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무신의 자질 (1)2022.02.08.
검보병대 십육조의 막사. 지금 이곳엔 백여 명의 신병들이 삼삼오오 모여 통성명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밤늦게까지 계속된 전술훈련이 끝난 것이다. 막사 안은 소란스러웠지만 아무도 근처로 다가오지 않았다. 옆에 있는 일광의 인상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백 근이 넘는 다부진 체구와 험악한 얼굴.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신병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옆으로 누워 팔베개한 일광은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청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화산파 출신이라고 했지?” “예. 하지만 이제는 그곳과 인연이 없는 사람입니다.” 일광이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지만, 나이 차이가 컸기에 그 모습이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근데 왜 하필 이곳으로 온 거야? 무공도 익혔겠다, 어디 가서 왈패 짓을 하든 호위무사를 하든 안정적인 일을 하는 게 더 괜찮잖아?” “원래 제 목표는 무림의 천하제일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길이 막혔으니, 천하대장군이 되어 보려고 합니다.” 그때였다. 청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광은 배꼽을 잡고 뒹굴기 시작했다. “푸힛! 푸하하하! 소무야, 방금 들었어?” 소무도 참을 수 없었는지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진지한 청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가 생각하기에도 웃기는 것이다. “훈련병에서부터 대장군까지라. 도대체 몇 단계를 올라가야 가능한 것인지 계산이 안 되는군.” 일광과 소무의 반응에 청해는 울상을 지었다. “휴……. 정말 너무하십니다. 지켜보세요. 다가올 전투에서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겁니다.” “킥킥. 잠이나 푹 자둬. 내일부터가 진짜 훈련이라니까 관리해야지.” 누운 채로 한참이나 웃어젖히던 일광은 머지않아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청해는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집중했다. 막사 안의 신병들이 하나둘씩 수면에 빠져들며, 주변이 조금씩 잠잠해졌다. 소무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누운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개방의 허규와 했던 대화 내용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흥미를 끄는 몇 가지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휘나라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했지만, 그게 영교라니……. 그들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강호 경험이 많은 그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음지에서 활동하며 힘을 비축했던 것일까? 상상 이상으로 은밀하고 교묘한 세력이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없군. 일단은 기존 계획대로 간다. 우선 병사로 시작하여 세상을 알아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답을 찾을 수도 있고, 뭐든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소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신병들은 대부분 곯아떨어져 있었다. 청해는 운기조식으로 수면을 대신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생활이 편해지려면 일광과 청해의 실력을 좀 키워놔야 할 터인데…….’ 둘의 모습을 한 번씩 바라본 소무는 머리가 지끈 아파옴을 느꼈다. ‘일광은 근골이 뛰어나다. 무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타고난 무골이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무공을 익히자니 몸속에 탁기가 가득하여 내공을 축적하기가 쉽지 않겠구나. 반대로 청해는 기본이 잘 잡혀있으나 근골이 별로이니 노력으로 메꿔야겠지. 이거 참 갈 길이 멀겠군.’ 모처럼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소무는 눈을 감고 명상에 집중했다. 그러기를 두 시진. 돌연 그의 귀가 쫑긋했다. 막사의 밖에서 소란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한참이나 남은 상황이었다. ‘첫날만은 다들 푹 쉬게 해줄 줄 알았더니만, 괜한 기대였나?’ 그때였다. 막사 밖에서 북소리가 울리며, 누군가의 외침이 모두의 단잠을 깨우게 했다. 검보병대의 대장인 위진철의 목소리였다. “신병들아 훈련 시작이다! 당장 모두 집합해! 가장 늦게 나오는 다섯 놈은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쿵-! 쿵-! 쿵-! 쿵-! 열댓 명의 병사들이 막사마다 돌아다니며 북을 울리고 있었다. 소무의 막사에서 일광이 벌떡 일어서며 씩씩댔다. “이런 쳐죽일 새끼들, 이제 막 잠들었는데!”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져서 코골이까지 했던 일광이다. 청해가 연신 킥킥대며 웃었다. “큭. 거짓말하지 마세요! 우리 막사에서 일광 형이 가장 먼저 잠들었어요.”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거야!” 이들이 대화하는 사이, 벌써 수십여 명의 신병들이 막사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소무도 막사 밖으로 움직이며 일광과 청해를 향해 말했다. “마지막 다섯 명은 뭔가 벌칙을 준다더군.” 이미 막사 안에 몇 명 남지도 않은 상황이다. 일광과 청해도 부리나케 움직이며 소무의 뒤를 따라 늘어섰다. 겨우 안정권에 접어든 셋은, 늦게 나온 신병들이 벌 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도했다. “겨우 살았네요.” 일광이 청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잘못하면 개망신 당할 뻔했어.” 잠시 후 검보병대의 모든 신병은 위친철을 따라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아직 먼동이 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막사들의 외벽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신병들은 저마다 각오를 다지며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일각이 지난 후 모든 신병이 훈련장에 도열을 마쳤다. 전면으로 삼십 장 거리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나무 상자를 들고 오고 있었다. 곧이어 신병들에게 실전용 검(劍)이 한 자루씩 지급되었다. “앞으로 그것을 너희들의 생명과도 같이 다루거라! 만약 자신의 검을 분실하는 놈이 있다면, 내가 그놈을 죽여버릴 것이다!” 우렁찬 목소리와 표정을 보니 정말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 우리 군단의 천무검법을 보여주겠다. 똑똑히 지켜보도록!” 위진철은 검을 눈높이로 치켜세우고는 어깨 위로 잡아당겼다. 그가 손목을 흔들자 검날이 달빛에 반사되며 울음을 토해냈다. 끼이이이잉-! 그 순간 검 끝이 움직이며 검무(劍舞)가 시작되었다. 그는 신병들이 볼 수 있도록 동작을 천천히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검결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은 일류고수가 아니면 흉내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느린 동작과 빠른 동작이 반복되며 신병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화산파 출신의 청해가 감탄하며 입을 벌렸다. “대단해요. 기술들이 화려하진 않지만, 위력은 엄청날 겁니다.” 모두가 넋을 놓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소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미 한 번 보고 천무검법의 초식을 모두 이해한 상태였다. ‘총 십팔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군. 모든 초식이 환(幻)과 유(柔)의 성질을 포기하고, 쾌(快)와 강(强)에만 집중되어 있다. 역시 전장에서나 쓰는 무공이란 말인가? 대인 살상능력에 특화된 나머지, 일대일의 전투에서는 위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조금의 변칙과 부드러움을 갖춘다면 한층 더 훌륭한 검술로 진화시킬 수 있을 터인데. 안타깝군.’ 검술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어떠한 검법을 쓰든, 어떠한 무기를 집어 들든 크게 의미가 없어진다. 지금의 소무가 그러했다. ‘그래도 초식들이 난해하지 않기 때문에, 신병들의 입문 검술로는 나쁘지 않군.’ 소무에게 관군의 무공이란 심심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검성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의 얘기다. 위진철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 신병들은 격정에 차올라 있었다. “지금부터 모두 따라 해라! 제일 초식 진화난격세(進花亂擊勢)!” 땅을 차고 오르는 위진철의 장검이 어깨높이에서 방향을 선회하며 한 바퀴를 회전했다. 이어서 그것을 따라 하는 이천오백여 명의 신병들. “이여업!” “으랏차!” 그들의 입에서는 우렁찬 함성이 뿜어지고 있었으나, 결과는 가관이었다. 넘어지는 자들이 속출했으며, 심지어는 옆 사람을 베어 상처를 입힌 사람마저 있었다. 검술을 익힌 청해조차 한 번에 따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지, 비틀거리며 겨우 동작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위진철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분노한 듯했다. 그러다 그의 눈이 갑자기 날카롭게 빛나며 번뜩였다. 신병들 가운데 초식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위진철의 시선은 정확히 소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봐, 거기 너! 이리 나와!” 눈이 마주친 소무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 했을 뿐. 단지 한 번에 성공한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실수가 있었다. 소무는 묵묵히 위진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거리가 일 장까지 좁혀졌을 무렵. 갑자기 위진철의 검이 번뜩였다. 다짜고짜 기습이라니. 뱀처럼 똬리를 틀며 움직이는 검 끝은 정확히 소무의 인후를 향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무표정한 소무의 얼굴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검에 살기(殺氣)가 없군.’ 위친철의 검 끝은 정확히 소무의 목젖 앞에서 멈추었다. 겨우 종이 한 장 차이로 말이다. 기습을 당한 것은 소무였지만, 어이없어하는 것은 오히려 위진철이었다. ‘이상하군. 무공을 익힌 자라면 분명 어떻게든 반응을 했어야만 했다. 내가 잘못 보았나? 하지만 어떻게 단 한 번에 천무검법의 일 초식을 완벽히 소화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눈빛을 빛내며 소무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나 어떠한 특이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이것은 천무검법의 이 초식인 일섬무흔(一閃無痕)이다. 따라 해 볼 수 있겠느냐?” 소무는 위진철의 당돌한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따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동작 정도를 흉내 내는 것은 문제없겠지.’ 검날을 눈 밑에 고정한 소무. 그의 왼발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쏘아져 나간 검 끝은 생명이 깃든 것처럼 각도를 틀며 전면을 꿰뚫었다. 푸욱-! 완벽한 일섬무흔의 동작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내력을 담지 않았기에 위력이 약했다는 것뿐이었다. 지켜보던 위진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참이나 멍하니 소무를 바라보았다.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따금 무(武)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자들이 세상에 나오는 법이다. 바로 이러한 경우지.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뒤늦게 발견한 이상, 곧 그 한계가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니 절대 자만하지 말거라!” 말과는 다르게 그는 오른손으로 소무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단지 기쁨을 내색하지 않을 뿐. 자신의 휘하에 재능있는 부하가 들어온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마치 비밀병기를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소무를 돌려보낸 그는 다시 자세를 잡으며 소리쳤다. “재능이 있는 자들은 이 위진철이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줄 것이다! 실력만 있다면 훈련이 끝난 후 십부장이 될 수도, 백부장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자 모두 다시 따라 하거라! 제일 초식 진화난격세(進花亂擊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