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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참새가 날아들다 (3) (25/250)

25화 참새가 날아들다 (3)2022.02.25.

장양과의 대화 이후 소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림이라는 우물 안에 갇혀 지금껏 세상을 보지 못했구나.’ 국력을 나타내는 저울의 무게는 현경(玄境)이라는 추가 결정한다. 확인된 전력은 휘나라에 세 명, 고려에 한 명, 그리고 송나라에 한 명이다. 송과 고려가 연합을 이루더라도 이미 숫자에서 밀리는 상황이었다. 휘국은 천하통일을 자신하고 있지만,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이다. 아직 장기판 위에 올라오지 않은 검성의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반드시 현경의 숫자로만 판가름이 나는 것은 아니다. 적게는 만 단위, 많게는 백만 이상이 뒤엉켜 대규모로 싸우는 국가전이다. 만약 드넓은 대지에서 수많은 기병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면, 혼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얼마나 죽일 수 있겠는가. 현경이라는 기둥을 받쳐줄 디딤돌이 튼튼하지 않다면, 결국 기둥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금나라를 강탈하고 휘국을 세운 영교에 대해서도 정보가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지끈 아파졌다. 그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 무렵. 마차가 속도를 줄이며 정지했다. “도착했습니다, 나으리.” 마차의 문이 열리자 객잔 하나가 보였다. 자신이 운영했던 소호객잔과 비슷한 수준의 작은 규모. 안에서는 두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은 주인장이리라. 다른 하나는 직접 보지 않아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흡사 태양의 힘을 머금은 듯한 정순한 기운. 대장군 악비가 분명했다. 장양은 마부에게 엽전 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어디 가서 요기라도 좀 하고 오시게.” 이곳의 대화를 엿듣지 말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입이 귓가에 걸린 마부는 마차를 고정해놓고 신속히 자리를 이탈했다. “그럼 들어가 보세.” “저도 함께 들어갑니까?” “자네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니 괜찮네. 소개를 해주고 싶기도 하고.” 장양이 허름한 객잔의 문을 열자, 탁상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회색 장삼에 죽립을 눌러쓰고 있었지만, 듬직한 어깨를 가지고 있는 뒷모습. 게다가 옷 사이로 드러난 매끈한 근육은 한눈에 보아도 무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은은히 느껴지는 기도는 소무를 감탄스럽게 만들었다. ‘화경에 도달한 자임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의 수준이었다니…….’ 같은 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높낮이가 있는 법이다. 무림에서도 가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기운이었다. “같이 온 자는 누구인가.” 악비는 돌아보지 않고도 이미 소무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은 소무가 의도적으로 일정 수준의 기(氣)를 내놓고 다녔기 때문이다. 주변에 드러내는 자신의 무위가 높아질수록, 그에 맞춰 기세를 조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믿어도 되는 자입니다, 장군. 우리 군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제 부하입니다.” “그렇군. 사석이니 격식 차릴 것 없네. 어서 앉으시게, 사제.” 장양이 자리하자 소무는 호위를 서듯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나 자리를 지켰다. “양양의 방어전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사제는 참여하지 않았지.” “한중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형의 요청에 합류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사과는 오히려 내가 해야겠지. 내가 사제를 과소평가했네. 신병들을 모아 한중을 지켜낼 수 있을 줄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한중을 지키는 것이 맞는 상황이었네. 사제가 나보다 한 수 위로군.” “제가 어찌 사형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보다 왜 직접 보자고 하셨습니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래서 사제를 꼭 만나보고 싶었네.” “설마 장준과 진회가 벌써 손을 쓰기 시작한 겁니까?” 추밀원사 장준과 재상 진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송나라의 대표적인 간신들로, 악비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들의 이름이다. “예상했던 일이지 않은가. 십 년 전에 벌어졌어야 할 일이 휘국의 침공으로 인해 좀 더 미뤄진 것뿐일세.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니 기회라고 생각하겠지.” “사형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음을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송나라는 진회가 천하일세. 모반에 대한 혐의가 있으니 와서 조사를 받으라고 하더군.” 그 말에 장양이 미간을 좁히며 언성을 높였다. “모반이라니요! 조국을 위해 앞만 보며 공을 세운 장수한테 이게 무슨 어이없는 짓입니까!”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가지 마십시오. 국정을 돌보지 않는 이 무능한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릅니다. 이번의 작은 승리로 적들의 기세가 꺾였다고 안심하고 있을 뿐, 다가올 더 큰 위험에는 관심도 없는 자들입니다.” 악비는 장양의 술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그럼, 안 간다면 어찌 되겠는가?” “혐의를 인정하는 꼴이 되겠지요. 진회는 이것을 빌미로 모반이라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하지만 간다고 해도 성히 나오기는 힘들 터이니, 그냥 사직하시고 남은 일평생이라도 편히 쉬십시오.” 소무는 장양의 감정이 점차 복받쳐 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이 두 명의 충신은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우고도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듣고 있는 자신조차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조국의 이름으로 부끄러운 일을 해본 적이 없네. 그러니 내 당당하게 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사형은 한번 결정하면 번복한 적이 없었지요.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좋겠습니까?” “주변에는 주색과 전공에만 눈이 먼 장군들이 가득하며, 조정은 권력을 탐하는 간신배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나라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네. 이제 내가 믿을 사람은 사제뿐일세. 뒤를 부탁하고자 하네.” “저는 사형처럼 황제와 조정에는 충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충성하는 상대는 오로지 백성뿐입니다.” 술잔을 다시 비운 악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사제의 성격을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실패했지만, 사제는 덕과 지략은 물론 유연함을 함께 갖추었으니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네.” “저 또한 사형과 같은 처지입니다. 금강진경을 포함한 관군의 상승무공을 병졸들에게 뿌렸으니, 어찌 살아남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나는 이번 양양 방어전의 전공을 상장군 유광세에게 넘겼네. 그 대가로 이번 일을 책임지고 덮어주기로 약조를 받아냈지. 요충지인 한중을 방어하기 위해 모두 자신이 지시한 것으로 이미 상소를 올린 상황일세.” “상장군은 뒤늦게 도착하여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때문에 전공을 모두 포기하다니요?” “꼭 사제 때문만은 아닐세. 장준을 견제하기 위해 유광세에게 힘을 더 실어줘야 할 필요가 있었네.” 장양의 입장에서는 장준이나 유광세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장준은 간신배 진회와 한통속이었고, 유광세는 전공에만 눈먼 자로 한세충 장군과도 불화가 심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모쪼록 사형의 무고가 증명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걱정해서 좋아질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사제의 얼굴을 보았으니, 이제 떠나야겠군.” 자리에서 일어선 악비는 소무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리며 말했다. “모쪼록 사제를 잘 부탁함세.” 소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악비는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듯 소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은연중 그의 몸속에 진기를 흘려보내기까지 했다. 소무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악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지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질 찰나, 마침 장양이 정적을 깨트리며 말했다. “사형. 힘든 길이 되겠지만, 여력이 된다면 연통이라도 가끔 보내주시지요.” “음. 알겠네.” 고별을 마친 악비는 묵묵히 객잔 옆에 묶어놓은 자신의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그의 의미심장한 중얼거림은 소무의 귀에 낱낱이 전달되고 있었다. “허허…….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이제는 마음 편히 먼 길을 떠나도 되겠어…….” 장양을 따라 마차 안에 들어선 소무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화경의 눈을 완벽히 속이는 것은 무리였단 말인가? 앞으로는 조심해야겠군. 내기를 완전히 갈무리하든지,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인데…….’ 악비와의 대화는 장양의 심경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의 표정은 한중을 떠나올 때보다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당연히 마차 안은 정적이 감도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반 시진. 문득 소무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장군,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세워도 되겠는지요?” 마차는 막 마을의 상가를 지나고 있던 참이었다. 장양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바로 마부에게 소리쳤다. “잠시 멈추시게!” 마차가 멈추자 소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유를 안 물어보십니까?” “이곳까지 왔는데 딸아이에게 선물 하나 안 사간다면 못난 아비가 아니겠는가. 천천히 다녀오시게.” “고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무는 마차 문을 열고 거리를 훑어보았다. 바로 앞에 노점상(露店商)들이 깔려 있었기에 멀리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근처의 한 장신구 상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가간 소무는 심사숙고 끝에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알록달록 영롱한 빛깔에, 꽃과 나비 문양으로 장식된 노리개. 한눈에 보아도 무척 진귀해 보였다. “이것으로 주시오.” “안목이 있으시군요, 손님. 하지만 이것은 고려에서 들어온 물품이라 가격이 좀 비쌉니다.” “얼마입니까?” “엽전 팔십 냥입니다.” 군단에서 지급되는 급료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싼 가격이었다. 그러나 소무는 망설임이 없었다. 엽전 뭉치를 꺼내어 계산을 마친 그는,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늦었습니다.” 노리개를 조심스럽게 품속에 갈무리하는 소무. 그를 바라보던 장양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를 보니 아비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군. 내가 낳은 새끼가 아닐지라도,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차이가 없는 법이지. 그리고 아이가 걱정 없이 자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은 것 또한 모든 아비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소무는 깊은 생각에 잠겨갔다. ‘걱정이 없는 세상이라…….’ 그가 꿈꿔오던 세상이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전란이 끝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임을. 그리고 또 하나. 무능한 황제와 간신배들의 문제도 어느새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만약 장양 장군과 같은 사람이 황제가 된다면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질까?’ 잠시 고민해보던 소무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이틀이 지나고, 마차는 어느새 한중의 군영에 도착했다.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 며칠이었지만, 많은 소득이 있었다. 장양과 악비를 통해 파악한 정보들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소무는 곧바로 랑아대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대원들은 훈련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그의 시선은 바로 소소를 찾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일광이 직접 아이를 지도해주고 있었다. 묵묵히 소소의 모습을 바라보던 소무는 또 한 번 놀라고야 말았다. 불과 며칠이 지난 사이 어느새 천무검법의 초식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얍! 이얍!” 장난감 같은 검을 움켜쥐고 초식을 펼치고 있는 소소의 동작은 매우 훌륭했다. 아직 검에 무게감은 없었지만, 그것은 내공이 해결해 줄 터. 그때 가장 먼저 소무를 발견한 일광이 소소에게 말했다. “소소야, 네 아버지 왔다.” 일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소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그리고 사슴 같은 눈망울에 물기가 차오른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검을 놓아버린 소소는 다짜고짜 소무를 향해 돌진했다. “흐엉……. 어디 갔다 왔어!” 자두 같은 소소의 주먹이 소무의 아랫배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어이쿠. 아버지 소소한테 맞아 죽는구나.” 소무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은 소소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 버리고 가지 마!”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소무가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을 무렵, 일광이 다가와서 어깨를 펴며 말했다.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하는 거, 내가 달래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외였다. 일광에게도 이런 자상한 면이 있었다니. “고마워, 일광.” 소소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소무는 품속에서 노리개를 꺼내어 내밀었다. “자, 소소 주려고 이거 사러 갔다 왔어.” 노리개를 바라보는 소소는 언제 울었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연신 끔벅였다. “제 거예요?” “응, 그럼.” 소소의 말투는 어느새 또 존댓말로 바뀌어있었다.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였다. 노리개를 낚아챈 소소는 다시 소무의 허리를 안으며 해맑게 웃었다. “헤헤. 고마워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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