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한중으로 (2)2022.02.06.
용화객잔으로부터 남쪽으로 삼십여 리. 함평이라는 도시의 번화가에는 화창루라는 거대한 기루가 존재한다. 유흥과 환락이 성행하는 이곳은 무려 이천 평에 가까운 부지로 구성되어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대문을 넘어서면, 앞마당으로 아름다운 화원과 연못들이 보인다. 곳곳에서는 기녀들이 요염함을 뽐내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기녀들의 뒤에 자리한 수십 채의 선홍빛 건물들. 그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을지는 짐작하지 않아도 알 만했다. 소무는 전각들을 하나씩 지나치며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살펴보았다. 안에서 들려오는 음담패설들과 여인들의 신음은,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그의 감각으로 적나라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마지막에 자리한 선홍빛 전각. 그 안에서 놈의 목소리가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하하! 이리 가까이 와보래도!”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가 뿌드득 갈렸다. 전각의 문 앞에 얹어진 소무의 오른손. 단전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중후한 내공이 손바닥으로 뿜어져 나오며 문짝을 강타했다. 쾅-! 활짝 열린 문틈으로 내비쳐진 광경에 소무는 눈살을 찌푸렸다. 붉은 꽃잎이 잔뜩 뿌려진 화려한 욕탕. 하칠은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고함부터 내질렀다. “너 누구야!? 당장 꺼지지 못해?” “벌써 나를 잊었나 보군.” 하칠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자의 정체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외모가 단정하게 바뀌어있었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인물이 분명했다.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객잔의 주인장일 뿐. 하칠은 욕탕의 가장자리에 얹어진 옷자락을 뒤지며 단도를 꺼내어 들었다. “뒈지기 싫으면 꺼져!” “나와 약속하지 않았나. 아이들을 하남으로 데려가기로 말이야.” “내가 미쳤어? 은자 여섯 냥을 그 거지새끼들하고 나눠 쓰게?” 자신에게 나으리라 부르던 그의 태도는 백팔십도 돌변해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네놈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 “애새끼들이 뒈지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한 발자국만 더 오면 죽여 버린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소무의 눈빛이 살기(殺氣)를 띠며 싸늘하게 변했다. “결과는 다르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네놈에게 사정이 있었을까 봐 걱정했다. 죄책감 없이 죽일 수 있게 해줘서 고맙군.” 문 앞에 있던 소무의 신형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칠은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살폈다. 곧이어 누군가가 자신의 뒤에서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음을 느꼈다. “이, 이거 안 놔?”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물속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음에도 말이다. 풍덩-! “꾸……꾸루륵!” 두 명의 기녀는 물속에서 바둥대는 하칠을 바라보며 겁에 질렸다. 소무가 눈짓을 보내자, 기녀들은 옷가지를 챙겨 들고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리고 은자 여섯 냥.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오 년쯤 걸린 것 같군.” 생각할수록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고작 하칠의 유흥비를 벌어주기 위해 자신이 오 년 동안 일했다는 결과가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꾸, 꾸르륵!” 바동거림이 절정에 이를 무렵에서야 그의 얼굴이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악! 하악! 그만…….” 거친 숨을 내쉬는 하칠의 귓가로 소무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그만해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해보아라.” “그, 그것은…….” 하칠은 순간 자신의 오른손에 아직 단도가 들려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소무의 복부를 향해 그것을 힘차게 내질렀다. “뒈져!” 날카로운 단도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굳이 피할 필요도 없었다. 고작 이따위 공격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푹-! 단도 끝이 복부에 닿는 순간 하칠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돌멩이를 찌른 듯 단도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시 내질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말이지 구제가 안 되는 놈이로군.” 소무의 손바닥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하칠의 얼굴을 후려쳐버렸다. 쩌억-! 볼품없이 날아오른 그의 신형이 멀찍이 날아 벽면에 충돌했다. 콰앙-! “크으윽!” 내공이 거의 실려 있지 않은 일격이었기에 큰 부상은 없었다. 비틀거리면서 일어서는 하칠은 계속해서 눈알을 굴렸다. 어느새 자신의 단도는 소무의 손아귀에 옮겨져 있었다. 언제 그것을 빼앗겼는지도 알아챌 수 없었다. 상황 판단을 끝낸 하칠의 얼굴에 비굴함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계속해서 돌변하는 하칠의 태도는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할 정도였다. “그래 살려주지. 네놈한테는 죽는 것도 사치이기 때문이다.” 말을 마친 소무는 단도를 움직이며 허공을 두 차례 그었다. 전면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두 개의 빛무리. 초승달 모양으로 허공을 날아가는 이것의 정체는 분명한 강기(剛氣)였다. 콰쾅-! 강기는 실내의 한쪽 벽면을 꿰뚫어 버리고 나서야 소멸했다. 영문도 모른 채 눈알을 굴리던 하칠은 곧이어 엄청난 통증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동시에 고통에 찬 비명이 실내를 거세게 진동시켰다. “끄아아악!”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 게다가 양쪽 어깻죽지부터는 감각이 없었다. 하칠은 참담한 심정에 휩싸였다. 소무는 볼일을 마쳤다는 듯 그를 뒤로한 채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어디, 끝까지 살아남아 유화가 느꼈던 고통을 즐겨 보아라.” “죽여! 차라리 날 죽여줘, 이 새끼야!” 쉽게 죽여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웠기 때문이다. * * * 섬서 남부의 대도시 한중. 이곳은 서쪽의 사천을 포함하여, 호북과 하남 지역의 교통로를 잇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이다. 반드시 사수해야만 하는 지역이지만, 지금의 송나라는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악비 대장군은 섬서 전체를 포기하면서까지 각 군단을 양양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곳의 상황이 더 다급했기 때문이다. 양양이 무너지면 나라가 반으로 쪼개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절대로 내어줄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 와중에 대장군의 명령을 어기고 한중에 남아 버티고 있는 장군이 있었다. 장양 장군의 휘하에는 오백여 명의 병사만 편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고작 이 병사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급기야 모병소를 설치하고, 다급히 섬서 일대에서 신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지원자들은 대열을 맞춰 차례를 기다리시오!” 한중성에 설치되어있는 이천 평 규모의 임시 모병소. 지금 천여 명의 사내들이 그곳을 서성이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소무의 모습도 보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순서를 기다린 지 한 시진. 주변으로 짜증을 내는 자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그러나 소무는 마치 고목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반 시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그의 차례가 다가왔다. 야외 탁상에 앉아 붓대를 움켜쥔 행정관이 기계적으로 물었다. “출신과 이름.” “백양현의 소무라 하오.” “하던 일은?” “주방 일을 했소.” “무예를 수련해 본 적은 있었나? 말을 타본 경험은?” “약간의 검술. 승마술은 소질이 없소.” “사냥을 해본 경험은 있나?” 끝없이 이어지는 행정관의 질문은 귀찮을 정도였다. 상황이 시급한 만큼 모병소는 어지간한 자원자들을 모두 받아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질문을 퍼붓는 이유는 아마도 병과를 분류하기 위함이리라. 훈련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개인이 가진 특기를 최대한 살려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 종이를 들고 저쪽으로 가시게.” 지루한 질의응답이 끝나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관군의 병사들에게는 적지 않은 보수가 지급된다. 그렇기에 최소한 신체가 멀쩡한지는 확인해야 했다. “상의를 탈의하시오.” 소무가 말없이 윗옷을 벗어내자, 주변의 이목이 모두 집중되었다. 신체를 검사하던 행정관은 감탄을 연발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매끈한 근육과 체형. 신체의 완벽함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내 눈을 믿을 수 없군. 지금까지 들어왔던 신병 중 가장 완벽해. 통과!” 신체검사는 매우 빠르게 끝났다. 살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상의를 탈의함과 동시에 바로 통과된 것이다. 행정관이 적어준 종이를 움켜쥔 소무는 군영의 연병장으로 이동했다. 모집된 신병들이 모두 집결해 있었는데 그 수는 무려 오천여 명에 이르러 있었다. 이들을 보던 소무의 뇌리에 오합지졸(烏合之卒)이란 문구가 떠올랐다. 휘군의 병사들을 직접 목격했던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만약 이 상태로 전투가 일어난다면, 시작과 동시에 전멸이겠군.’ 오늘이 모병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신병이 연병장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모든 절차가 끝날 때까지 소무는 이곳에서 또 반 시진을 기다려야만 했다. 인내심이 강한 그조차도 매우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등 뒤에서 손을 내뻗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위협적이지 않았기에 피하지 않고 놔두었다. 덥석-! 어깨 위로 올라온 거대한 손바닥. 그 손의 주인을 확인한 소무는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반가운 인물이었다. 반짝이는 대머리에 곰같이 거대하고 탄탄한 체구. 왈패들의 두목으로 인상은 험악하지만, 유난히 정이 많았던 백양현의 일광이었다. “이거, 소무 형제가 아닌가! 자원하러 온 거야? 용케도 백양현에서 무사히 도망쳤구만그래.” “후후. 이곳에 있었군요.” “암. 이거 인물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데? 그러게 내가 진즉에 씻고 다니라고 했지?” 소무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누가 누구의 외모를 평가한단 말인가. “그때도 씻기는 잘 씻었습니다. 관리를 안 했을 뿐.” “그러고 보니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백양현에서 지내는 동안, 일광은 한 번도 나이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터. 잠시 고민하던 소무는 대충 둘러댔다. “서른입니다.” “나랑 동갑이구만. 앞으로 말 편하게 해. 타지에 와서 서로 의지할 고향 친구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잖아?” 소무는 묵묵히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일광의 시선이 소무가 움켜쥐고 있는 종이로 향했다. “그나저나 병과는 무엇으로 받았어?” 신병들은 입대와 동시에 병과를 배정받는다. 대부분은 기본 병과인 검병, 창병, 궁병으로 배정되지만, 기병이나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첨병으로 배정받는 경우도 가끔 나온다. 신병들이 가장 선호하는 병과는 상대적으로 죽을 위험이 적은 취사병(炊事兵)이나 보급병(補給兵)이었다. 소무는 묵묵히 손에 쥐어진 종이를 펴보았다. 고개를 삐죽 내밀며 내용을 훔쳐보는 일광. 그는 곧이어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 검병이라니, 나랑 똑같잖아? 이제부터 내 옆에만 붙어있어. 같은 고향 사람끼리 서로 의지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소무는 근처에서 서성이는 한 젊은 사내를 주시했다.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무림인. 분명 자신이 아는 인물이었다. 이윽고 눈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이 해맑은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소호객잔의 또 다른 단골손님이자, 파문당한 화산파의 삼대 제자 청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