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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검성은 어디에 (4) (4/250)

4화 검성은 어디에 (4)2022.02.04.

소무는 상가들이 밀집한 백양현의 대로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약탈이 절정에 이른 듯 상점의 대부분은 불타오르고 있거나, 집기들이 쏟아진 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길바닥을 나뒹구는 처참한 시체들.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오열하는 사람이 넘쳐나고 있었다. 간간이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다니는 여인들의 모습들도 보인다. “이거 놓으세요!” “끄흐흑…….” “사, 살려주세요…….” 거리는 온통 아비규환에 휩싸여 있었다. 이곳은 유화가 살아온 마을이다. 소무는 단지 아이의 마지막 가는 길에 백양현의 모습을 남겨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에 비치는 거리의 모습은 그가 원하던 광경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그를 더 분노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백양현의 처절한 대로를 태연히 지나는 인물은 오직 소무 한 사람뿐이었다. 순찰과 약탈을 자행하는 휘나라의 병사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당연히 소무의 행동은 병사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그의 측면에서 짜증이 섞인 고함을 내뱉었다. “이봐! 거기 서!” 대로를 걷는 소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단지 슬며시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히익!” 병사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글거리는 그의 충혈된 눈동자. 그곳에 서린 눈빛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동공이 반쯤 풀린 채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는 소무의 모습은 소름 돋을 정도로 오싹했다. “재미있군. 전란 속의 백성들은 모두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인가? 협(俠)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더러운 강호의 내면이 싫어 밖으로 나왔는데, 이곳의 세상은 더 더럽군.”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낀 병사들이 소무의 주위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 수가 수십 명에 이르렀지만, 소무는 한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유화의 시신을 왼쪽 어깨로 옮겨 안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 앞을 가로막는 자……. 모두 죽는다.” 소무의 말을 들은 병사들은 격분했다. 지나친 자신감. 그 속에 무공을 익힌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의 사내는 아무리 보아도 길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과 다르지 않았다. 병사 한 명이 씩씩대며 소무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이 처돌았나!” 다짜고짜 소무를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검날. 그러나 그의 눈빛은 병사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병사의 검 끝이 소무의 가슴 한 치 앞에서 정지한 것이다. “끄으으으…….” 병사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신체가 고정된 듯, 두 눈만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소무의 손바닥이 병사의 투구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콰직-! 투구가 종잇장처럼 단번에 찌그러지는 소리였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지, 지금 뭐야?” “이런 미친!” 그제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병사들은, 미친 듯이 호각을 불어대며 지원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움에 하나둘씩 모여드는 병사들의 수가 어느새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났다. 소무의 신위를 목격한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막 당도한 병사들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나 있던 병사 중 하나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저놈을 죽여!” 한 명의 병사가 자신 있게 나서며 소무의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마주 오는 병사를 바라보는 소무의 얼굴에는 소름 돋는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악귀가 현신한 것과도 같아 보였다. 소무의 오른손이 활짝 펼쳐지자, 그곳으로 붉은 기류가 발현되며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은 망설임 없이 병사의 앞가슴을 향해 무지막지하게 후려쳐갔다. 쩌어어엉-! 분노한 소무의 십 성 공력이 모조리 담겨 있는 일격이었다.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즉사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모두는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려 이십여 장을 날아 전각의 벽면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전각의 벽이 허물어지며 병사의 시신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가공스러운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은 감히 그의 앞길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소무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를 포위한 병사들은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그 사이 소무의 주위를 감싼 병사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나, 어느새 천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나타난 병사들은 애석하게도 조금 전 벌어진 사건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동료 병사들이 한 명의 사내에게 겁을 먹고 있는 사실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호기로운 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뭐 하는 거야, 이 병신들아!” 투구에 장식된 검붉은 휘장. 장교급의 병사였다. 그자를 바라보던 말단 병사들의 얼굴에 일말의 기대감이 떠올랐다.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던 장교는 한눈에 소무가 무림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의 전신에서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방비 상태의 빈틈투성이. 그렇다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병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쏜살같은 움직임. 한 호흡 만에 십여 장을 전진한 장교의 쾌검이 소무의 코앞에서 빛을 발했다. 그러나 막상 검을 내지르고 있는 그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공격을 시작한 순간부터는 상대의 빈틈이 감쪽같이 사라지며, 모든 곳이 철벽과도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후회할 시점에서는 코앞으로 다가온 소무의 손등을 겨우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가 생에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콰아아앙-! 소무의 손등에 후려 맞은 장교는 머리부터 바닥으로 볼품없이 처박혔다. 단번에 목이 꺾이며 즉사했지만,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소무의 발밑에서 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며, 장교의 신형을 다시 허공으로 튕겨냈다. 그 순간 소무의 오른손이 뱀이 먹이를 물듯, 즉사한 장교의 목을 틀어쥐었다. 꽈악-! 처참한 몰골의 장교를 움켜준 채 걸음을 계속하는 소무. 그를 바라보던 병사들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 사람이 아니야…….” “무, 물러서!” 소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장교의 시신은 삼십여 장을 날아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주위로 병사들의 숫자는 계속 불어나고 있었지만, 더는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없었다. 어느새 부장급의 무장이 후방에서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어서 공격해! 겨우 한 놈이다! 어서 공격하란 말이야!” 부장급의 장수가 목청이 찢어질 듯 소리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마치 네가 직접 나가 싸우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이대로 오십여 장을 더 이동한다면 백양현을 벗어나게 된다.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휘군의 명예와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결코, 이대로 살려 보낼 수는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장수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모두 물러서! 살라타이가 왔다!” 살라타이. 이들은 휘나라의 정예부대 중 하나로, 지금껏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무적의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하나같이 일당백의 무력을 지닌 전사들이었다. 피처럼 붉은 갑주에 장창을 움켜쥔 이들은 마치 감정이 없는 듯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적의 정예병들. 영혼이 무너질 정도의 지옥 같은 훈련이 아니라면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자. 검은색 휘장이 장식된 투구를 눌러쓴 살라타이의 대장 테무르. 그는 무림에서 소위 말하는 화경(化境)의 경지에 이른 무시무시한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포위하라!” 테무르가 소리치자 천여 명의 병사들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쏜살같이 움직이며 위치를 잡아갔다. 한 겹. 두 겹. 그리고 세 겹. 겹겹이 포위망을 형성하는 이들의 몸놀림은 일반 병사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소무를 겨냥한 천여 자루의 창끝에는 미세한 광채까지 서려 있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는데도 물러서는 자가 없었다. 무림의 절정고수조차 긴장해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포위망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강가의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펼쳐놓고 기다리는 것과도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그 물고기가 거대한 백상아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기회를 주었건만 기어이 죽음을 자초하는군.” 소무의 오른손이 활짝 펼쳐졌다. 그러자 바닥을 나뒹굴던 한 자루의 검이 허공을 날아와 그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최소한 무공이 절정의 수준에 이르러서야만 가능하다는 격공섭물(隔空攝物)의 수법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테무르는 적지 않게 놀랐다. 그가 내공을 이용해 물체를 움직였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그 거리에 있었다. 이러한 수법이 가능한 거리는 고작 일 장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무려 삼 장 밖에 있는 물체를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검을 쥔 순간부터는 기세가 완전히 돌변해 있었다. ‘화경…….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태산(太山). 테무르는 이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 무적의 살라타이가 처음으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의 머릿속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앞으로 그가 고작 다섯 걸음만 더 움직인다면 본격적인 격돌이 시작될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소무의 걸음이 두 발자국을 더 움직이자, 그가 움켜쥔 검이 진동하며 울음을 토해냈다. 그 순간 테무르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설마 이자가 검성(劍聖)이란 말인가?’ 앞으로 단 두 걸음. 감정을 도려낸 살라타이의 정예병들조차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테무르는 서둘러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검성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오만할 수 있겠는가. 검을 쥔 그가 출수를 시작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흐트러진 긴 머리칼에 단정되지 않은 수염. 들어왔던 검성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외모였지만, 그는 모험을 강행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정마대전을 승리로 이끈 무림의 천하제일고수. 눈앞의 사내가 자신이 생각하는 인물이 맞다면, 살라타이의 패배가 아니라 전멸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두 물러서!” 그것이 신호였다. 마치 상어를 피해 물고기가 달아나듯 동시에 흩어지는 병사들. 포위망은 단번에 와해되어버렸다. “왜 그냥 보내주는 것입니까? 살라타이의 명예가 달려있습니다.” 살라타이 부대의 부장이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테무르는 아직도 긴장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최소한 완안후이 장군이나 사묘아리 장군이 나서야 저자를 멈출 수 있느니라.” 더는 소무의 앞길을 막는 자는 없었다. 수천 명의 휘군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그가 백양현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대로변에 존재하는 모두가 그의 소름 돋는 음성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이 유화가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는지 직접 확인할 것이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그것은 병사들의 귓가에 거대한 종소리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중후한 내력이 담겨 있지 않으면 가히 시도조차 불가능한 수법이었다. 그의 음성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희들이 왜 광기에 물들어 있는지 직접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내뱉은 말은 마치 목소리 속에 살기가 묻어나는 듯했다. “이후 너희들이 살아있을 가치가 있는지 판단할 것이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검성이 사라지고 난 뒤. 백양현을 향한 휘군의 약탈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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