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분노는 두려움을 삼킨다 (2)2022.02.17.
정군산의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들판. 이곳에 진세를 형성하고 있는 아군은 동요하고 있었다. 지평선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휘군의 기세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적군의 숫자는 지켜보는 이들의 기를 죽이는 데 충분했다. 아군의 군세 삼천오백 명. 그 앞에 이만 명에 달하는 휘군의 군세가 늘어섰다. 이들의 거리는 불과 백여 장이다. 압도적인 인원의 차이에 송나라의 병사들은 시작하기도 전에 겁에 질려 술렁였다. 소무가 자리한 십육조는 전열을 지키는 방패병들의 바로 뒷줄이었다. 선봉에 자리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소무는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신병들의 절규를 듣고 있었다. “미친 거 아니야? 저 숫자랑 어떻게 싸워?” “씨X!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거 첫 출전에 뒈지게 생겼네.” 어디선가 시작된 두려움은 순식간에 군단 전체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방패병들의 중심에 서 있던 위진철이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겁먹지 마라! 우리는 저들보다 강하다! 우리는 금강진경을 익혔고, 무공을 익혔다!” 신병들에게 위진철의 고함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리 절세의 비급을 준다고 한들, 불과 몇 달 만에 고수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급기야 장교급의 병사들이 다급히 신병들을 독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입을 꾹 닫고 자리를 지키는 자들은 십육조뿐이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어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일광이 눈알을 부라리면서 조원들을 다그쳤기 때문이다. “우리 조에서 이빨 보이는 놈이 있으면 다 털어버릴 줄 알아!” 며칠 전 화산파의 도사가 이빨 털리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기에, 감히 일광에게 대드는 조원은 없었다. 소무는 묵묵히 정면의 휘군을 바라보았다. 말 위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휘군의 장수들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그가 초인적인 청각을 집중하자 그들의 대화 소리가 좀 더 자세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푸하하! 설마 저 인원으로 우리랑 야전을 벌이겠다고 마중 나온 거야?” “한중은 거저먹는 성이라더니. 소문보다 더하잖아?” 이들은 한중의 군단이 자신들에게 찾아온 것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수많은 송나라의 군단을 격파한 노련한 강군이, 신병 훈련도 끝내지 못한 오합지졸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의 이 할에도 못 미치는 병력을 말이다. 전공을 올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먹잇감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잠시 후 십여 명에 이르는 부장들의 틈새에서 군단의 총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이 번뜩이는 갑주를 걸치고 각궁을 움켜쥔 그의 모습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도가 흘렀다. 그가 타고 있는 군마에도 두꺼운 갑주가 씌워져 있었으며, 마갑 아래에는 장창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투구 속에서 빛나는 그의 맹수 같은 눈빛만으로도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소무의 시선이 다시 아군의 대열 후미를 향했다. 그곳에선 갑자기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가는 장양 장군이 보였다. 그의 옆에 있던 곽철 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고 있었다. “장군, 저놈은 무카입니다.” “나도 알고 있네.” 무카 장군은 몽골 초원에서 손에 꼽혔던 맹장으로, 몇 년 전 휘나라에 투항한 인물이다. 귀신같은 활 솜씨로 유명한 데다 날카로운 창술 또한 대적할 자가 없기에, 이미 송나라의 많은 장수가 그에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상대가 무카라면 기존의 작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아무리 그럴싸한 계획을 세우더라도 변수는 항상 발생하기 마련이다. 상대의 군단에 무카와 같은 맹장이 있을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카는 말 위에 올라탄 채 터벅터벅 양쪽 진영의 중앙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이곳의 장수들을 하나씩 훑어보고 있었다. 검병대의 뒤쪽에 자리한 오백 명의 궁병들이 그를 겨냥했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휘군이 바로 공격을 개시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간혹 맹수가 먹잇감을 잡아놓고 바로 죽이지 않고 가지고 노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무카는 맛있는 음식을 어떻게 더 맛있게 먹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정확히 중간지점에서 멈춘 무카가 아군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 중 이 무카와 싸워 볼 용기 있는 자 누가 있는가!” 무카의 고함은 전장의 모든 병사가 들을 수 있도록 우렁찼다.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중후한 내공. 그것을 바라보는 검병대의 눈빛에는 조금씩 두려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일기토를 신청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저들이 자신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군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유혹은 없었다. 상대는 부장급의 장수가 아니었다. 군단을 지휘하는 장군이었다. 만에 하나 일기토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병사들의 사기를 한 번에 끌어올리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신병들이 모두 고개를 돌리며 장양 장군을 바라보았다. 아군에서도 누군가가 나서서 무카를 쓰러트려 주길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장양은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곽철 부장이 그에게 조언했다. “장군, 일기토를 거절하십시오. 저놈은 양연정 부관이 나서더라도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응하지 않는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더욱 추락할 것이네. 이대로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군단이 와해될 수 있어…….” 군단의 제일 맹장 양연정. 양가창법의 달인으로 알려진 그조차 무카를 상대로는 승리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는 이미 매복해 있는 상황이라 불러들일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한숨을 내쉬던 장양은 이윽고 결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위진철 부장을 불러오너라.” 잠시 후 병사들을 헤집고 위진철이 당도하며 기립했다. “승산이 있겠는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양연정을 제외한다면 그가 군단에서 제일이었다. 그런 그조차 승리를 입에 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장양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자네 손에 달려있네.” 그는 가슴 위에 오른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이제는 멈출 수가 없었다. 어깨 위에 천근의 돌덩이가 얹어진 것처럼 그의 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병사들을 헤집고 나아가는 위진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양의 얼굴엔 씁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위진철이 앞으로 나서자, 검병대의 신병들이 목청이 터지도록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대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위진철이야말로 자신들이 지금껏 목격한 가장 강한 무인이었다. “위-진-철-!” “위-진-철-!” “위-진-철-!” 병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응원했지만, 그것이 그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했다. 그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의 화살을 조심하십시오.”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십육조의 조장이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위진철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잠시 후 그가 움직임을 개시했다. 전열의 병사에게서 방패 하나를 낚아챈 위진철은 곧이어 무카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장양과 무카와의 거리는 약 오십 장. 그 거리가 삼십 장 이내로 좁혀지자 무카가 등 뒤에서 세 대의 화살을 뽑아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각궁에 시위를 먹인 그는 다가오는 위진철을 정확히 겨냥하고 발사했다. 파아앙-! 전면에서 쏜살같이 날아드는 세 대의 화살은 초승달처럼 휘며 각기 다른 방위에서 다가왔다. ‘어림없다!’ 위진철은 방패를 전면으로 내뻗으며 질주를 계속했다. 전면에서 다가오는 첫 번째 화살을 성공적으로 튕겨낸 위진철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타앗-! 그 순간 그가 서 있던 바닥으로 두 대의 화살이 틀어박히며 거센 먼지를 뿜어냈다. 무카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피해낸 것이다. 하지만 일 장 높이의 허공에 떠 있는 그의 표정은 참담하게 변해있었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코앞에서 또 한 대의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있는 방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화살촉에 밝은 광채가 서려 있는 걸 보면, 무카의 내기(內氣)를 머금고 있는 것이리라. 화살에 내기를 담아 쏘아 보내는 것은 어지간한 궁술의 달인이 아니면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위진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재빨리 방패를 들어 올린 그는 전면을 방어했다. 꽈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방패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화살촉은 위진철의 왼쪽 어깨를 정확히 관통했다. 푸욱-! “크으윽!” 충격으로 인해 왼손의 방패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아군 전체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었다. 지면에 내려선 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계속해서 무카를 향해 내달렸다. 무카와의 거리가 오 장까지 가까워지자 위진철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이놈!” 위진철이 움켜쥔 장검의 끄트머리에서 유백색의 아지랑이가 발현되며 검날을 감싸기 시작했다. 검기(劍氣)를 발현시킨 것이다. 그를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무카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윽고 군마를 박차고 도약한 무카. 그는 어느새 마갑에 걸쳐 있던 장창을 움켜쥐고 있었다. 위진철의 머리 위에서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무카의 장창은 마치 벼락과도 같았다. 창기(槍氣)를 가득 머금고 있는 그의 일격은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내력이 담겨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를 악다문 위진철은 온 힘을 다해 검을 치켜들며 그의 창끝을 쳐내었다. 까아앙-! 검기와 창기가 부딪치는 순간 위진철은 손목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 통증 따위를 생각할 시간적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무카의 맹공이 연달아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수세에 몰린 위진철은 뒷걸음질 치며 힘겹게 창을 쳐내는 데 급급했다. 무카의 창술은 결코 자신이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철저히 거리를 두고 장창의 길이를 이용한 공격만을 반복했다. 위진철이 제대로 된 반격을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캉-! 카카캉-!! 위진철은 어깨의 부상 때문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매 합을 겨룰 때마다 기혈이 뒤틀리고 있었다. 서로의 무기에 담긴 내공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었다. 열 합을 겨뤘을 즈음 기어코 위진철은 손발이 조금씩 꼬이며 허점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무카의 창이 빛을 발했다. 푸욱-! “끄아악!”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왔다. 위진철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창 자루가 보였다. 이윽고 무카가 창을 뽑아 들자 위진철은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야 말았다. 한 호흡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털썩-! 위진철의 얼굴에는 억울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자신이 죽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이대로 군단이 무너져야 하는 것이 너무나 분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충혈된 위진철의 시선은 아군의 진지를 향하고 있었다. ‘장군……. 면목이…… 없습니다…….’ 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윽고 위진철의 신형이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풀썩-! 바닥에 쓰러진 위진철은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무카는 자신의 급소를 피해 공격했다. 마치 자신을 좀 더 살려두려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진지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한중의 병사들은 충격에 휩싸이고 있었다. 자신들을 이끌어야 할 검병대의 대장이 허무하게 패배했다. 그토록 강인했던 자가 변변히 맞서지도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검을 움켜쥔 병사들은 손아귀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풀리고 있었다. 장양 또한 할 말을 잃은 채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카가 자신들을 향해 다시 우렁찬 고함을 내뱉기 시작했다. “누가 또 무카와 맞서보겠느냐!” 군단의 누구도 미동하지 않았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대꾸가 없자 무카가 돌연 쓰러진 위진철의 등짝을 짓밟았다. 그의 발아래로 꿈틀대는 위진철의 모습이 보였다. “크흑……. 대장님…….” “끄으윽…….” 수많은 병사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공포까지. 그들은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무카의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누가 나에게 맞서 이놈을 구해보겠느냐!” 위진철이 허무하게 당한 이상, 감히 누구도 앞으로 나서려는 장수가 없었다. 단지 선두에 자리한 한 명의 병졸이 미간을 꿈틀대고 있을 뿐이었다. 무카는 앞으로 나서려는 자가 없자 흥미를 잃은 듯했다. 곧이어 하늘 높이 치켜든 그의 창끝이 위진철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수급을 자르려는 것이다. “감히 오합지졸 따위가 나의 군단을 가로막은 징벌이다!” 그때였다. 창을 내지르려던 무카는 하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적진이 술렁이며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전열의 방패병들을 비집고, 한 명의 병사가 자신을 향해 내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신병들이 고함을 내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야 이 미친놈아!” “당장 돌아와!” 그리고 그를 마주 바라보는 무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병사 따위가 자신에게 일기토를 걸어온 것이다. 그것도 장교급의 병사가 아닌, 일개 병졸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