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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어둠속에 비친 서광 (3) (14/250)

14화 어둠속에 비친 서광 (3)2022.02.14.

객잔 안에 숨 막히는 살기가 감돌았다. 네 명의 도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검집을 움켜쥐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헛소리를 들은 것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난생처음으로 들어봤던 쌍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말해 보거라.” 도사들은 여차하면 출수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광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뱁새 같은 눈을 뜨고 이들을 연신 노려봤다. “닥치라고 했다, 이 생쥐같이 생긴 놈아. 어딜 눈알을 부라려? 콱 씨.” 도사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뒷골목의 왈패들 입에서나 나올 법한 거친 입담에 현기증마저 느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막막했다. 백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사형들을 재촉했다. “화산파가 이런 모욕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강호에서 어떻게 보겠어요? 저 못생긴 자식, 그냥 죽여 버려요!”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백희 사매의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는 무기조차 소지하고 있지 않은 관군의 병사들이다. 게다가 보는 눈이 너무나 많았다. 이들을 죽인다면 화산파가 관군과 척을 지게 되는 것이다. 사문에서도 관군의 일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엄포가 떨어진 상황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계속되는 일광의 도발에 백희는 방방 뛰며 사형들을 재촉했다. “빨리 어떻게 좀 해봐요!” 독촉하지 않아도, 다른 도사들은 이미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가장 곤욕스러워하는 사람은 청해였다. 그는 얼굴을 들 수가 없는지 연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듯 자책하고 있었다. 소무가 청해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리며 말했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좀 봐봐.” 청해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십육조의 모든 신병들이 분노하며, 일광을 응원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게 다시 소무의 나직한 음성이 전해졌다. “다들 너를 위해서 분노하고 있어. 그런데도 네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저들을 바보로 만드는 거야.” 기분이 묘했다. 화산파 내에서 사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받을 때, 그 누가 자신의 편에 서 있었던가. 매화검수들한테 죽도록 맞을 때도 모든 도사가 한자리에 모여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그뿐인가. 장문인을 포함한 문파의 어르신들조차 자신을 더러운 망나니 취급했다. 단 한 사람, 사부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경험이 있었던가? 처음으로 겪어보는 감정. 그것은 청해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모두가 나의 편이란 말이지?’ 청해는 분명 동요하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소무가 그의 귓가에 결정타를 날렸다. “한 가지는 확실해. 네가 지금 회피한다면, 오늘 이 순간을 평생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야.” 식탁 밑에 감추어진 청해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이제 화산파는 나의 사형제들이 아니다. 나를 위해 함께 분노하는 십육조의 동료들이 나의 형제들이다. 다시는 후회할 짓을 하지 않겠어.’ 콰앙-! 누군가가 식탁을 후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실랑이를 벌이던 일광과 화산파의 도사들이 고개를 돌리자, 주먹을 움켜쥔 청해가 보였다. “그만들 하세요. 저도 더는 못 참습니다.” 청해를 바라보던 백희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너 미쳤어? 내가 누군지 몰라? 막내 항렬 주제에 어디 사저한테…….” 백희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청해가 그녀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 입 닥치라고요!” 그동안 일광과 같이 생활해오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태어나서 난생처음으로 해본 욕설이었다. 속이 미친 듯이 후련했다. 신병들은 물론이거니와 소무조차도 두 눈을 끔뻑이며 그를 응시했다. “너, 너, 너……. 지금…….” 백희는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다른 세 명의 도사들도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아앙-! “죽어, 이 새끼야!” 다짜고짜 청해를 향해 달려드는 그녀의 모습에, 지켜보던 모두가 당황했다. 바로 옆자리의 식탁이라 불과 일 장도 되지 않는 거리다. 단 한 발자국으로 청해는 그녀의 살상 거리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 사매!” 다른 도사들이 다급히 백희를 만류했지만, 지금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청해의 목젖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그녀의 검 끝은 살의(殺意)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흥분한 백희의 검에 제대로 된 변화나 허초 따위가 들어있을 리가 만무했다. 너무나도 정직한 검법. 그리고 청해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단어. ‘느리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이대 제자의 검이 이렇게 느릴 수가 없었다. 화산파에서는 감히 눈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수준 차이가 있었던 인물들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속속들이 나타나는 그녀의 허점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청해는 단지 상체를 비트는 것만으로 그녀의 검을 흘려보냈다. 자신의 코앞을 스쳐 지나는 검날이 보였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움직이던 청해의 오른손이 아래에서 차고 오르며 그녀의 손목을 타격했다. 콰직-! “아아악!” 백희는 손목이 꺾이며 검을 놓쳐버렸다. 자세가 무너진 그녀의 앞가슴으로 허점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청해의 반격. 활짝 펼친 그의 왼손이 백희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앙-! “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하고 나니, 백희는 조금 전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청해가 공격에 내력을 싣지 않았기 때문에 큰 부상은 입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검은 어느새 청해의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다. 단 한 수에 이대 제자의 검을 낚아챈 것이다. 청해는 방금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강해진 것인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구한테 무공을 지도받았는지도 말이다. 백희가 손목을 움켜쥔 채 다른 도사들을 향해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거예요?” 이제야 정신을 차린 세 명의 도사들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창-! 차창-! “청해 이놈,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세 자루의 검이 청해를 향해 겨눠지자, 객잔 안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은 객잔의 구석으로 찌그러지며,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했다. 그때 소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적을 깨트렸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끝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무림인들이니 무림의 방식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소? 결투라든지.” 소무의 제안에 도사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는 합법적으로 저들을 손봐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해가 어떻게 해서 사매의 검을 빼앗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말을 바꾸기 전에 재빨리 승낙해야만 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현정이라는 자로, 이대 제자 중에서도 실력이 상위권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죽거나 다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면 승낙하지.” 소무가 정중하게 말했음에도 현정은 하대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소무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신 규칙은 우리가 정하겠소. 소란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 승부는 단 한 번으로. 패배하는 쪽 전원이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것이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 정도면 병사들이 굉장히 양보한 것이다. “좋다. 우리 쪽엔 내가 나서지. 너희들 중에선 누가 나오겠느냐.” 소무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중 한 명을 고르시오. 그자가 패한다면 전원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겠소.” 현정의 눈썹이 꿈틀댔다. 자신이 누구인가. 구파일방에서도 최상위권으로 평가받는 화산파의 이대 제자이다. 상대의 말은 아무 병졸이나 나와도 자신을 이길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어이가 없군. 정녕 오늘 피를 보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어서 고르기나 하시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소무는 그가 청해를 선택하거나, 외모상 약해 보이는 조원을 지목하리라 예상했다. 그게 자신이 유도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정은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인물이었다. 그의 시선이 병졸들의 생김새를 한 명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강해 보이는 인물을 지목했다. “저 무식한 대머리 놈으로 하지.” 소무는 일광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려는 것인가?” 소무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눈치가 없는 녀석이군. 매화검수나 일대 제자였다면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겉멋만 잔뜩 들어간 철부지들이라 적당히 혼내주고 보내려 했건만,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들다니.’ 소무의 입장에서 화산파의 이대 제자들이란 까마득한 무림의 후배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이런 무림의 신출내기들을 무수히 겪어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을 눌러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일광이라면 적당히라는 것이 없을 터. “진심으로 당신을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오.” “감히 우리 화산의 명예에 먹칠한 대가를 치러줘야겠다. 난 저 대머리 새끼를 골랐으니, 자신이 없으면 모두 꿇어.” “후. 하는 수 없군.” 소무가 손짓하자 조원들이 객잔의 식탁들을 외곽으로 밀쳐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중앙으로 반경 삼 장 너비의 적당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앞으로 나선 일광은 벌써 몸이 근질거리는지 손마디를 풀기 시작했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마디마디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현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일광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기를 들어라.” 청해가 일광에게 다가가 백희에게 뺏은 검을 내밀었으나,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됐어. 개X끼를 교육할 때는 몽둥이보다 맨손이 더 효과가 좋거든.” 비록 검술을 수련하고 있지만, 일광이 가장 좋아하는 전투방식은 박투술이다. 조금 전 백희의 움직임을 지켜본 그는 이미 저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도 말이다. “병졸 주제에 박투술을 익혔다는 말인가?” 움켜쥔 두 주먹을 얼굴 높이까지 치켜든 일광의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뒷골목에서 익혀왔던 실전 무술. 훈련소에서 무공을 수련한 이후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일광 자신도 궁금했다. 달라진 자신의 신체가 뿜어낼 수 있는 주먹이 최대한으로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지 말이다. “시끄럽고 오기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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