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분노는 두려움을 삼킨다 (3) (18/250)

18화 분노는 두려움을 삼킨다 (3)2022.02.18.

넋을 놓고 있는 장양 장군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보였다. 초점을 잃은 그의 두 눈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위진철이 일기토에서 패배함으로써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때 군단의 전열이 소란해지며 그의 시선을 이끌었다. 잠시 후, 흐릿했던 장양의 눈동자가 갑자기 초점을 잡았다. 감히 무카를 향해 용맹하게 돌진하는 한 명의 병졸을 보았기 때문이다. 복장을 보니 정규군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게도 훈련병이었다. 위진철만큼은 아니었지만,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날렵한 몸놀림. 장양은 그가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저 병사가 누구인가!?” 투구에 가려서 머리 모양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장수들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윽고 장양의 시선이 병졸의 왼팔에 매어진 붉은 휘장으로 향했다. 조장급의 훈련병이리라. 짐작 가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되었네. 누군지 알 것 같네.” 위진철이 심혈을 기울여 키웠다던 특공대. 십육조의 조장 소무였다. 한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천 명의 병사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거 십육조의 조장 아니야?” “완전히 미쳤군.” “그래도 우리 중에서는 한가락 하잖아?” “대장님도 당한 마당에 지가 무슨 재주로…….” 무카는 장창을 지면에 꽂은 채 각궁에 시위를 먹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확신했다. 십육조의 조장이 그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죽을 것임을. 무카의 각궁은 소무의 급소가 아닌 다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한 번에 죽일 생각이 없다는 의미였다. 잠시 후 무카의 각궁에서 두 대의 화살이 빠져나오며 바람을 찢기 시작했다. 두 화살은 마치 생명이 깃들어있는 것처럼 정확히 소무의 양다리를 향했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모두는 잠시 후 쓰러질 소무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아무런 회피 동작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 소무의 지척까지 접근한 두 개의 화살. 하지만 적중하기 직전, 누가 잡아당기듯 미세하게 각도를 틀었다. 순간적으로 전신의 내기를 외부로 방출시키는 무형의 반탄강기(返彈罡氣)가 펼쳐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소무의 몸에서 발현되었다가 사그라진 사실은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다. 호신강기보다 한 단계 위의 기술로, 절정고수조차 시전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무공이었다. 푸푹-! 두 대의 화살은 땅속 깊이 파고들며 힘을 다했다. 무카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내 화살이 빗나갔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 장 밖에서 날아가는 새도 맞출 수 있는 자신의 화살이 빗나간 것이다. ‘운이 좋은 놈이로군. 하지만 이번에는 어림없다.’ 또다시 무카의 활에서 쏘아져 나온 화살이 소무의 옆구리를 향했다. 단 한 발에 자신의 모든 심력을 집중했다. 이번엔 어떤 일이 있어도 적중하리라 자신했다. 눈앞의 병사는 이번에도 회피 동작을 개시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적중되기 직전에 상체를 슬쩍 비틀었을 뿐이다. 이어서 화살촉이 소무의 갑옷을 찢고 지나가며 불꽃을 만들어냈다. 끼이익-! 갑옷 일부분이 움푹 파이며 파손되었지만, 그는 어떠한 충격도 받지 않은 모습이다. 무카와 소무와의 거리 이십오 장. 그 거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 우연이란 말인가?’ 무카의 눈썹이 꿈틀댔다. 두 번이나 공격이 빗나간 것은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오른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연사를 위한 자신만의 준비 동작이었다. 심호흡을 내쉰 무카. 잠시 후 그의 오른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눈 깜짝할 사이 다섯 발의 화살이 소무의 전신 곳곳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퍼퍽-! 퍽-! 퍽-! 무엇인가가 적중당하는 듯 둔탁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너덜너덜해지는 갑옷과 튕겨 날아가는 투구. 그러나 그의 전신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이제야 무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분명 무엇인가 이상했다. 눈앞의 병사는 분명 검병대의 대장보다 움직임이 느리다. 그런데도 자신의 공격이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고 있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어느새 둘의 거리는 십 장 이내로 좁혀들어 있었다. 지켜보던 한중의 병사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기적적으로 무카의 화살 세례를 돌파해낸 십육조의 조장. ‘어쩌면’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이 그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어느새 둘의 거리는 오 장 이내로 좁혀졌다. 무카는 재빨리 각궁을 놓으며 지면에 박힌 장창을 뽑아 들었다. 부하들의 앞에서 망신을 당한 상황이었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머리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카의 창날이 유백색의 휘광을 뿜어내며 아지랑이 치기 시작했다. 창기(槍氣)를 머금은 것이다. ‘일격에 끝내주마.’ 눈앞의 병졸은 자신이 창기를 뿜어냈음에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딘 무카는 장창을 우측 어깨 뒤로 잡아당겼다. 남은 거리는 이 장. 드디어 무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물고기를 향해 작살을 던지듯, 일직선으로 쇄도해나가는 창끝은 정확히 소무의 앞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창날에 서린 섬뜩한 창기는 무엇이든 찢어발길 듯 가공스러웠다. 쐐에에엑-! 바람을 가르는 창날의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돌연 소무의 신형이 넘어지듯이 급격히 뒤로 기울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코앞에서 마주하는 무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상대가 순간적으로 보인 동작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섬전 같은 움직임이었다. 무카 자신조차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한 줄기 불안한 감정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무렵. 지면을 끌며 미끄러져 나아가는 소무의 앞가슴으로 무카의 창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써컹-! 소무의 갑옷이 좌우로 갈라지며 터져나갔다. 그러나 신체에는 어떠한 피해도 줄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나간 것이다. 어느새 자신의 측면까지 파고든 그의 신형이 튕겨지듯이 솟아올랐다. 그 순간 무카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허공으로 떠오른 그가 어느새 등 뒤에서 폭풍처럼 회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도대체 누구…….’ 이것은 무카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품을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무카의 목덜미를 향해 나아가는 소무의 검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소무의 검날에는 푸른 기운이 미세하게 서려 있었다. 서걱-!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카의 수급이 하늘 높이 튕겨 올랐다. 멀찍이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양쪽 진영의 인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군단의 총대장이 고작 훈련도 마치지 못한 신병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것도 일격에 말이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사뿐히 지면에 내려선 소무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힘을 조절하면서 연기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군.’ 잠시 후 무카의 수급이 소무의 발아래로 떨어졌다. 투욱-! 소무의 시선이 묵묵히 무카의 군단을 향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비웃던 무카의 부장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의 장양 장군처럼 말이다. 이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자신들의 총대장이 일개 병졸에게 죽었으니, 사기가 곤두박질치는 것은 당연했다. 소무는 다시 서서히 고개를 돌리며 아군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눈앞에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검병대의 대열에서 누군가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와, 시X! 이게 말이 돼?”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욕지거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다.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검을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그러고는 목청이 터질 듯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와아아아아-!!!!” 추락했던 아군의 사기가 다시 하늘을 꿰뚫기 시작했다. 그동안 느껴졌던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분노와 전의가 대신 채워지고 있었다. 그때 병사들의 전면으로 장양 장군이 말을 타고 나섰다. 장양은 맹장(猛將)이라기보다는 지장(智將)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가 직접 선두에 나서는 것은 병사들에게 더 큰 용기를 주었다. 사기가 하늘 높이 승천한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보았느냐! 우리는 저들보다 강하다! 너희들의 검은 적군의 대장을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강하다!” 병사들의 검을 쥔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전율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닫자 장양이 공격의 신호를 알렸다. “저들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보여주어라!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어라!! 내가 앞장설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공격하라!!!” “우와아아아-!!!” “끄아아아악-!!” “우아아아악-!!!” 병사들이 동시에 내뱉는 함성은 정군산 아래의 들판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장양이 선두에서 말을 박차자, 뒤를 따라 신병들이 죽기 살기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나 장양보다 더 빨리 움직인 자가 있었으니, 바로 십육조의 일광이었다. “이 썅넘의 새끼들! 오늘 닭모가지를 전부 비틀어주마!!!” 거대한 체구를 가진 일광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든든해 보였다. 청해가 보법을 빨리하며, 그의 옆에서 대열을 맞추었다. 그 모습은 흡사 거대한 곰과 여우가 나란히 달리는 것과 같았다. 이들의 뒤로 십육조의 조원들이 진형을 형성하며 대열에 합류했다. 이 거센 열기를 마주하던 휘군의 병사들은 움찔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보았던 오합지졸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휘군에서도 누군가가 공격을 지시했지만, 함성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붙잡고 전면을 향해 묵묵히 나아갈 뿐이었다. 한편 전장의 중심에 있던 소무는 쓰러져있는 위진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잠시 후 격전의 소용돌이가 될 위치였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듯 소무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비록 관통상을 당했지만, 다행히 급소는 피했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소무는 손가락으로 위진철의 혈도를 눌러가며 지혈부터 했다. 이어서 그의 왼손에서 뿜어져 나온 중후한 내기가 위진철의 장기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전장의 소용돌이에서 보이는 태연함. 그 모습은 주변의 광경과 너무나 대조되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양쪽 진영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며 들판을 뒤흔들었다. 소무가 있는 곳으로도 어김없이 휘군의 병사들이 돌진해왔다. 두 자루의 검날이 동시에 그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소무는 그들에게 눈길조차도 주지 않았다. 단지 오른손에 움켜쥔 검을 등 뒤로 한번 휘둘렀을 뿐이다. 그러자 그의 검에서 무형의 강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들을 단번에 양단시켜버렸다. 써컹-! 사방에서 몰려든 휘군의 병사들은 방심한 듯 위진철만 바라보고 있는 소무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일장 이내로 접근하는 적들은 영문도 모른 채 두부 썰리듯 계속해서 갈라져 나갈 뿐이었다.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숨 막히는 난전에서 그것을 눈치챌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반각이 흐른 뒤, 소무가 위진철을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급조치를 끝마친 것이다. 이제 그의 생사는 하늘의 손에 달려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무카 장군이 타고 왔던 군마가 보였다. 마갑을 두른 이 흑마는 마치 영물처럼 제자리에서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소무는 기절한 위진철을 말 위에 태워 아군의 진영이 있는 방향으로 떠나보냈다. 그런 뒤 소무의 시선은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1654866922798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