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무신의 자질 (3)2022.02.10.
한중성 군사회의실. 군단의 장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기다란 탁상 위에는 중원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여섯 명의 부장은 묵묵히 장양 장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일다경. 누군가가 침묵을 깨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창병대를 지휘하는 부관 양연정으로, 이 중 계급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위진철 부장. 요즘 우리 몰래 검병대에서 정예 병사들을 양성하고 있더군.” “지금 우리 모두 다 같이 신병들을 정예로 양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속일 필요가 뭐 있나. 이미 내 다 알고 있네.” 위진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허. 거참. 우리마저 속일 생각인가? 검병대에서 정예들만 따로 간추려 새벽마다 특별훈련을 시키고 있지 않은가?” 위진철은 목을 길게 빼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내 새벽녘에 잠시 보니, 우리 창병대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겠더군. 그들의 실력이 이미 정규군을 월등히 넘어섰네. 비결이 뭔지 좀 알려주게.” 위진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자신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신병들의 기량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온종일 지옥 같은 훈련을 계속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떤 미친놈들이 잠도 안 자고 시키지도 않은 특별훈련을 한다는 말인가. 위진철의 눈이 회의실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향했다. “유광아. 잠시 와 보거라.” 그는 검보병대 소속의 직속 부하로, 평상시에는 잡일을 하며 신병들의 훈련을 보조해주고 있는 병사였다. 위진철은 그의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저놈이 지금 왜 날 모함하고 있는 것이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 부장님이 지시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십육조 녀석들입니다. 요즘 새벽마다 훈련소에 나와서 검법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병사를 돌려보낸 위진철은 잠시 고민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십육조의 전투력이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어서 뭔가가 이상했던 터였다. 게다가 검병대에 소속된 신병 중에서 자신이 아끼는 귀재들이 모두 십육조의 소속이 아니었던가. ‘음, 그렇단 말이지?’ 갑자기 위진철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제 숨길 수가 없겠군요. 사실 우리 검보병대에서 특공대(特攻隊)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부장들의 이목이 위진철을 향해 집중되었다. 몇몇 인물들이 감탄 어린 시선을 보내는 가운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가 있었다. 첨병 부대의 훈련을 맡은 백문휘였다. “검보병대에서 특공대라니? 우리만으로 부족하다는 말이오?” “고작 삼백 명의 첨병으로 모든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 우리 군은 수적으로 열세이니, 적군의 전열을 무너트리고 적진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정예병들이 필요하오.” “지금 말 다 하셨소?” 자존심이 상한 백문휘는 무엇인가 쏘아붙이려다가 이내 입을 닫고야 말았다. 군사회의실로 장양 장군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장들이 일어서서 기립하는 가운데, 장양이 상석으로 이동하며 말했다. “위진철 부장. 아주 잘하고 있네. 앞장서서 훈련에 애써주니 듬직하군. 앞으로 검병대를 이끌고 우리 군단의 중진을 맡아주시게.” 이들의 대화를 장양이 들었던 것이다. 위진철은 내심 쾌재를 부르짖었다. 양연정의 능력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에 창병대가 중진을 맡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결과가 뒤집혔기 때문이다. 중진에 소속된 병사들은 좌익이나 우익의 병사들보다 더욱 높은 대우를 받는다. 그들을 지휘하는 부장들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소규모의 군단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중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명예의 상징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위진철이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장양이 상석에 앉으며 손짓했다. “모두 앉으시게.” 지도를 살펴보던 장양이 고개를 들며 곽철 부장을 지목했다. 군단의 첩보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장안성의 상황은 어찌 되었는가?” 곽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나절을 버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장안성이 함락될 것은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였다. 애초에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 최소한의 병력이 지금 한중의 병력보다 많았다는 것이다. 그들조차 반나절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니. 분위기가 밝을 수가 없었다. “후. 놈들의 규모는 파악되었는가?” “십만 군세라 합니다. 놈들은 지금 도시에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고 있습니다.” 곽철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장양의 손바닥이 탁상을 때렸다. 콰앙-! “약탈과 노략질이라니!” “놈들의 행태가 도가 지나칩니다. 도시 곳곳이 불타고,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노예로 끌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새 장양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이 불쌍한 백성들을 어이하면 좋단 말인가…….” 모두가 한참이나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일각의 시간이 흐른 이후, 양연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음은 이곳 한중입니다. 지원군은 없는 것입니까?” “양양성에는 지원을 요청할 상황이 아니네. 휘군의 주력 부대가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어. 그리고 서하(西夏) 정벌을 끝낸 삼십만 병력이 곧 남진을 시작할 것일세. 그들을 막기 위해선 이 한중성을 반드시 사수해야만 하네.” “몽골에 이어 서하까지 무너졌으니, 이제 우리 송나라와 고려만 남았군요.” “고려가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지만,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네.” 부장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생각보다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중원의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휘나라의 무서움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궁병대를 책임지고 있는 진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세충 장군께 지원을 요청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안절도사 한세충. 홀로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다고 하여 진만인적(眞萬人敵)이란 별호가 붙여진 인물이다. 대장군 악비와 함께 송나라의 양대 명장으로 추앙받는 자로서, 단순히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송나라의 역대 제일 고수로 알려져 있다. 진립의 제안에 장양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분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이미 남쪽으로 이동 중이네. 족히 몇 달은 걸린다고 봐야겠지. 어차피 지원군은 기대하지도 않았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가진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약간의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르네.” 부장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적군과 비교하면 규모에서나 질에서나 무엇 하나 유리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장양이 부장들을 둘러보며 말문을 이어갔다. “우리는 적군을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무척 만만하게 보고 있을 것일세. 고작 오천 명의 신병들 따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지.” 한중의 신병모집 공고는 섬서 일대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었다. 지금쯤이면 휘군에서도 이미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송나라의 정예부대들도 박살 난 상황에, 그들이 신병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송나라의 다른 군단들조차 장양이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으니 말이다. 양연정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장양은 지도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심하고 있는 놈들의 허를 찔러야겠지. 곽철 부장은 정찰지역을 넓히고 놈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해주게.” * * * 지평선 너머에서 찬란한 빛이 어둠을 집어삼키며 서서히 광채를 드러내고 있다. 대부분의 신병이 아쉬움을 달래며 가장 꿀 같은 잠을 자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밤새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신병들이 있었다. 훈련소에서 미친 듯이 검법을 수련하고 있는 검보병대 십육조였다. 하루하루 눈에 띄게 강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잠자는 것도 마다하는 그들이었다. 휴식시간에 틈틈이 조는 것과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푸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무(武)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자신들이 이토록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가, 무림 제일 고수인 검성의 지도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서 천무검법의 초식을 연마하는 백여 명의 신병들.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서 소무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소무 형님! 육 초식에서 자꾸 넘어지는데, 왜 이러죠?” 기계적으로 달려간 소무는 신병의 허리 부근에 있는 중추혈(中追穴)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너무 쏠려서 그래. 초식을 마무리할 때 이곳에 힘을 줘봐.” 소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또다시 그를 애타게 찾았다. “소무 형님, 어제부터 팔 초식에서 진전이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반사적으로 그곳에 달려간 소무는 그의 등 뒤에서 양쪽 팔목을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그의 몸을 움직여주며 직접 체험시켜주기 시작했다. “앞에 상대가 있다고 생각해봐. 가슴을 찌르고, 이어서 목을 친다는 느낌으로. 마지막에 내지를 때는 이렇게 폭발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촤아악-! 푸욱-! “허공을 가르는 이 느낌을 항상 기억해.” 신병은 무엇인가 느낌이 온 듯 연신 소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신병을 뒤로한 채 걸어가는 소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거 돌아버리겠군.’ 첫날에 재미 삼아 알려준 것이,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러버린 것이다. 강호에서는 누가 자신을 이렇게 부려먹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자신에게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철부지 같은 신병들. 이들의 모습에 소무는 기가 막히면서도 그 나름대로 소소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성장해나가는 조원들의 반응이 꽤 귀여웠기 때문이다. 소무의 눈앞으로 일광이 보였다. 전신의 혈도를 뚫어준 이후로는 알아서 일취월장하고 있었기에 일광은 걱정이 없었다. 문제는 그의 옆에 자리를 잡은 청해였다. 화산파에서 파문당한 이후로 그는 화산의 검법을 모두 봉인해버렸다. 이후 끈기 있는 노력으로 천무검법의 십팔 초식 동작을 모두 익혔지만, 그의 문제는 초식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무에게 조언을 구하지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검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멍하니 지평선만 바라보고 있었다. “청해 동생.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 “휴. 검술이 더는 진전이 없습니다. 아무리 휘둘러도 무의미한 반복일 뿐, 무엇인가의 벽에 가로막힌 것 같아요.” 청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소무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단계를 더 올라가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한 단계였다.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은 소무가 은근슬쩍 그를 떠봤다. “그럴 때는 머리를 식혀보는 것이 최고지. 나는 답답할 때면 시(詩)를 보고는 했어. 마침 기억나는 시가 하나 있군. 한번 들어볼래?” 청해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자 소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먼 산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부드러움 속에는 단단함이 있다. 만약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같이 있다면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 그 무엇이 있을까. 느림 속에는 빠름이 있다. 만약 느림과 빠름이 같이 있다면 그보다 유연한 것이 그 무엇이 있을까. 허함 속에는 실함이 있다. 만약 허함과 실함이 같이 있으면 뚫지 못할 것이 그 무엇이 있을까.” 소무는 곁눈질하며 청해를 은근슬쩍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때.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아?” 청해는 소무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단지 가지런히 옆에 놓여 있는 자신의 검을 재빨리 집어 들고 있을 뿐이었다. 소무는 청해를 뒤로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청해가 마지막인가?’ 그때였다. 돌연 소무의 시선이 오십여 장 너머에 있는 훈련장의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서 무엇인가의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낯익은 인물이 보인다. 그자는 마치 자식새끼들을 바라보는 아비처럼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검보병대의 대장 위진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