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리의 송곳니 (3)2022.02.22.
한중성으로부터 동쪽으로 삼십여 리. 하월읍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진득한 혈향(血香)이 가득했다. 마을 한쪽에 산을 이루고 있는 시체 더미. 잔혹하게 살해된 시신에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여성들의 시신은 나체로 뒹구는 게 태반이었으며, 남성은 사지가 온전한 자가 거의 없었다. 공통점은 한쪽 귀가 모두 잘려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이런 참혹한 짓을 저질렀는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백성들의 터전을 빼앗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자들. 석천현을 거쳐 당도한 휘나라의 군단이었다. 마을 뒷산 언덕에서 백여 마리의 검은 이리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체구가 가장 큰 이리가 연신 씩씩댔다. “이 찢어 죽일 놈들을 당장에 그냥!” 일광이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려 하자, 소무가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조금만 참아. 날이 좀 더 어두워져야 하니.” 소무가 뒤를 돌아보자, 숨죽여 웅크린 백여 명의 부하들이 보였다. 이들의 표정 또한 일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참혹하게 희생된 주민들의 모습이 한중성의 백성들과 겹쳐 보이자 그 분노가 더해갔다. “한 시진 후에 움직일 거니, 다들 좀 쉬어둬.” 소무는 다시 전면을 응시하며 놈들의 진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을의 중심부에 설치된 이십여 개의 야전 막사들. 그곳에는 장교급의 인사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주위로는 천장만 가려진 수백여 개의 천막이 보였다. 병사들은 그곳에 짚단을 깔고 누워 있었다. 곳곳으로 경계병들이 보였으나, 그들의 얼굴에서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졸고 있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심지어는 비어있는 민가에 숨어서 술을 마시는 자들도 있었다. 완벽하게 방심하고 있었지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적을 무척 만만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빛 사이로 드러난 소무의 두 눈이 하늘로 향했다. 가장 깊은 잠에 빠져드는 시각인 인(寅)시였다. 때가 무르익자 그의 입이 달싹였다. “일광은 오십 명을 데리고 입구에서부터 좌측으로, 청해는 나머지와 함께 우측으로 돌면서 흔들어줘.” 소무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광의 두 눈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금수만도 못한 새끼들, 오늘 눈알을 전부 뽑아주마.” 일광의 욕지거리에 소무는 실소를 머금었다. “우리의 임무는 적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지, 죽이는 게 아니야.” 일광에게 소무의 말은 들려오지 않는 듯했다.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휘군의 병사들을 때려죽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청해가 자신의 검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며 물었다. “대장 형은 어디로 가시게요?” “나는 먼저 잠입해서 지휘관들의 막사에 불을 지피려고.” “위험하지 않겠어요?” “문제없어. 여의치 않으면 그냥 나올 거니까. 잠입할 시간이 필요하니, 다들 일각 후에 출발해.” 대원들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소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만 오천에 이르는 적진에 홀로 잠입하다니. 무척이나 무모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괴물 같은 대장을 굴뚝같이 믿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소무의 모습은 마치 검은 이리를 연상케 했다. 곧이어 그는 한 천막의 그림자로 숨어 들어갔다. 그곳에서부터는 그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숨어든 그는 기(氣)를 갈무리하며 하체를 낮추었다. 목표는 근처의 나무 한 그루. 지면을 박차고 새처럼 날아올랐다. 타앗-! 자리를 잡은 소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대원들에게 검기를 다루는 고수는 무리다. 미리 제거해 두어야겠지. 암살은 나의 방식이 아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군.’ 검기는 같은 검기 또는 그 이상의 경지인 검강이 아니라면 막을 수가 없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다고 한들, 검기를 발출하지 못한다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월읍의 마을 곳곳에 늘어선 나무들이 바람결에 가지를 휘날리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광경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무엇인가 어색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과 나뭇잎들이 움직이는 방향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표를 정한 소무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한 번의 바람이 휘날릴 때마다 나무와 천막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어김없이 늘어져 갔다. 그리고 그것이 향한 위치는 야전 막사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몇 번의 호흡 만에 한 막사의 지붕 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새처럼 내려앉았다. 상체를 낮춘 그는 은밀히 막사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을 살펴보았다. ‘목표는 네 명. 우선 장군부터 잡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가장 안쪽에 자리한 막사였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입구의 모습부터가 달랐다. 거대한 크기와 호피로 장식된 화려함까지. 누가 있을지는 들여다보지 않아도 확실했다. 거리는 십여 장. 소무는 상체를 활처럼 구부린 채 심호흡을 들이켰다. 곧이어 막사의 지붕을 박찬 그의 신형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타앗-! 허공을 질주하는 그의 움직임이 마치 한 마리의 박쥐와 같았다. 한 번의 도약으로 목표지점에 사뿐하게 내려앉은 소무는 호흡을 멈추었다. 단지 새 한 마리가 지붕 위에 날아든 것 정도의 소음. 그것이 전부였다. 기척을 죽인 소무는 장군의 기운이 느껴지는 위치까지 이동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움직이며 야전 막사의 지붕을 갈라냈다. 부아악-! 휘나라의 장군은 침상 위에 흰 장삼을 입고 누워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화들짝 놀란 그는 머리맡의 검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소무의 움직임이 한발 빨랐다. 벼락이 치듯, 천장에서 일직선으로 내려온 검 끝은 단번에 그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푸우욱-! 생명이 꺼져가는 장군은 소무를 바라보며, 억울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무의 손에는 자비가 없었다. “네놈 손에 죽어간 이곳의 주민들도 같은 눈빛을 했겠지.” 서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잘려나간 수급이 바닥을 뒹굴었다. 일개 군단을 이끌었던 장군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었다. 소무는 그의 수급을 움켜쥐고는, 다시 막사의 천장 위로 뛰어올랐다. 다음 목표를 찾기 위함이다. ‘이제 반각쯤 남았겠군.’ 하지만 도약하려던 소무는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을 곳곳에서 불길이 타오르며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휴. 일광 녀석, 그새를 못 참고…….’ 안 봐도 훤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장수들과 장교급의 병사들이 헐레벌떡 막사에서 뛰쳐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기습이라고?” “어떤 미친놈들이?” 소무가 자리한 막사로도 몇몇 장교들이 찾아와 다급히 소리치고 있었다. “기습입니다, 장군!” 서둘러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검기 발출이 가능할 정도의 내기가 느껴지는 장수는 세 명. 만약 그들이 대원들에게 가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지붕에서 도약한 소무는 근처의 화로 앞에 내려섰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타오르는 나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태연하게 근처의 막사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막사 밖으로 뛰쳐나온 자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소무를 바라보았다. “저 새끼 뭐야?” “당장 잡아!” 몇몇 장수들과 수십여 명의 장교들이 소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소무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신기와 같은 경신술을 펼치며,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막사에 불을 붙이면서 말이다. 다섯 개의 막사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소무는 도주를 멈추었다. 순식간에 포위된 소무에게 백여 자루의 무기가 겨누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소무의 오른손에 고정될 무렵. 한쪽에서 고성이 울렸다. 누군가가 장군의 수급을 본 것이다. “자, 장군!” “저, 저 살수 놈이 장군을 암살했다!” 적들이 당황할 찰나, 소무는 지면을 박차며 포위망의 돌파를 시작했다. 쏜살같이 날아오른 그는 어느새 적들의 머리 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타앗-! 장교들의 머리를 타고 넘은 소무는 망설임 없이 전면으로 내달렸다. ‘아직 휘나라에 어떤 고수들이 있는지 모른다. 지금은 적군에게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겠지.’ 백양현에서 마주친 휘나라의 정예부대만 해도 이들과는 무력의 차원이 달랐다. 만일에 대비해서라도 이곳에서 자신의 무력을 노출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무를 뒤따르는 적군은 어느새 수백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저 새끼 잡아!” “장군을 암살한 놈이다! 반드시 잡아라!” 소무는 일부러 달리는 속도를 조절했다. 경공이 빠른 장수들만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잠시 후 마을 뒷산의 언덕을 오를 때쯤이었다. 은근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열 명의 장수가 보였다. 다른 이들은 추격을 포기한 듯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검기 발출이 가능한 자가 셋. 그리고 나머지는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로군.’ 적당한 위치에 이르자 소무의 신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멈춰 세워졌다. 열 명의 장수가 재빨리 소무를 둘러쌌다. 그러나 장수들은 곧이어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다. 상대의 표정이 너무나 태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호흡까지. 계급이 가장 높아 보이는 자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설마 우릴 유인한 것이란 말인가?”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 있었군.” 그제야 장수들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뒤쫓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자신들의 장군이 소리도 없이 암살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아군의 진영 한복판에서 말이다. 상대는 왼손을 뒷짐 진 채, 오른손으로 움켜쥔 검을 내리깔고 있었다. 기수식을 취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때 장수들의 귓가로 서늘한 소무의 음성이 나직이 메아리쳤다. “이곳에 와서 보니 이제는 확신해도 되겠더군. 너희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무엇인가 불길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기도가 달라져 있었다. 태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그의 기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도주하든지, 맞서 싸우든지 선택해야만 했다. 휘군의 장수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차피 상대는 한 명이지 않은가. “쳐라!” 그것이 신호였다. 열 자루의 검이 동시에 소무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모두 허공만 가를 뿐,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난무하는 공격을 상대가 모조리 피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헛손질에 장수들은 속이 타들어 갔다. 애꿎은 바람만 계속해서 찢겨나가며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윽고 소무가 반격을 개시하자 그들의 신형은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사방으로는 금속성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캉-! 카카캉-! 카카캉-! 격돌은 팽팽한 듯 보였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무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기 때문이다. 소무는 이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장수들의 포위는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어느 순간, 소무의 검날에서 푸른 빛무리가 발현되며 섬뜩하게 타올랐다. 완전한 검강의 발현. 이를 본 장수들의 얼굴에 후회가 떠올랐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크아악!” 장수 한 명이 사지가 절단된 채 나가떨어진 것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