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한중으로 (3)2022.02.07.
뒷골목을 주름잡던 왈패들의 두목과 파문당한 화산파의 제자, 그리고 객잔의 주인장까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이들 셋은 무척 잘 맞았다. 일광과 청해는 서로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고, 소무에게는 따분함을 덜어줄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과까지 일치하지 않는가. 검병대에서 훈련과정도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시작하려나 봐요.” 일광이 청해의 등을 감싸듯 툭툭 치며 말했다. “떨려? 걱정하지 말고 긴장 풀어.” “그것보다 종일 서 있으니 좀 지루해서요.” 묵묵히 지켜보던 소무도 한마디를 내뱉었다. “조금 기다려봐. 훈련이 시작되면 지루하진 않을 테니.” 모집된 신병들의 숫자는 모두 오천여 명에 이르러 있었다. 연병장의 모두가 도열을 마치자 드디어 장양 장군이 단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갑주를 두른 모습은 위엄이 넘쳐났지만, 소무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장군에게서 느껴지는 기(氣)의 흐름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그의 뒤쪽에 장창을 움켜쥔 부장급의 장수가 오히려 더 강해 보였다. ‘하긴, 무공만 강하다고 장군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 전쟁은 무림의 싸움과 다르다. 어찌 보면 장군에게는 무공보다 전술 능력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소무는 일광과 청해의 사이에서, 묵묵히 장양이 연설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장양이라고 한다. 너희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원한 것은 고마운 일이나, 지금은 그러한 말을 하는 시간조차 사치인 상황이다. 적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최소한 우리의 열 배, 아니 스무 배를 넘을지도 모른다.” 장양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연병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신병들이 겁을 먹고 사기가 꺾이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이곳이 뚫린다면 우린 이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 그런데도 악비 대장군은 우리 군단을 양양으로 집결하라 재촉하고 있다. 우리가 한중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능히 버텨낸다면, 이곳을 사수하기 위해 반드시 지원군을 보내올 것이다!” 장양은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대장군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벗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결과가 안 좋게 나온다면 참수도 당할 수 있을 만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패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내어 들고는 계속해서 외쳤다. “우린 비록 열세이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무릇 병법에서는 잘 훈련된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면 능히 천 명을 당해낼 수 있다고 하였다! 모두 하나가 되어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적은 수로도 능히 한중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한 시작으로, 나는 이 금강진경(金剛眞經)을 너희들이 익힐 수 있게 할 것이다!” 연병장이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소란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금강진경이 무엇인가. 장군 이상의 계급만 익힐 수 있도록 허락된 관군의 내공심법이다. 일반 병사들은 감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서적인 것이다. 황궁 무예 서적에 비견될 만한 상승 심법은 아닐지언정, 신병들에게 있어서는 절세신공과도 다름없는 무공비급이었다. 놀란 것은 신병들뿐만이 아니었다. 휘하 장수 중 하나가 다급히 다가가서 그에게 속삭였다. 군단에서 제일가는 고수로 알려진 양연정이었다. “장군, 재고해 주십시오. 황실에서 알면 목이 달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한 채 영토의 절반을 잃었네. 지금 상황에서 무엇이 더 두렵겠는가.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네. 나 하나의 목으로 이곳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이득을 보는 셈이지.” 이들은 작은 목소리로 소곤대고 있었지만, 소무의 청각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전투의 승패를 떠나, 저자는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힘들겠군.’ 강호에서도 사문의 무공을 함부로 남에게 전수했다가는, 파문은 물론 심한 경우 척살을 당하게 된다. 장양의 이러한 행동은 능지처참으로도 부족한 중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사정일 뿐, 신병들은 환희에 휩싸여있었다. 소무의 좌측에 자리한 일광조차도 무척 들떠있는 모습이다. “드디어 나도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된단 말이지…….” 실전을 통해서만 무예를 익혀왔던 일광에게는 꿈만 같은 기회였다. 청해는 이미 금강진경보다 뛰어난 화산파의 내공심법을 수련하고 있었기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들에게 다시 장양의 외침이 들려왔다. “금강진경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는 보법과 경공은 물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전수해 줄 것이다!” 신병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약초꾼이 우연히 산속에서 무공서적을 주었을 때 이러한 표정을 지을까? 장군에게 허용된 무공을 고작 신병들이 익히게 된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무는 장양의 눈빛에서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를 보았다. ‘저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백양현에서 본 휘군의 정예부대는 이미 무림고수들에 비견될 정도로 단련되어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만 명이 모여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병들에게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알려준다고 한들, 하루아침에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없을 터인데?’ 지금 장양이 걱정하고 있는 것 또한 소무의 우려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적들이 당도하기 전에 우리의 준비가 얼마나 이루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오직 뼈를 깎는 훈련만이 우리의 가능성을 성공에 이르게 할 것이다!” 연병장에 처음으로 신병들의 환호성이 울려 펴졌다. “우와아아아!” “와아아아!” 신병들의 두려움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바닥으로 추락했던 이들의 사기와 의욕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너희들의 육신을 나 장양에게 맡기거라! 지금부터 모두가 죽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니, 자신이 없는 자는 지금 즉시 떠나거라!” 장양이 손짓을 보내자 신병들의 뒤에 자리하고 있던 병사들이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강진경을 눈앞에 두고 누가 돌아서겠는가. 휘군과의 전투는 나중 문제였다.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음을 확인한 장양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단상을 내려오자, 그 자리를 부관 양연정이 대신하여 올라섰다. “명심하라! 너희들은 아직 정규군이 아니다! 훈련과정을 마치기 전까지 함께할 임시부대가 편성될 것이니, 모두 각자의 병과에 맞춰서 도열하라!” 오천여 명의 신병들이 중구난방으로 뛰어다니며 자신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깃발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청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는 검병대이니 저쪽이네요. 제가 앞장설게요.” 소무와 일광은 청해의 뒤를 따라 검병들이 모이는 곳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오천 명의 신병 중 무려 절반의 인원이 검병이었다. 그다음으로 창병이 천오백여 명으로 많은 수를 차지했고, 궁병으로 분류된 자들도 오백여 명에 이르렀다. 기병대로 편성된 인원은 승마술에 경험이 있던 자들로 고작 백여 명에 불과했다. 첨병들은 전직이 사냥꾼인 자들을 포함하여 추격술에 능하고 날랜 자들로만 삼백여 명이 편성되었다. 가장 구석에는 취사병과 병참병들을 포함하여 백여 명의 특수병과가 모여 있었다. 모두가 도열을 마치자 여섯 명의 부장들이 하나씩 병과를 맡아 이동했다. “창병대는 나를 따라 이동한다!” 가장 먼저 움직인 인물은 장양의 부관인 양연정이었다. 양가장(杨家将) 출신의 그는 문무가 출중하며, 양가이화창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창병대가 떠나고, 강인한 인상의 장수 한 명이 검병대의 전면으로 나섰다. “검병대를 맡게 된 위진철이다! 죽을 각오가 된 놈들만 나를 따라오거라!” 그는 군단 내에서 양연정 다음가는 실력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위진철을 따라 검병들이 보병훈련장으로 이동했다. 훈련장의 한쪽에서는 이미 양연정이 창병들을 도열시키고 있었다. 나머지 병과들은 아마도 다른 훈련장으로 이동했으리라. 위진철이 검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부터 전술훈련을 함께할 조를 편성할 것이다!” 신병들은 백여 명씩 짝을 이루어 조 단위로 분류되었다. 소무와 일광 그리고 청해는 함께 이동하였으며, 그들은 검보병대 십육조라는 정식 소속 명칭을 부여받았다. 조 편성이 끝나자 위진철이 행동지침과 기본 전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무의 귀에 그의 설명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따분할 줄은 몰랐군.’ 지루함이 계속되는 가운데, 소무는 자신의 조에 편성된 신병들을 하나씩 흩어보았다. 현재로서는 대다수가 아무런 전투 능력이 없는 자들이었다. 앞날이 까마득했다. ‘앞으로 이 녀석들과 같이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지? 화산파의 막내항렬이었던 청해가 제일이라니……. 정말이지 답이 없군.’ 소무가 혼자만의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을 찰나였다. 그때 위진철의 고함이 신병들의 고막을 강타했다. “거기 너!” 위진철의 손가락이 내뻗은 방향으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눈알을 부라리는 그의 손가락은 분명 소무를 향하고 있었다. “집중 안 해? 기마병들이 돌진해온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했지? 대답하지 못하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해와 일광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지금 수준이라면 한곳으로 밀집해 모여야겠지요. 흩어지면 개죽음입니다. 말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기수를 일격에 벨 수 없는 이상.” 위진철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단지 운이라 치부하고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제법이군. 우리는 좁은 길목에서 궁수들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강호에서 온갖 전투를 다 겪어오며 정점의 위치까지 오른 인물이 바로 검성이다. 정마대전에서는 직접 무림맹의 전술을 짜기도 했을 만큼 소무의 지식은 해박했다. “기습은 곧 선제공격이니,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곡사가 아닌 근거리에서 직사로 사격할 것입니다. 첫발은 일제사격일 것이니, 다시 활의 시위를 먹이고 조준을 마치기 전까지 시간이 있습니다. 기습과 동시에 달려나가서 쓸어버린다면 추가적인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럴 능력이 안 된다면?” “주변에 쓰러진 아군의 시체를 들어 올려 방패로 삼겠습니다. 우리의 첨병들이 궁사들에 대한 교란을 시작할 때까지.” 소무의 발언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광이 뱁새 같은 두 눈을 연신 끔뻑이며 입을 벌렸다. 다른 병사들도 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위진철의 얼굴에 서려 있던 노기는 어느새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오히려 그는 기분이 좋아진 듯 보인다. “훌륭하군! 어디에서 배웠는가?” “그저 몇 권의 서적에서 보았을 뿐입니다.” “신병 중에 쓸 만한 녀석도 있었다니, 아주 기쁘군. 하지만 지금 너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술이 아닌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다. 고로 전술훈련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얘기지. 내일부터는 지금 이 순간이 매우 그리워질 테니, 맘껏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