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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어둠속에 비친 서광 (4) (15/250)

15화 어둠속에 비친 서광 (4)2022.02.15.

일광이 상체를 숙이고 있음에도, 현정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컸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꾼과 싸우는 한 마리의 곰과도 같아 보였다. “잠시 후에도 그 입을 나불댈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현정이 어깨 위로 검을 잡아당기며 기수식을 취했다. 출수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러자 일광은 두 발로 지면을 계속 튕기며 그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언제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그만의 준비 동작이었다. 보법도 아니고 처음 보는 요란한 움직임에 현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일광을 노려보던 현정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순식간에 일광의 지척까지 접근하는 그의 몸놀림은 백희보다 월등히 빨라 보였다. 어깨 위로 잡아당긴 매화검이 흔들리며 일광의 상체를 향해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대 제자들이 익히는 화산파의 기본검법. 낙영검법(落英劍法) 육 초식 낙영비화(落影飛花)였다. 쏜살같이 움직이는 현정의 쾌검은 금방이라도 일광을 우측 어깨에서부터 사선으로 잘라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마주하는 일광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대련에서 마주했던 소무의 검술에 비하면 너무나도 느리고 정직했다. 일광이 재빨리 자세를 낮추며 좌측으로 몸을 비틀자, 현정의 검이 그의 코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헛손질을 한 현정의 몸에 허점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결코 그것을 놓칠 일광이 아니었다. 오른쪽 주먹을 밑으로 끌어당긴 그는 허리를 비틀며 상체를 회전했다. 아래에서부터 승천하듯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주먹에는 일광의 모든 힘이 담겨 있었다. 곧이어 훤하게 드러난 현정의 얼굴에, 일광의 주먹이 사정없이 틀어박혀 버렸다. 콰아아앙-! 마치 문짝이 박살 날 때나 나올 법한 거대한 굉음이 객잔을 진동시켰다. 그와 함께 떠오른 현정의 신형은 이 장을 날아 객잔의 외벽에 볼품없이 처박히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쓰러진 현정에게 향했다. 동시에 입이 떡하니 벌어진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눈알이 돌아가 흰자만 보였으며, 입에서는 정체 모를 거품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산파의 도사들은 얼음이 된 듯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충격이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이다. 근처에 있던 십육조의 조원들이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상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떡해? 이빨 다 나갔어.” “살아있어?” “아직 숨은 붙어있는 것 같아.”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비켜봐.” 어느새 다가온 소무가 조원들을 헤집고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맥박이 약하고 기혈이 불안정했다.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화산파의 도사가 한중의 관군에게 죽었다고 소문나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소무는 은밀히 자신의 진기를 현정에게 주입했다. 그의 중후한 기운은 현정의 전신을 맴돌며 빠른 속도로 기혈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그러게 내가 다른 상대를 고르라고 하지 않았소?” 이미 기절해 있는 그가 소무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소무는 단지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창백하게 식어가던 현정의 얼굴과 체온이 다시 온기를 되찾고 있었다. “합의를 본 정당한 결투였으니 우리를 원망하지 마시오.” 소무가 몇 마디를 하는 사이, 어느새 그는 기혈이 안정되며 혈색이 살아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응급조치는 모두 끝마쳤다. 고비는 넘겼으니 약간의 의술이면 회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터. “철두!” 소무가 부르자 철두가 재빨리 다가갔다. 이곳의 토박이 출신이라고 했던 조원이었다. “네, 조장님.” “이 근처에 의술을 아는 자가 있어?” “바로 옆에 제가 아는 약방이 있습니다.” “그래, 가서 의원을 좀 모셔 와. 사람부터 살려놓고 봐야지.” 소무가 뒤를 돌아보자 머쓱해하는 일광의 모습이 보였다. 스스로도 좀 심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화산파의 도사들. 이들에게 이제 청해는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괴력을 가지고 있는 일광과 어이없게 죽어가는 사형의 모습에 그저 넋만 놓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마시고, 눕힐 자리 좀 만들어 주시오.” 소무에 말에 정신이 퍼뜩 돌아온 도사들이 식탁을 붙여 자리를 마련했다. 조원들이 현정을 자리에 눕히고 잠시 기다리자, 철두가 의원을 모셔왔다. “의원님, 여기입니다!” 흰색 장삼의 팔목을 걷어붙인 의원은 재빨리 다가가 현정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기혈은 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잠시 후면 깨어날 것입니다.” 의원은 목재로 만들어진 약통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었다. 석회와 말린 약초를 짓이겨 만든 금창약이었다. 그것을 현정의 얼굴에 골고루 바른 후 중침을 몇 군데 찔러 넣었다. “하루만 지나면 부기가 빠질 것입니다.” 의원이 치료를 시작한 지 일각이 지나자, 현정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통증.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병졸들의 얼굴. 그들의 눈빛에서 분노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이들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청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존심이 무참히 구겨졌다. 난생처음으로 겪는 상황에 허탈할 지경이었다. 현정은 한참이나 그대로 누워있었다. 몸을 움직일 기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던 갑부가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잃으면 이러한 표정일까? 지금 현정의 표정이 그러했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오로지 공허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반각의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이제는 지킬 자존심도 없지 않은가.’ “현정 사형…….” “사형, 괜찮으세요?” 현정은 다른 도사들의 말은 무시한 채 다짜고짜 병졸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두는 의외라는 듯 놀랐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패배를 시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현정의 무릎이 바닥에 닿을 찰나, 소무의 왼손이 재빨리 움직이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정도면 되었소. 강호의 기둥인 화산파가 병졸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뭐가 되겠소.” 현정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의 심경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였다. 백희가 현정의 옆으로 다가오며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소무에게 소리쳤다. “이런다고 너희들이 무사할 줄 알아!? 내가 화산에 돌아가기만 하면…….” 그때였다. 돌연 현정의 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백희의 따귀를 날렸다. 쫘아아악-! “아악!”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움켜쥔 채, 백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입을 꾹 닫았다. 사실 현정도 많이 참은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눈앞의 백희 사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감정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가봐도 되겠소?” 소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현정이 양손을 모아 포권지례를 취했다. 어느새 다른 도사들도 행동을 같이했다. 그가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소무가 같이 양손을 모아 화답했다. 그러자 십육조의 조원들도 하나둘씩 두 손을 모아 마주 포권을 건넸다. 그중에는 일광과 청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모두는 현정이 동료들을 이끌고 객잔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깨가 축 처진 그의 모습이 다소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소무의 눈동자가 지그시 가라앉았다. ‘지금껏 굽실대는 자들만 만나보았으니 그럴 수밖에. 드넓은 세상에 나 또한 적수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거늘, 어찌 화산의 이름만으로 자만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의 경험이 너희를 더 성장시켜줄 것이니, 상심할 필요가 없느니라.’ 잠시 후 화산파의 도사들이 시야에서 모두 사라지자 일광이 호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술맛은 보고 가야지! 마셔보자!” * * * 한중성 군사회의실. 조금 전 장양 장군을 포함한 휘하의 부장들이 다급히 모였다. 장안에 주둔해 있던 휘군의 병력이 출진했다는 첩보가 당도했기 때문이다. 저들의 목표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곽철 부장. 적들의 규모와 이동 경로가 파악되었는가?” “미현(眉縣)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해오는 군세가 이만 명. 그리고 동쪽의 석천(石泉)을 우회하여 남진하려는 군세가 일만 오천입니다. 대부분이 보병으로 편제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병력은 아직 장안성에 주둔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장안성에서 출진한 두 명의 장군은 서로 경쟁하듯 각기 다른 방향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기병의 숫자를 최소화하고 보병 위주로 편제한 것은 한중이 수성전을 벌이리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곳까지 얼마나 걸리겠는가.” “서쪽에서 오는 군단이 이레는 더 빨리 당도할 것입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지도를 살펴보는 장양은 한참이나 말문을 열지 않았다. 일각의 시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그의 입이 열렸다. “출전하여 미현을 통해 오는 병사들과 먼저 일전을 벌여야겠네.” 부관 양연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야전(野戰)을 벌이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들의 군세는 우리의 네 배입니다. 게다가 우리 신병들은 아직 훈련도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경험 없는 훈련병들을 데리고 몇 배나 많은 적군을 정면에서 상대한다니. 웃음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무공을 배우게 했다고 한들,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수성전을 포기하고 전면전을 벌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다른 부장들도 양연정의 말에 동의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양은 단호했다. “한중성이 동서 양쪽에서 포위를 당한다면, 고작 오천의 병사들로 어찌 수성전을 벌일 수가 있겠는가.” 장양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자신들보다 많은 수로 방어했던 장안성이 반나절도 안 되어 함락당한 마당이다. 수성전으로 승산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야전을 벌이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작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묘책이 있으십니까?” “적들이 방심하고 있을 터이니, 야습으로 공격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 허나 실전 경험이 없는 신병들이 기습 작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네. 하지만 매복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 어디가 좋겠는가?” 부장들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전공에 눈이 먼 두 명의 장수는 오로지 앞만 보고 한중성을 향해 오고 있다. 매복 작전이 성공할 확률은 매우 높았다. 그러나 작전이 성공한다고 해도, 압도적인 인원수의 차이는 쉽게 극복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이긴다고 해도 한중으로 복귀하여 다시 석천에서 오는 군단과 맞서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시도해봐야 했다. 첩보 임무를 담당하는 곽철 부장이 말했다. “적들은 반드시 정군산의 산자락에 자리한 대로를 끼고 행군해야 합니다. 이곳에 매복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군산은 지형이 높아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고, 산세가 험하여 매복할 수 있는 곳이 많습니다.” 장양은 지도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고민했다. 한참을 살펴보아도 곽철이 제안한 곳보다 적절한 곳은 찾기가 힘들었다. “그리하는 것이 좋겠군. 양연정 부장이 천오백 명의 창병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매복하게.” 장양이 지도 한쪽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계속해서 말문을 이어갔다. “우리는 이곳에서 진을 치고 놈들과 대치할 것이네. 충분히 기다렸다가 전투가 시작된 이후에 놈들의 후미를 공격해주시게. 아무리 인원이 많다고 한들, 앞뒤에서 공격을 당한다면 진세가 흔들리고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겠지.” “알겠습니다, 장군.” 고개를 끄덕여 보인 장양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피난을 가지 않고 한중에 백성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우리를 믿고 있기 때문일세. 우리가 이대로 포기한다면 백성들은 무참히 짓밟히고 유린당할 걸세. 우리의 목숨으로 이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느새 장양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목이 메는지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야 마지막 말을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나는 나의 병사들을 믿네. 그리고 자네들을 믿네. 우리가 살기를 포기하고 맞선다면 조금의 희망은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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