 지나 도착한 인적이 드문 산길. 그곳의 입구 부근에 일광을 가지런히 눕혀놓았다. “이곳이라면 마을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겠군. 백양현의 토박이 출신이니 길은 잘 알겠지.” 다시 객잔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올 때보다 더욱 무거워 보인다. ‘짐을 정리하고 떠나야겠지. 허나 이젠 어디로 간단 말인가?’ 터벅터벅 길을 걷는 그의 심경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강호를 떠나 무림의 눈을 피해 겨우 정착한 마을이다. 마음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산자락의 모퉁이를 지나자, 시야로 소호객잔의 모습이 들어왔다. 강호를 떠난 후 수년에 걸쳐 일궈놓은 쉼터. 그곳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소무의 감회는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마을 곳곳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돌연 십여 장이 떨어진 오솔길로 향했다. 낯익은 아이 하나가 그곳을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울부짖고 있었다. 하칠의 거지 패거리 중 하나였다. 지금쯤 하남을 향하고 있어야 할 아이가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청각에 내력을 집중하자,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아이의 울음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끄흐흐흑……. 아저씨…….” 불길한 느낌이 머릿속으로 엄습해왔다. 생각할 것도 없이 한달음에 달려나간 소무는 아이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너는 아광이 아니냐. 무슨 일이야?” 소무를 확인한 아광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는 듯했다. “끄흐흑……. 도와주세요, 아저씨…….” “진정하고 얘기해 보거라. 하칠은 어디 있지?” 울어대는 아광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소무의 오른손이 아광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의 단전에서 뿜어나온 중후한 내력이 아이를 따듯하게 보듬으며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흑흑……. 하칠 형은…… 어젯밤에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지금 나쁜 놈들이…….” 소무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린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칠은 아이들을 버린 채 자신이 건넨 은자를 들고 홀로 야반도주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근거지를 기어코 휘군이 덮친 것이다. 당황하던 소무는 품속에서 엽전 뭉치를 꺼내 아광에게 쥐어주며 말했다. “남쪽 길은 아직 안전하니, 내일 해가 뜰 때까지 계속 이 방향으로만 걸어라. 그곳에서 허리에 매듭을 묶은 거지를 찾아야 한다. 할 수 있지?” 아광도 알고 있었다. 허리춤의 매듭은 개방의 거지들만이 묶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네, 할 수 있어요.” “그곳에 아저씨의 친구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이동해!” “……고맙습니다, 아저씨.” 소무는 아광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등을 돌렸다. 더는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걸음이 느린 아광이 이곳에 당도하는 데 걸렸을 시간을 감안하면 이미 늦었을 확률이 높았다. 소무는 이를 악다물었다. 그의 신형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어딘가로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가히 벼락과도 같아서, 어지간한 무림인은 육안으로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지나는 숲길의 풀들은 비명을 토해내며 모조리 꺾여나가고 있었다. 다신 무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 그따위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제발…….’ 순식간에 전각 앞에 도착한 소무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양손이 점차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코를 찌푸리게 할 정도로 짙은 혈향(血香). 그러나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진입하기가 두려웠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아야만 했다. 소무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곧이어 전각 안의 광경을 확인한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어떻게 이런 잔악한 짓을…….” 폐허가 된 전각의 곳곳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널브러진 아이들.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건넨 만두를 먹으면서 좋아하던 아이들이었다. 무림의 잔혹함을 지켜봐 온 그조차도 처음 겪어보는 처참한 광경에 말문이 닫히고 말았다. 곧이어 소무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기우이기를 바랐지만, 불길함은 빗나가질 않았다. 자신이 거두려 했던 아이……. 결국, 화를 피하지 못하고 차디찬 바닥에 누워 있었다. “유화…….” 유화의 앞가슴에 삐져나온 만두 반 조각이 보인다. 그리고 복부의 작은 검상. 급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즉사가 아닌,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분명 유화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신을 찾았을 것이다. 유화를 조심스럽게 안아 든 그는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주변으로 싸늘한 한기가 휘몰아치길 한 시진이 지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발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소무의 눈빛이 맹수처럼 빛났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악귀와도 같은 모습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 누가 이자를 온화했던 객잔 주인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유화를 안아 든 소무는 백양현의 거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