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무신의 자질 (4)2022.02.11.
오늘따라 보병훈련장이 후끈 달아오르며 열기를 띠었다. 검보병대에 소속된 신병들이 백여 명씩 모여 각각 원을 이루고 있었다. 스물다섯 개의 조에서 조장들을 뽑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대련을 통해서 가장 강한 자가 조장이 된다. 규칙은 상대방의 몸에 대련용 검이 닿으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각 조에서 내뱉는 응원과 함성이 이곳저곳에서 메아리쳤다. 의외로 대련의 진행 속도는 십육조가 가장 빨랐다. 소무와 일광, 그리고 청해의 실력이 워낙 발군이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만나는 신병들은 시작부터 의지를 잃고야 말았다. 대부분이 일 합 만에 고꾸라지기를 일쑤. 어느새 단 세 명만이 남고야 말았다. 훈련장 한가운데에 마주선 일광과 청해는 각자의 무기를 움켜쥔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들 중에 이기는 자가 소무와 맞붙게 될 것이다. “일광 형님 힘내세요!” “청해야! 이겨야 한다!” 보통은 자신을 쓰러트린 자를 응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광의 심기를 건드리고야 말았다. 모두가 자신을 응원할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일광이 우악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신병들을 힐끔 바라봤다. “방금 청해 응원한 놈들, 이따 뒈졌어! 내가 분명히 확인해뒀다!” 그러나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거친 입담과는 달리 그가 다른 이들을 해코지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해야, 할 수 있어!” “힘내, 청해야!” 일광이 무어라 다시 소리치려는 찰나, 청해의 공격이 먼저 시작되었다. “방심하면 안 되죠!” 청해의 검이 일광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나가자, 당황한 일광은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눕혔다. 가슴 위로 지나가는 청해의 검이 보였다. 쐐에엑-! “이놈!” 재빨리 상체를 한 바퀴 뒤집은 일광은 자세를 낮추며 청해의 다리를 공격해갔다. 그러나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청해의 신형이 지면을 박찼다. 허공에서 세 차례나 검을 내지르는 청해의 공격은 날카롭고도 빨랐다. 모두는 일광이 이번 일격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본능적인 전투 감각은 반사적으로 방어를 개시하게 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일광의 재능. 이것이 소무가 가장 높게 평가했던 그의 자질이었다. 캉-! 캉캉-! 가까스로 막아내며 뒷걸음질 치는 일광. 그를 향한 청해의 맹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 호흡에 무려 서너 번의 공격을 가하는 청해의 실력에 다들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건 일광의 움직임이었다. 거대한 체구가 날다람쥐처럼 움직이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전신의 혈도가 타통된 일광의 움직임은 어지간한 무림인들보다 재빨랐다. 캉-! 카카캉-! 훈련용 검이 쉴 새 없이 부딪치는 가운데, 드디어 일광이 기회를 잡았다. 시작되는 일광의 반격. 그의 일 검이 청해의 왼쪽 어깨와 가슴을 동시에 노리고 들어갔다. 차분히 상체를 비틀며 회피 동작을 개시하던 청해의 미간이 좁혀졌다. 일광의 검이 갑자기 방향을 틀며 우측으로 공격 타점이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소무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탄이 떠올랐다. ‘허. 변칙 공격을 하다니, 제법인데?’ 청해도 설마 일광이 변칙 공격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저히 검을 쳐낼 각도가 보이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청해의 신형은 볼품없이 바닥을 굴렀다. 일광의 얼굴에 회심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 녀석, 나를 원망하지 마라!’ 쏜살같이 다가간 일광의 검이, 일어서려는 청해를 향해 연달아 내질러졌다. 푹-! 푹-! 푹-! 일광의 검이 두더지를 잡듯 땅속을 쑤시는 가운데, 그 틈새를 비집고 청해는 계속 굴러야 했다. 무림인이 가장 치욕스럽게 여긴다는 나려타곤(懶驢打滾)의 회피 동작이었다. 이것을 연달아 전개하는 청해는 심정이 착잡했다. 한참을 구르고 나서야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은 청해는 비장의 한 수를 꺼내었다. 쏜살같이 움직이는 청해의 검이 일광의 허리를 가로로 양단해갔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일광은 전력을 다해 청해의 검을 쳐냈다. 그 순간 소무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서렸다. ‘허초에 말려들었군.’ 카앙-! 검이 부딪치는 순간, 청해는 반발력을 이용하여 재빨리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다. 그의 눈에 완벽하게 비어있는 일광의 옆구리가 보였다. 일광은 더 이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청해의 대련용 검이 일광의 옆구리를 강타하며 둔탁한 소음을 뿜어냈다. 콰악-! “크윽!” 날이 없는 대련용 검이었기 때문에 부상은 없었으나, 옆구리의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 일광은 왼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쥔 채 대련용 검을 내던졌다. “에이, 이런 비열한 녀석. 다음에는 어림없다.” 일광은 허초와 실초를 처음 겪어본 것이다. 지금의 경험으로, 그는 두 번 다시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을 터였다. 일광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며 물러서자 신병들이 그를 위로했다. “일광 형님도 대단했어요!” “정말 아까웠어요. 이길 수도 있었는데!” 일광은 분이 가시지 않는 듯 신병들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이미 늦었어. 다들 뒈질 준비해.” 눈부신 태양의 광휘가 일광의 대머리에서 반짝 빛났다. 어깨가 축 늘어진 일광의 모습에 신병들은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여기서 폭소하면 진짜로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리로 돌아온 일광이 소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믿을 건 너밖에 없다, 소무야. 너까지 지면 요것들이 앞으로 우리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겠어.” 십육조의 신병 중에서 서른을 넘긴 자는 소무와 일광이 유일했다. 어렸을 때부터 뒷골목의 생태계에서 자라왔던 일광이다. 만만하게 보이는 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패배한 이상에는 반드시 소무가 승리해야 했다. 그의 심정을 꿰뚫고 있던 소무는 웃음을 참으며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맡겨둬.” 소무가 청해의 앞으로 걸어 나오자 신병들의 환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컸다. “드디어 소무 형님이 나오셨다!” “우와아아아!” “형님, 꼭 이기셔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청해를 응원하는 신병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코 그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자신들의 검법 훈련을 이끌어줬던 인물이 누구인가. 소무는 자신들에게 있어서 마음속의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내심 그가 조장이 되기를, 모두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소무의 승리를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그가 훈련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모두가 지켜봐왔다. 그의 움직임과 검술은 날이 갈수록 점점 빨라졌으며 매서워지고 있었다. 신병들은 결코 눈치챌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아주 조금씩 자신의 무력을 노출시키고자 하는 소무의 의도였다는 것을. 앞으로 어떠한 위험이 다가올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안배해둔 것이다. 소무는 묵묵히 바닥에서 일광이 내던진 검을 주워들었다. 이미 천무검법의 기수식을 마친 청해는 묵묵히 소무를 노려봤다. 소무는 단지 오른손으로 움켜쥔 검의 끝을 지면으로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서열 관계는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겠지.’ 고요한 소무의 눈동자가 청해를 응시했다. “오너라.” 청해는 아직 그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동작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갑니다.” 검을 우측 어깨 위로 잡아당긴 청해. 그가 드디어 공격을 개시했다. 쏜살같이 다가간 청해가 소무의 미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허공을 가르며 쇄도하는 검 끝에는 마치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천무검법의 이 초식인 일섬무흔(一閃無痕)이었다. 청해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일광과의 전투에서 체력이 소비되었기 때문에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완벽한 청해의 동작에 신병들이 감탄했다. 동시에 소무에게는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그가 방어는커녕 아무런 회피동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무는 단지 고개를 우측으로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파앙-! 청해의 검 끝이 한 치 차이로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시원한 바람을 뿜어냈다. 신병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찰나, 재빨리 검을 회수한 청해는 또다시 공격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소무는 이미 그의 전면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무공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한 발자국을 움직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 한 발자국이 청해의 측면을 점할 수 있게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청해는 자신이 서 있는 모든 공간이 소무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착각을 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무가 손목을 비틀자 넓은 검면이 드러나며 태양 빛을 머금었다. 곧이어 그것은 허점이 드러난 청해의 옆구리를 살며시 타격했다. 퍼억-! 둔탁한 충격이 청해에게 전달되어왔으나 그는 신음조차 없었다. 옆구리의 통증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가 천부적인 무(武)의 자질이 있다고 한들,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신병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가운데, 청해가 자괴감에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한 겁니까?” “무엇을?” 청해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엄청난 검술을 펼친 것도 아니었으며, 현란한 보법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냥 피하고 때린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제가 왜 진 겁니까?” “내가 더 강하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내가 너보다 강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는 거지?” “휴…….” 소무의 시선이 상심해있는 청해를 향했다. 이 녀석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또다시 자괴감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술술 얘기해줄 수도 없는 노릇.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은 소무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언제나 마음이 착잡할 때는 시를 듣는 것이 최고지. 문득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 청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도 그가 읊어주는 시 구절을 듣다가 우연히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무의 시를 들으면 묘하게도 정신이 맑아졌다. “나의 공간은 어디인가. 나의 공간은 어디까지이고, 너의 공간은 어디까지인가. 내가 너의 공간을 빼앗는다면, 네가 서 있을 공간은 어디가 있단 말인가. 이 모든 곳이 나의 공간이라면, 내가 가지 못할 공간은 어디가 있단 말인가.” 소무는 곁눈질하며 은근슬쩍 청해를 살펴보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인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곧 이해하겠지. 자신의 공간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미 진 싸움이니라.’ 십육조의 대련이 마무리되었다. 미동조차 없는 청해를 내버려 둔 채, 신병들은 다른 조의 대련을 구경하러 흩어졌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십육조와 같은 긴장감은 느낄 수 없었다. 지루한 시간 끝에 한 시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모든 대련이 끝났다. 그리고 각 조에서 선출된 스물다섯 명의 조장. 그들의 어깨에 명예를 상징하는 붉은 휘장이 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