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리의 송곳니 (1)2022.02.20.
휘군의 병사들을 향한 추격은 반 시진이 지난 이후에 끝을 맺었다. 더 많은 적을 주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석천현을 거쳐 또 다른 적군이 공격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장양의 군단은 서둘러 한중성으로 복귀해야 했다. 정군산에서 한중까지는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다. 그곳으로 향하는 모든 이들의 표정은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도 전율이 가시지 않는 듯, 행렬의 열기는 무척 뜨거웠다. 오천 명의 신병들이 이만 군세에 맞서 궤멸적인 피해를 준 것이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아군의 피해는 고작 오백여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천여 명에 이르는 포로까지 확보했으니, 그야말로 기적적인 전과였다. 잠시 후 행군하는 병사들의 시야에 굳건한 한중성의 성벽이 보였다. 성벽 위에는 백여 명의 병졸들이 긴장한 얼굴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땡볕 아래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군단의 깃발을 발견하고 흥분해서 펄쩍 뛰었다. “우리 군단이 돌아왔어!” “우리가 승리했다고!” “우와아아아!!!” 누군가가 성벽의 적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야 임마! 당장 성문을 열어!” 성내에서는 광란의 물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미 백성들은 아침부터 거리로 나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마치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잠시 후 성문으로 장양 장군과 휘하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백성들은 환호하고 눈물을 흘렸다. 거리에 좌우로 늘어서서 만세를 부르짖었으며, 병사들에게 다가와 먹을 것을 포함해 온갖 집기류를 건네주는 자들도 즐비했다. 백성들이 이렇게 환대해주니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행렬의 중간쯤에 자리한 소무가 슬쩍 우측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만두 하나를 움켜쥔 채 훌쩍거리는 일광의 모습이 보였다. 고아로 자라 어렸을 때부터 뒷골목에서만 생활해왔던 그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환대에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이다. 황소 같은 덩치로 훌쩍거리는 모습에 소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 일광 너 지금 우는 거야?”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소무가 이렇게 웃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울긴 누가 울어? 그냥 뭐가 들어가서 그래.” 옆에서 청해가 킥킥거리며 거들었다. “에이, 저도 봤어요. 일광 형님, 방금 울었잖아요.” “이 쥐똥만 한 놈이. 뭘 안다고 나불거려!” 일광이 청해를 향해 아이의 머리만 한 주먹으로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십육조의 조원들이 동시에 폭소했다. “킥킥킥. 나도 봤어.” “큭큭. 나도.” “아니, 이 녀석들이!” 일광이 조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소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철두야. 너희 할머니 저기 계신다.” 모두의 시선이 소무가 말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이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할머니가 왜 여기 있어?” 철두를 발견한 할머니는 반색하며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철두야!” “어휴! 나오지 말라니까! 창피하게 진짜.” 할머니는 철두의 얼굴을 훑어보며 다친 데가 없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이쿠 내 새끼,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게지?” “봐봐. 여기 우리 조는 한 명도 안 다쳤어.” 할머니는 일광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체구가 가장 큰 그가 대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우리 철두 좀 잘 부탁드립니다, 나으리. 얘가 아직 어려서…….” 일광은 사뭇 어색한지 짐짓 헛기침하며 말했다. “흠흠! 뭐…….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보살피고 있으니.” 철두는 동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휴! 암튼 집에 들어가 있어. 앞으로 이런 데 나오지 좀 말고.” 철두는 멀어져 가는 할머니를 보며 들어가라고 연신 손짓을 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가 철두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후후. 부럽구나, 철두는. 투정 부릴 가족도 있고.” “죄송합니다. 우리 할머니가 원래 좀 나서는 걸 좋아해서…….”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지 못하군. 우리 모두 전쟁통에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나중에 네가 죽어갈 때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언제일지 생각해봐.” 철두는 입을 꾹 닫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그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 소무가 말한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기 때문이다. 철두가 멀어져가는 할머니를 소리쳐 불렀다. “할머니! 나 꼭 무사히 돌아갈 테니까, 그동안 건강하게 있어!” 손을 흔드는 철두를 확인한 할머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중성의 거리를 지나쳐, 장양 군단의 행렬이 향한 곳은 연병장이었다. 단상 위에 올라선 장양은 병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다 행정관을 향해 물었다. “사망자가 얼마나 되는가.” “사백팔십칠 명입니다.” 이만 명의 적군이 궤멸하다시피 했으나, 아군의 피해는 고작 일 할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좋아할 만도 했으나 장양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죽어간 병사와 그들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었다.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어야 마땅하나, 적군을 코앞에 두어 그러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도다…….’ 한숨을 내쉰 장양은 모든 병사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외쳤다. “우리는 전례 없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동료들이 죽었다! 그들에게 조의를 표하는바, 나 장양은 조국을 위해 죽어간 이들의 가족에게 이 년치의 급료와 곡식을 지급할 것이다!” 장양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곳곳에서 병사들의 환호성이 뿜어져 나왔다. 가족을 두고 있는 자들은 이제 마음 놓고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행정관이 다급히 다가와서 장양에게 속삭였다. “장군, 이런 식으로 병사들이 사망할 때마다 계속 보상을 지급한다면, 군단의 재정이 금세 바닥날 것입니다.” 장양의 미간이 갑자기 좁혀졌다. “황실에 승전보를 올리고, 함께 성벽의 보수 비용과 공성병기 제작 비용을 요청하라. 그래도 부족한가? 그럼 다른 장군들에게 적군의 수급을 모두 팔아넘기거라.” 적군의 수급은 곧 명예이자 전공이고, 돈이었다. 수급은 각지의 군단들끼리 공공연하게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부장급이나 장군의 수급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훨씬 비싸게 쳐주는 게 다반사. 명예와 전공을 포기하는 대신 군자금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실에서 진상을 알게 된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미 목숨을 내놓았다 하지 않았더냐!” 행정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호통치는 장양 장군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의 앞날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전공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장군들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일반 병사들에게 뿌린 이상 살아남기는 힘들었다. 황제의 주위에는 아첨에 능한 환관 출신의 관료들만 가득했다. 정사에는 관심이 없는 그들의 판결에 자비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미 간신배들의 혀 놀림에 억울하게 죽어간 충신들이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장양은 행정관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다시 전면을 응시했다. “너희들은 이제 훈련병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휘나라의 강군을 무찌른 송나라의 정규군이다! 바로 너희들이 이 장양 군단의 정예병들이다!” “우와아아아-!” “와아아아아-!”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정규군이 된 이 순간부터는 급료가 지급되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호성이 잦아들자 행정관이 나서서 몇 명의 이름을 지목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자들은 앞으로!” 논공행상하려는 것임을 모두가 짐작했다. 호명된 자들은 이십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는 부장급의 장수를 죽인 일광과 청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소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십육조의 조원들이 어리둥절하며 조장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전장에서 이들이 보인 용맹함은 동료들의 귀감이 되었으니, 그 보상으로 십부장의 직책을 부여할 것이다! 용기 있게 맞서 싸운 자들에게는 언제나 포상이 뒤따를 것이다!” 십부장은 열 명의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를 말한다. 현재 군단의 편제 방식에서는 의미가 없는 직책이었지만, 명예와 함께 좀 더 높은 급료가 지급된다. 휘나라의 군단에도 십호장에서부터 만호장까지의 비슷한 계급이 존재한다. 장양의 말이 끝나자 행정병들이 검은색 휘장을 그들의 어깨에 매어 주었다. 함성이 나올 만도 했지만, 병사들의 대부분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동아줄이 되어준 자신들의 영웅이 지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양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검병대 십육조의 조장은 앞으로 나오시게!” 모두가 영웅의 얼굴을 눈으로 찾았다. 그는 갑주와 투구가 망가졌기에 자신들과 달리 붉은색의 군복만 입고 있었다. 소무를 바라보는 장양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병사는 적장을 쓰러트리고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느니라! 그 공로는 이루어 말할 수가 없는바, 백부장의 직책을 부여할 것이다!” 장양 장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병사들의 환호가 동시다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지금까지 들려온 함성 중에서도 가장 컸으며 우렁찼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병사들의 환호성을 뒤로한 채, 장양이 소무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고생했네. 마음 같아선 자네를 당장 부장으로 기용하고 싶지만, 나의 권한은 여기까지일세. 그 이상은 상소를 올려 정식 절차를 거쳐야 하지. 하지만 자네라면 머지않아 해낼 수 있을 것 같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자들은 장군의 재량하에 백부장의 직급까지 특별 승진이 가능하다. 그리고 임명이 가능한 숫자는 군단의 크기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과찬이십니다.” “허허. 겸손할 필요 없네. 위진철 부장이 자네의 자질을 알아보고 심혈을 기울여 키웠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더 뛰어나군. 그래도 어떻게 무카에게 맞설 생각을 하였는가.” 소무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자신이 위진철에게 따로 특별훈련을 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필요성도 없었다. “그자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노렸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만약 전력을 다했다면 당했을 것입니다.” “천운이로군. 상대가 병졸인 것을 보고 만만하게 보았다가 허를 찔린 게지. 하지만 적장을 쓰러트린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그래서 내 자네한테 부탁할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이번 전투에서 특공대의 필요성이 확실히 입증되었네. 나는 이 부대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십육조를 검병대에서 분리하여 별동대로 운영할 생각이네.”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부대를 자네가 맡아주시게.” “위진철 부장님이 깨어나시면 서운해하실 텐데요?” “허허. 오히려 기뻐할 것일세. 내가 잘 얘기하지. 새로운 부대의 이름은 무엇으로 하는 게 좋겠는가? 자네가 이 특수부대의 대장이니 이름 정도는 양보하지.” 잠시 고민하던 소무는 나직이 두 글자를 내뱉었다. “랑아(狼牙).” “랑아? 이리의 송곳니라. 아주 좋군. 앞으로 특수작전을 수행하려면 새로운 군복이 필요하겠지. 이것까진 내 자네들에게 선물로 준비해주겠네.” 소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 위진철 부장에게 가 볼 참이었네. 함께 가지 않겠나? 그가 자네를 가장 총애하였으니,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