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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악연과 인연 (1) (26/250)

26화 악연과 인연 (1)2022.02.26.

소무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모처럼 내력을 무리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후. 드디어 끝이로군.’ 그가 눈을 뜨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소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 모습이 다람쥐와도 비슷해 보였다. 무공 수련을 일찍 시작할수록 몸속에 탁기가 없어 그 효과가 배가되는 법이다. 소소는 불과 여섯 살의 나이에 임독양맥을 제외한 전신의 혈도가 타통되었으며, 검성에게 직접 무공을 지도받고 있었다. 거기다가 타고난 근골에 천부적인 자질까지. 무림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급성장이 펼쳐지는 건 당연했다. ‘스스로 지킬 힘을 만들어내거라. 다시는 세상의 풍파에 휘둘리지 말거라.’ 참혹하게 죽어간 아이. 유화의 죽음을 마주한 소무는 교훈을 얻었다. 자신이 언제나 곁에서 지켜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보호가 필요 없도록 강하게 키우면 되는 것이다. 대원들을 모두 훈련장에 보냈기에, 막사에는 소소와 둘이 있는 상황이었다. 소무는 내력을 보충하기 위해 운기조식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소소가 그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소소는 습관처럼 소무의 어깨 위에 뛰어 올라탔다. “아버지, 나 지금 새가 된 것 같아요!” 혈도를 통해 기(氣)를 운행하는 사람을 건드는 것은 금기시되는 사안이다. 소무는 서둘러 운기조식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소소야, 운기조식하는 사람은 만지면 안 된다고 했지? 주화입마(走火入魔)가 올 수 있어.” “주와임마가 누구예요?” “음, 사람이 아니고……. 몸속의 기가 뒤틀려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걸 말하는 거야.” “그럼 어떡해요?” “죽는 거지.” 소소는 울상을 지었다. “흐앙……. 그럼 아버지 죽는 거야?” “아버지는 괜찮아. 강하니깐. 하지만 삼촌들한테는 절대 하면 안 돼.” 소무의 어깨 위에서 도약한 소소는 허공에서 한 바퀴를 회전하며 그의 앞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가슴 위에 움켜쥔 주먹을 올리고 목청껏 소리쳤다. “넵!” 자신의 앉은키밖에 안 되는 것이 어른 흉내를 내고 있었다. 웃기는 모습이었지만, 매일 봐왔기 때문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소무는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삼촌들이 오는구나. 소소가 새처럼 된 가벼워진 것은 당분간 비밀이야. 알았지?” 갑자기 팔짱을 낀 소소는 고개를 들며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음! 아버지 하는 거 봐서.” “이 녀석. 그건 누구한테 배웠어?” “일광 삼촌한테.” “휴.” 그래도 욕은 안 배운 것이 다행이었다. 일광도 소소가 있을 때는 나름대로 자제하고 있었다. 그때 막사 안으로 랑아대의 대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모두가 땀에 흠뻑 젖은 것이 경공 수련을 한 모양이었다. 선두에 일광이 보였다. 그들을 마주한 소소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구로 내달렸다. 그 순간, 상체를 낮춘 일광이 다짜고짜 소소를 향해 아래로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받아라, 소소!” 소소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비틀며 일광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일광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반대 방향에서 또다시 일광의 주먹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때 상체를 낮춘 소소가 일광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주먹을 마구 날리기 시작했다. “얍얍!” 퍼퍼퍽-! “으아악!” 일광은 복부를 붙잡고 죽는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는 실소를 머금었다. 일광이 자신 몰래 소소에게 격투술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삼촌들, 빨리 씻고 오세요!” 일광의 뒤를 따라 막사로 진입하던 대원들이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냐.” “그래, 소소 행정병.” “일광 형님을 때려줘서 고마워.” 옷을 챙겨 나간 대원들은 한 식경이 지난 이후에나 다시 들어왔다. 이들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하나둘씩 본인들의 자리를 찾아 가부좌를 틀기 시작했다. 또다시 지루한 내공 수련에 접어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막사 안으로 행정병 한 명이 헐레벌떡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낯이 익은 병사였다. 소무가 자신의 영웅이라고 했던 행정병. 역시나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백부장님! 장군님의 전갈입니다!” “무슨 일이지?” “지금부터 랑아대에 닷새간 특별 휴가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행정병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막사 안에 환호성이 울려 펴졌다. “뭐? 휴가라고!?” “하하! 정말이야?” “드디어 나가는구나!” 대원들이 펄쩍 뛰며 좋아했다. 소무는 이미 장양에게 따로 언질을 받았기에 놀라지 않았다. “어디 가서 사고 치지 말고, 다들 잘 다녀와.” 이미 대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장님, 먼저 나갑니다!” “모두 닷새 후에 봬요!” “소소야, 그동안 잘 있어!” 하나둘씩 짐을 챙겨 나가는 대원들. 그때 소무가 철두를 불렀다. “철두. 할머니 약값이 부족하지?” 어느새 그의 손에는 엽전 뭉치가 들려있었다. “이걸 제가 어떻게 받아요?” “난 여유가 있어. 여기가 내 집이고, 가족도 여기 있으니. 필요한 네가 우선 쓰고, 나중에 갚든지 말든지.” 눈시울이 붉어진 철두는 소무가 내민 엽전을 조심스럽게 건네어 받았다. “고맙습니다, 대장님…….” “빈손으로 가지 말고 뭐라도 좀 사 가.” 일식경이 지난 이후 어느새 막사에는 휑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소소를 포함한 네 명만이 막사를 지키고 있었다. 갈 곳이 없는 자들이었다. “일광하고 청해는 어디 안 가?” “고향도 이미 휘나라에 털렸고, 가족도 없는 내가 갈 데가 어디 있어?” “화산에서 파문당한 저도 갈 곳이 없어요. 대장 형은 어쩌실 생각이에요?” 소무는 딸을 안아 들고는 어깨 위에 올렸다. “글쎄. 소소랑 세상 구경이나 하지 뭐.” 멀어져가는 소무 부녀를 바라보던 일광과 청해. 그들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소무의 어깨 위에 앉은 소소가 손짓하며 소리쳤다. “일광 삼촌! 청해 삼촌! 같이 가요!” 내심 심심했던 그들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흠흠! 그래도 될까?” “소소가 원한다면야…….” 소무도 그다지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일광과 청해의 입장에서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소소가 같이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거야.” “저도요…….” * * * 한중의 이곳저곳을 유람하는 내내, 소소는 연신 신나 있었다. 삼촌들과 함께 있으니 더 좋은 모양이었다. 중심가로 접어들자 볼거리가 많았다. 거리에는 상인들이 나와 먹거리를 팔고 있었으며, 곳곳에서는 재주꾼들의 묘기 등 볼거리가 가득했다. 적군으로부터 굳건히 지켜진 이곳은 섬서의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활기가 넘쳤다. “청해 삼촌! 나 저거!” 청해의 시선이 소무의 어깨 위로 향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소소는 조그만 손가락을 내뻗고 있었다. 가느다란 막대에 산사나무를 끼워 물엿을 바른 뒤 굳혀 만든 탕후루였다. 청해는 곧바로 탕후루 하나를 사 들고 와 소소에게 건넸다. “소소 배 안 불러? 곧 밥 먹어야 하는데.” 이미 이것저것 간식을 잔뜩 먹은 상태였다. 그러나 체중에 비교하면 소소의 먹성은 굉장했다. “응! 맛있어요. 히히.” 일행의 발걸음은 반 각이 지나 다시 멈추었다. 거리의 한쪽 구석에서 극단(劇壇)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 북적거리고 있었다. 청해가 소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삼국지를 연기하나 본데요? 잠시 보다 갈까요?” “음. 그러지.”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무대 위에 오른 인물은 셋이었다. 한 명은 언월도를 들고 장군으로 분장했으며, 또 한 명은 배가 불뚝 나온 황제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울상으로 분장해놓은 환관의 모습이었다. 환관이 관객들을 보며 소리쳤다. “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뇌물도 없이 왔느냐! 어서 이 황호에게 예를 차리거라!” 그러자 장군으로 분장한 자가 황제를 향해 소리쳤다. “유선 폐하! 대장군 강유이옵니다! 이 간신배가 나라를 좀먹고 있으니 당장 저자의 목을 치시옵소서! 적들의 침공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내부를 먼저 다스리셔야 하옵니다!” 환관이 장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폐~하! 제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고 점을 쳐본 결과, 위나라는 침공해오지 않는다고 나왔습니다. 저 무능한 대장군이 크게 착각하고 있사오니, 대장군을 제가 신임하는 자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나이까.” 황제로 분장한 자는 턱을 괴고 고민하는 듯했다. “흐음~. 그래도 강유는 공명의 후계자가 아니더냐? 저 깐깐한 자의 잔소리는 더 이상으로 듣고 싶지는 않지만, 대장군을 함부로 바꿀 수는 없느니라.” “폐~하! 국정은 저에게 맡기시옵고, 여독이나 푸시옵소서! 신이 오늘 밤 절정의 쾌락을 느끼실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사옵니다!” “허허! 역시 짐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는 경뿐이로다.” 그때 장군이 언월도를 휘두르며 황제와 간신을 동시에 베어버리는 시늉으로 연극은 마무리되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소소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나 소무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 연극 속에 가려진 의미. 저들은 지금의 조정을 풍자한 것이었다. 대장군 악비가 파직을 당하고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얼마 전 이곳에 당도했다. 이 충격적인 소문은 군부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순식간에 전해졌고, 민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들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저들이 풍자하는 촉한 말기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욱 어이없다는 걸 말이다. “그만 식사나 하러 가지.” 일행이 향한 곳은 한중에서 가장 큰 화양객잔이었다. 음식이 나름 괜찮았기에 식사는 항상 이곳에서 했다. 그러나 오늘은 분위기가 뭔가 달랐다. 어제 왔을 때는 손님이 이렇게 많지 않았다. 게다가 대다수가 가지각색의 무림인들이었다. 보통 객잔에 무림인들이 많이 몰리는 날은 십중팔구 화젯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출입구 부근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무려 여덟 가지의 음식을 주문했다. 일광의 먹성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음식이 하나둘씩 도착하자 일행들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소소도 일광을 흉내 내는 건지, 작은 체구에도 무지막지하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때 청해의 눈이 열려있는 객잔의 문틈으로 향했다. “저기 철두 형 아니에요?”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업고 거리를 구경시켜주고 있는 사내는 분명 철두였다. “철두 맞네.” “녀석. 이제야 철들었군.” 소소가 객잔 밖을 내다보며 크게 소리쳤다. “철두 삼촌!” 소소의 모습을 확인한 철두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소소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바로 뒤의 식탁에서 무림인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일광은 계속 귀를 쫑긋거렸고, 청해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표정이 굳었다. “아니, 어떻게 화산파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가 있어?” “매화십팔검수도 모두 죽었다며?” “화산파가 어디 동네 삼류 문파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되냐고! 도대체 어떤 미친놈들이야?” “나야 모르지. 겨우 빠져나온 도사가 하나 있는데, 반쯤 미쳐버렸나 봐. 한 가지 확실한 건, 휘나라가 연관되어 있다는 거야.” “어째서?” “휘국에서 무림맹의 요청도 거부하고 화산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대.” “무림맹이 그걸 보고만 있다는 말이야?” “예전이랑은 달라. 무림맹은 이제 동네북이지 뭐. 정마전쟁으로 어지간한 고수는 다 죽었고, 검성께서도 은퇴를 하셨으니…….” “그럼 결국 화산에 있던 도사들은 한 명 빼고 다 죽은 거?” “모르지. 몇몇은 화산 어딘가에서 숨어있을지도. 근데 휘국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알 수가 있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섬서는 칠 할이 휘국에게 점령당해있는 상황이며, 화산파는 그들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 설마 그들이 무림의 영역을 대놓고 침해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소무도 적지 않게 놀랐다. 아무리 정마전쟁에서 화산제일검이 죽고 그 위세가 감소하였다고는 하나, 거대 문파가 하루아침에 증발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문이었다. 소소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청해의 이마에 작은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청해 삼촌, 어디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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