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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참새가 날아들다 (1) (23/250)

23화 참새가 날아들다 (1)2022.02.23.

토막 난 열 구의 시신을 뒤로 한 채, 검은 이리 한 마리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흑갑과 투구 사이에서는 고요한 눈동자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 펼쳐진 전장을 살펴보고 있는 소무였다. ‘더는 볼 필요도 없겠군.’ 아군의 본진이 공격을 개시하자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에 급급했다. 잔혹하게 살해당한 주민들을 본 병사들은 눈이 뒤집혀 있었다. 그랬기에, 그 뒤에 벌어진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야습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적군의 지휘부까지 궤멸당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전장을 살피던 소무의 시선이 랑아대의 대원들을 찾았다. 난전에 휘말려 다소 지친 기색들이었지만, 죽거나 다친 대원은 없어 보였다. 소무는 군단에 합류하기 위해 마을로 이동했다. 묵묵히 거리를 걷는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전장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거리에는 나뒹구는 시체들과 진득한 혈향(血香).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주민들이 살았던 마을이라니.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소무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좌측의 민가에서 작은 인기척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원목과 진흙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허름한 집. 왠지 모르게 호기심이 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질러진 집기류들로 난장판이 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초인적인 감각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의 시야가 바닥으로 향했다. 짚단을 엮어 만든 장판을 들어내자 조그만 나무문이 드러났다. ‘이곳에 누군가 숨어있군.’ 소무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았다. 그 순간 그의 움직임이 얼음처럼 정지했다. 칠흑 같은 암흑. 불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작은 눈동자 두 개가 빛나고 있었다. 떨리는 눈망울과 흘러내리는 눈물. 공포가 극에 달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어둠 속에 하루 이상을 홀로 숨어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소무는 격정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아는 아이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슨 하늘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의 입이 달싹이며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유화……?” 이미 백양현에서 잔혹하게 죽어간 아이다.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아이의 이름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소무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너와 같은 송나라의 사람이다.” 아이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제로 끌어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저씨는 송나라의 사람이고, 한중으로 갈 거다. 함께 가고 싶으면 나오너라. 강제하지는 않을 테니, 계속 그곳에 있어도 괜찮다.” 소무는 바닥의 나무문을 열어 둔 채 등을 돌렸다. 자신이 선택할 일이 아니었다. 민가의 밖으로 나온 소무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한참이나 자리에 멍하니 서서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일각이 흐른 뒤. 그가 걸음을 떼려는 찰나였다. 집안에서부터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나오고 있었다. 소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가자꾸나.” 아이는 소무의 옆에 붙어서 걸음을 함께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아직도 의심의 표정이 남아있었다. 그걸 의식한 소무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함께 있다 보면 마음을 열게 되는 법. 급할 것은 없었다. 보폭을 느리게 맞춘 소무는 목적지로 정한 장소로 천천히 이동했다. 마을의 회관으로 쓰였을 법한 장소. 백여 평에 달하는 이 부지는 임무를 마친 랑아대의 집결 장소였다. 청해가 먼저 오십 명의 대원을 이끌고 도착해 있었다. “이 꼬맹이는 누구예요?” 청해가 두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민가에서 찾았어. 한중으로 데려가려고.” “귀엽네~. 이름이 뭐니?” 청해의 물음에도 아이는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뭐야! 우리가 더 늦은 거야?” 일광이었다. 그의 거대한 양손에서는 지금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적병을 때려죽였는지 상상조차 안 갈 정도였다. 아이는 험악한 인상의 일광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무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채고 멋쩍어진 일광은, 쪼그려 앉은 채 아이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흠흠. 까꿍!” 그 모습이 더 무서웠던 것일까. 아이는 소무의 등에 머리를 파묻은 채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해. 네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나도 무서우니까.” “요즘 것들은 미(美)의 기준을 몰라.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몰라보고.” “너한테 잘생겼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섭기 때문일 거야. 어쨌거나 이제 이곳은 정리가 다 된 것 같은데?” “음, 다들 마을 밖에 집결하고 있어. 우리도 이제 출발해야 해.” “바로 가지.” 이들은 일다경이 더 지나고 나서야 집결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칠천여 명에 이르는 아군 병사들이 도열을 끝마친 뒤였다. 한쪽 구석에는 천여 명의 포로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진형을 갖추고 한중성으로 이동할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주위를 살펴보던 장양 장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번 전투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랑아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대 이상으로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들. 장양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격려했다. “고생들 많았네.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대승을 거둘 수가 없었을 걸세. 적장들까지 놀라서 모두 도망갔어. 아주 완벽했네.” 소무는 가볍게 묵례를 해 보이며 대답했다. “장군님의 계책이 먹혀들었던 것뿐입니다.” 장양의 시선이 소무의 팔을 붙잡고 늘어진 아이에게 향했다. “허허허. 겸손할 필요 없네. 헌데 이 아이는 누구인가?” “민가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입니다.” “화월읍에 생존자가 있었단 말인가? 잘 구해내었네. 한중에 돌아가면 돌봐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걸세.” 소무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의 뜻을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큰 눈망울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아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었다. “아무에게나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가 준비될 때까지만이라도 저희가 보살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허헛. 이거 참, 난감한 일이로군. 군단에는 규율이 있네. 민간인이 병사들의 막사에서 함께 지낼 수는 없는 법일세.” “부탁드리겠습니다.” 장양은 잠시 고민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군단의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그였지만, 사정하는 소무의 부탁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랑아대의 대장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군단의 행정업무가 좀 바쁘다고 하더군. 행정 보좌로는 민간인도 임명이 가능하긴 하지. 내 제안이 어떠한가?” 장양이 아이에게 직접적인 업무를 시킬 리는 없었다. 명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리라. 소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장군님.” * * * 하월읍의 전투가 있던 날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한중이 휘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 기적 같은 소식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승리였다. 그리고 모두가 고무된 사이 또 한 번의 희소식이 들려왔다. 악비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단이 양양의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렇게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한중은 다가올 더 큰 위험에 대비하여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랑아대를 맡은 소무는 대원들의 훈련을 내공수련 위주로 편성하였다. 이들의 전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검기 발출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검기를 발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반갑자에 이르는 내공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훈련이 막사에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소무는 은밀히 대원들의 내공수련을 도왔다. 이들에게 주어진 수면시간은 고작 한 시진. 지금이 바로 하루에서 가장 꿀 같은 시간이었다. “일어나세요!” 갑작스러운 고음에 일광의 한쪽 눈이 살짝 떠졌다.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양손을 허리에 얹고 큰 눈망울을 부라리고 있었다. 일광은 피로가 가시지 않은 듯, 다시 눈을 감으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는 거 아니야. 잠깐 눈이 아파서 감고만 있는 거야.” 일광의 머리맡에서 서 있던 아이는 쌍심지를 켜고 그의 등 위에 올라탔다. 조그만 두 손이 일광의 옷자락을 붙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다른 삼촌들은 벌써 다 일어났다고요!” 일광은 마지못해 일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네네 알았습니다, 꼬마 행정병님.” “빨리 씻고 오세요!” 작은 체구에 동그랗고 큰 눈으로 짹짹거리는 모습이 마치 참새와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잔혹했던 그날을 기점으로 이전의 기억이 모두 지워진 것이었다. 랑아대는 고심 끝에 이 아이를 소소(笑笑)라 부르기로 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소무의 이름을 딴 것도 있었지만, 웃을 소를 두 번 넣어 밝게 자라라는 의미도 담은 것이다. 칙칙했던 이리들의 막사에 참새 한 마리가 들어오자,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날이 밝자마자 또다시 내공수련이 시작되었다. 대원들이 하나둘씩 가부좌를 틀며 운기조식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소무 옆으로 다가온 소소가 가부좌를 따라 하며 눈을 감기 시작했다. 내공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다. 그냥 삼촌들이 뭔가를 하고 있으니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일각이 흐른 뒤. 갑자기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막사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곯아떨어진 소소였다. 벌러덩 드러누운 아이는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무가 대원들 중 누군가를 지목했다. “철두!” 서둘러 운기조식을 끝낸 철두는 소무 앞에 서서 기립했다. “예, 대장님.” “소소 일어나면 금강진경의 호흡법을 좀 알려줘.” “예? 설마 소소한테 내공수련을 시키시게요?” “의지는 있는 것 같잖아. 건강을 위해서라도 익혀두는 것이 좋겠지.” “아, 네 알겠습니다.” 처음 마주친 순간, 소무는 소소가 타고난 근골을 가지고 있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자질만 있다면 절정의 수준까지도 올라설 수 있을 정도였다. 기회를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원들을 뒤로한 채 소무는 막사를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한중성의 거리였다. 일각을 걸어 그가 당도한 곳은 의군당(衣軍堂)이라는 현판이 각인된 전각이었다. 관군의 군복과 갑옷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납품하는 제작소였다. 대장간과 무두소에서 재료를 공급받아 최종적인 생산을 진행하는 곳으로, 랑아대의 흑갑도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소무가 열린 문틈으로 힐끗 보니, 백여 명의 일꾼이 늘어앉아 바느질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푸른색 장삼을 입은 중년인이 소무를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아이고, 백부장 나리 오셨습니까?” “예. 제가 주문한 물품은 어찌 되었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준비해 놓았습니다.” 전각의 이 층을 부리나케 올라갔다가 내려온 중년인의 손에는, 어느새 군복 한 벌과 신발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군복의 크기가 어찌나 작은지, 아이들이 아니면 입을 수 없을 듯했다. 게다가 어른의 주먹 크기만 한 투구와 장난감 같은 무기까지. “근데 이 작은 훈련복은 어디에 쓰시려는지…….” “우리 군에 꼬마 행정병이 하나 있습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소무는 품속에서 준비해 놓은 엽전 묶음을 내밀었다. 특수 제작된 이 군복의 전체 가격은 결코 싸지 않아서, 소무의 한 달 급료 절반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중년인은 엽전을 받지 않고 양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돈은 괜찮습니다. 백부장님께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라도 저희를 지켜주신 답례를 하고 싶으니, 거둬 주십시오.” 소무는 몇 번이나 값을 지급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어느새 다시 막사로 돌아온 그는, 소소의 머리맡에 의복을 내려둔 채 가부좌를 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식경. 소무의 눈이 살며시 떠지며 왼쪽 아래를 응시했다. 다람쥐 같이 쪼그려 앉은 소소가 무엇인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소무의 입이 나직이 달싹였다. “소소 훈련병. 원한다면 내일부터 삼촌들이랑 같이 훈련장에 나와도 돼.” 소무의 말의 끝나자마자 소소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이거 제 거예요?” 훈련복을 들고 얼굴을 파묻은 소소는 막사 안을 펄쩍펄쩍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고마워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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