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참새가 날아들다 (2)2022.02.24.
장양은 랑아대만을 위한 소규모의 훈련장을 별도로 지정해주었다. 그가 군단의 특별공격대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훈련장에 늘어선 백여 명의 대원들. 검무(劍舞)를 추고 있는 그들의 끄트머리엔 어른의 허리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소소는 장난감 같은 작은 검을 움켜쥐고서 랑아대의 대원들을 흉내 내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훈련장까지 따라 나온 것이었다. 검을 든 채로 뒷짐을 쥔 소무가 소소의 앞을 지나치며 슬쩍 물었다. “거리에 데려다줄 테니까, 친구들 좀 사귀어서 놀아 보는 게 어때?” 소소는 소무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작은 검을 중구난방으로 휘두르며 소리칠 뿐이었다. “싫어요!” 노는 것을 가장 좋아할 나이였다. 여기서 칙칙한 놈들이랑 같이 있으려고 하는 아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랑아는 매 한순간도 수련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무는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이것은 자신이 평소 대원들에게 했던 얘기였다. “그렇게 휘두르면 다쳐. 잘 보고 따라 해봐.” 소무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며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가, 다시 회수되며 가로로 그어졌다. 단순히 찌르고 베는 아주 간단한 두 번의 동작. 하지만 이 두 가지야말로 모든 공격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동작이다. 나머지는 그저 응용일 뿐. 여기서 변화를 담으면 초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요?” 푸욱-! 쉬익-! 소무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름 쉬운 동작이지만 한 번에 소화해 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소소의 자질은 부족하지 않았다. “제법이구나. 계속해서 반복해봐. 완벽해지면 다음 동작을 알려줄 테니.” 소소는 자두 같은 주먹을 움켜쥐고 가슴 위에 올리며 소리쳤다. “넵!” 쪼그만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모습은 상당히 우스꽝스럽고 귀여웠다. 병사들만 가득한 군영에서 보고 배운 것이 이런 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소를 머금은 채로, 소무는 걸음을 계속하여 대원들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가 멈춘 곳은 청해와 일광의 틈새였다. 소무의 시선이 은밀하게 그들을 한 번씩 훑었다. ‘이제 슬슬 때가 무르익은 것 같군. 이 두 녀석은 한번 시도해 볼 만하겠어.’ 소무는 묵묵히 검을 직선으로 내 뻗은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기를 일다경.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일광과 청해는 어리둥절했다. “지금 뭐 하세요?” “잠들었어?” 허수아비처럼 미동조차 없는 소무의 모습이, 둘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이상했다. 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할 무렵. 돌연 소무의 검 끝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검이 울음을 토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검 끝에서 실낱같은 한 줄기 빛살이 튀어나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뭐, 뭡니까?” “어, 어떻게 했어?” 검기가 발출되는 과정. 그 속도를 한없이 느리게 펼쳐서 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깨달음이 없고서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행위였다. 검 끝에서는 누에가 실을 뽑듯 계속해서 빛살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십 가닥. 그리고 수백 가닥. 계속해서 뽑혀 나오는 유백색의 빛무리는 곧이어 방향을 틀며 검날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것은 곧 검날과 일체화하며 서늘한 아지랑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서, 설마 검기?” “어, 어떻게 한 거야?” 완벽한 검기(劍氣) 그 자체가 발현되었다. 일광과 청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소무는 검기를 소멸시키며 능청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생각만 해봤는데, 이게 되네?” 어느새 일광과 청해는 애원하는 강아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건데? 빨리 얘기해줘 봐!” “저도 좀 알려주세요!” 턱을 괸 소무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떠올리는 듯한 모습을 해 보였다. 하늘을 바라보며 뜸을 들이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 우선은 검에 내력을 계속해서 불어넣었어. 그러고는 검은 곧 나의 신체 일부라는 생각을 해보았지. 쉽게 말하면 이 검날에도 나의 혈도가 이어져 있다는 생각 말이야. 검 끝으로 향한 나의 내력은 검날을 타고 다시 단전으로 이어지더라고. 그때 온 힘을 짜내서 내력을 다 쏟아부어봤지. 그러니까 되더라고.” 깨달음을 가진 검성이 시연과 함께 이해하기 쉽도록 풀이까지 해주었다. 이들은 알 수 없었지만, 기연도 이런 기연이 없었다. 일광과 청해는 검 끝을 내뻗고 소무가 말해준 대로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이들은 조금 전의 소무처럼 허수아비가 되어 한참이나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기를 일다경.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두 자루의 검에서 유백색의 빛무리가 동시에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검날을 감싸야 할 빛살들은 방향을 벗어나 출렁이고 있었다. 당황하는 그들의 귓가에 소무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검에서 발출된 기운을 다시 단전으로 거둬들인다고 생각해 봐.” 그 조언에 따라 다시 집중하길 한참. 갈 곳을 찾지 못하던 빛살들이 드디어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빛무리가 검날을 감싸며 완벽한 검기의 형태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만족한 청해는 미소를 머금으며 검기를 소멸시켰으나, 일광은 달랐다. 그는 새로운 경지를 경험했다는 쾌감에 흥분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하하! 얘들아 이거 봐봐!!” 일광이 고함을 내지르자 근처의 대원들이 다급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일광 형님? 그걸 어떻게?” “거, 검기라니?” “여, 역시 대단하십니다!” 모처럼 일광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보았느냐! 이 형님이 이런 분이시다!” 자아도취에 빠진 일광을 뒤로한 채 소무의 시선이 다시 소소를 향했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저 동작은 내가 알려준 적이 없었는데?’ 소소는 어느새 사선 베기와 세로 베기를 응용하고 있었다. 아직은 정교함은 부족했지만, 급속도로 나아지고 있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소소의 자질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때였다. 랑아대의 훈련장으로 행정병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소무에게 다가간 그는 숨을 몰아쉬며 용무를 전달했다. “백부장님! 장군께서 집무실로 오시랍니다!” 눈앞의 병사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천천히 다녀도 돼. 숨넘어가겠다.” 소무는 행정병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거렸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갑자기 미세하게 떨렸다. “아닙니다!” “근데 왜 이렇게 긴장해있어?” “배, 백부장님은 저의 영웅이십니다!” 소무는 피식하고 웃었다. “군단의 모두가 영웅이야. 너도 포함해서 말이지.” 멀어져가는 소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행정병. 잠시 후 그의 어깨가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 * * 장양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소박했다. 깃발과 지도 몇 개. 그리고 탁상과 집기류를 빼면 곳곳이 텅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실내가 넓었기에 오히려 더 허전해 보인다. 장양은 지금 탁상을 끼고 앉아 붓대를 움직이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소무가 인기척을 내자 그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고개를 올렸다. “허허. 자네에게 딸아이가 하나 생겼다고 들었네.” 장양의 농에 소무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장군님 덕분입니다.” “내 자네를 부른 이유는 어디를 함께 좀 다녀오고자 함이네.” 군영의 수많은 병사 중에 하필 자신이라니. 짐작이 가는 곳이 없었다.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보양현에서 누군가를 좀 만나기로 했네.” 소무의 시선이 탁상 위의 지도로 향했다. 말을 타고 이틀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고 보니 장양은 지금 단정한 장삼을 입은 사복 차림이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은밀히 만나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혹시 호위가 필요하신 겁니까?” “허헛. 정말이지 자네의 눈썰미는 놀랍군. 부장들을 호위무사로 부릴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면 자네의 실력이 제일이지 않은가? 금방 다녀올 테니 별일은 없을 걸세.” “바로 출발하는 건지요?” “자네가 준비되어있다면 말이지.” 소소와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나서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는 임무이고, 전쟁도 잠시 소강상태이니 이곳의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장양을 따라나선 소무는 군영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를 보았다. 이 정도로 은밀히 만나야 하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곧 알게 될 일. 급할 것은 없었다. 묵묵히 마차에 오른 소무는 침묵에 잠겼다. 좁은 마차에 장양과 둘이 있으려니 사뭇 어색했다. 마차가 본격적으로 속도를 낸 지 한 시진이 지났다. 장양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내내 눈을 감고 침묵에 잠겨 있었다. 소무는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계속 바뀌고 있음을 눈치챘다. 만나게 될 자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인물임이 확실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침묵에 잠겨 있던 장양이 눈을 뜨며 말했다. “자네도 말수가 별로 없는 편이군.” “후후. 장군님을 닮았나 봅니다.” “말수가 없는 두 명이 같이 움직이니 적적하구먼. 혹시라도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게. 백부장이 되었으니, 정세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소무도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들쑤실 수도 없었던 노릇. 장양이 선뜻 이렇게 기회를 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상대했던 군단들은 휘나라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입니까?” “섬서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휘나라의 모든 군단은 삼(三)진이나 마찬가지일세.” 최정예가 아닐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삼진이었다는 것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도대체 휘나라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조차 안 갈 정도였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력은 서하(西夏)로 향했네. 그리고 얼마 전 서하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거기에다 양양에서 패배한 이후 정비 중인 군단이 몇 개 있고. 그 외 나머지 병력은 모두 고려(高麗)를 침공 중이네.” 고려와 송나라는 오래전부터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휘나라가 급부상한 이후로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 현재는 해상을 통해 서로 의지하며 전략물자까지 교류하는 상황이었다. “고려라는 나라, 강합니까?” “척준경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무장이 한 명 있다더군. 하지만 그의 상대도 만만치 않은 자일세. 휘군의 양대 명장 중 하나인 사묘아리가 지휘하고 있으니, 맞수를 만난 셈이지.” “양대 명장이라면, 또 한 명은 누구입니까?” “완안후이. 서하를 멸망시킨 장본인일세. 들리는 얘기로 내가 거론한 세 명의 장수는 모두 현경(玄境)의 경지에 접어든 자들이라 하더군.” 소무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용담호혈은 무림이 아니라 바로 이들의 세상이었다. ‘그토록 무림맹에서 나를 찾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십 년간에 걸친 정마전쟁. 그것은 무림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이었다. 수많은 고수들이 비명에 간 이후 힘이 약해진 무림은 이제 눈치나 보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림이 예전의 위세를 되찾기 위해서는 검성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었다. “휘나라의 황제 또한 그에 못지않은 고수라고 하더군. 아쉽게도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네.” 세상은 소무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넓었다. 지금의 전황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나 심각했다. “우리 송나라에는 그에 맞설 만한 고수들이 없는 것입니까?” “송나라에도 사대 명장이 있네. 상장군 유광세, 대장군 악비, 추밀원사 장준, 무안절도사 한세충. 모두 화경을 넘어선 고수들이지.” “현경을 이룬 자도 있습니까?” “그중 한 명이 있긴 하네. 무안절도사 한세충. 그분은 지금 남쪽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있네.” “송나라도 사대 명장이 힘을 합치면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일세. 나라가 이 지경까지 망가진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황제 옆에 간신배가 붙어 있네. 재상 진회, 이 몹쓸 놈이 군벌들을 이간질하고 있지. 유광세 장군과 한세충 장군의 사이는 이미 틀어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네.” “적들을 눈앞에 두고 한심하군요.” “그뿐만이 아닐세. 추밀원사 장준은 이미 진회 곁에 붙어서 악비 장군을 함께 모함하고 있네.” “어째서입니까?” “악비 장군은 소싯적 장준의 휘하에 있던 장수였네. 하지만 악비 장군의 공이 날로 커지고, 어느새 그의 명성이 자신을 뛰어넘자 시기심을 품기 시작했지. 게다가 악비 장군은 심지가 곧아 직언을 서슴지 않기에 진회와 사사건건 시비가 붙곤 했네.” “추밀원사와 재상이 같은 마음으로 손을 맞잡았으니, 악비 장군이 곤경에 처했겠군요.” “바로 그걸세. 진회는 악비 장군을 밀어내고 장준을 이용해 군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네.” 무엇인가 이상했다. 이런 고위급의 정보를 장양 장군이 꿰차고 있는 것이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어찌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만나려는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혹 사대 명장 중 한 명입니까?” 잠시 고민하던 장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나와 악비 사형은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사형제 지간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