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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악연과 인연 (2) (27/250)

27화 악연과 인연 (2)2022.02.27.

청해는 충격에 휩싸인 듯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소무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사부님이 걱정되는 것이군.” “저에겐 아버지와도 같은 분입니다.” 화산파에서 질타와 멸시를 당할 때 유일하게 자신의 편에 있던 사람이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눈치 빠른 소소는 입을 꾹 닫고 상황을 주시했다. 일광은 객잔 밖을 내다보며 연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반 각이 지난 후, 청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산에 좀 다녀와도 괜찮을지요?”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그곳에 어떤 상황이 벌어져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예측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소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 아우의 마음은 이미 화산에 있는데, 내가 어찌 말릴 수 있겠나.” 청해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였다. 그러나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광이 먼저 나서며 말했다. “뭐, 남은 휴가 기간에 할 일도 없으니, 아우가 부탁하면 같이 가줄 수도 있고.” 화산까지는 경공으로 두 시진이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다. 아직 휴가는 이틀이 더 남아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 둘만 그곳으로 보낼 소무가 아니었다. “랑아대의 부대장 두 명이 휴가 나와 객사했다면 장군께서 기절하시겠군.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가야 하잖아?” “형님들…….” 청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바로 하산하는 거야. 사부님도 네가 화산에서 객사하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니.” “예. 고맙습니다.” 그때 일광이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소소는 어디다 맡겨?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데리고 갈 수는 없잖아.” 모두의 시선이 소소에게 향했다. 그 분위기를 눈치챈 소소의 얼굴은 순식간에 울상으로 변했다. 벌써 눈가에는 물기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확정되면 바로 울음을 터트릴 태세였다. 소무의 생각은 길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지 자신과 함께 있는 것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런 경험도 필요하겠지. 위험하면 바로 나올 거니까 문제없어.” 소소의 얼굴이 금세 밝아지며 소무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광을 노려봤다. “일광 삼촌 나빠요!” “허. 거참. 내가 여기서 제일 좋은 사람이야!” 목표는 정했으니 더는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다. 객잔을 나온 일행은 대장간에서 가격이 가장 저렴한 세 자루의 검을 구매했다. 휴가 기간에 보급받은 무기를 들고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기 발출이 가능한 이상, 무기의 품질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검집까지 있을 정도로 나름대로 쓸 만한 정도는 되었다. 한편 출발을 앞두고 소소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경공을 수련하고는 있지만, 아직 수준이 미약하고 다리가 짧아 누군가의 등에 올라타야만 했다. 두 시진이나 가야 한다니 기왕이면 더 편하게 가고 싶은 게 당연했다. 크기가 클수록 승차감이 좋은 법. 황소의 등을 가진 일광의 옆에 소소가 알짱거리기 시작했다. 일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체를 구부리며 말했다. “자, 나쁜 삼촌 뒤에 올라타.” 소소는 일광의 등 뒤로 올라가면서도 삐친 듯한 표정을 유지했다. “삼촌이 타라고 해서 타는 거예요!” 이들을 지켜보던 소무는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 큰일이군. 소소가 점점 일광을 닮아가다니.’ * * * 화산(華山)의 서쪽에 있는 연화봉 정상. 그곳으로부터 백여 장이 떨어진 산기슭이었다. 한 사내가 소나무 아래 앉아 거침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크으…….” 입술을 비집고 고통에 찬 신음이 삐져나왔다. 왼팔과 등 뒤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급소는 모두 빗나갔지만, 곳곳에 자리한 검상이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있었다. 공포.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그의 눈빛은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는 듯했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매화의 꽃망울로 뒤덮여 향기가 가득했던 화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득한 피비린내만이 가득했으며, 사지가 절단된 도사들의 시신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살수(殺手). 화산을 습격한 자들의 유일한 단서였다. 백 명일까? 아니면 이백 명? 그 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디서 이러한 살수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것일까. 분명 무림의 살문(殺門)과는 무공과 수법이 달랐다. 아니, 더욱더 잔인하고 교활했다.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그들의 기습에 무상 장로가 눈을 뜨고 당했다. 화산에서 가장 강한 자가 일격에 당한 것이다. 항거할 수 없는 무력.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사내는 혈도를 눌러 상처를 지혈하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두 시진 전부터는 곳곳에서 들려오던 비명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제…… 나 하나만 남았단 말인가?’ 절규하던 문주의 마지막 명령. 그것은 화산을 빠져나가 맥을 유지하라는 유언이었다. 장로들을 포함한 매화검수들과 일대제자들이 살수들을 막는 사이. 문주는 이대제자들에게 화산파의 비급을 하나씩 안겨주고 도주를 지시했다. 하나하나가 천금의 가치를 가진 상승무공들이었다. 기적적으로 이십여 명의 제자들이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화산을 빠져나가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휘국의 정예병사들이 이미 화산의 모든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이대제자들은 하나둘씩 사냥을 당해야만 했다. 그의 시선이 십여 장 밖에 있는 매화나무 아래에 고정되었다. 싸늘하게 식어있는 백희 사매의 시신이 보였다. 도주하는 동안 여러 번 봐왔던 장면이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앞섶이 벌어져 있는 것은 비급이 강탈당했기 때문이리라. 사내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품속에 있는 무공비급을 꺼내어 보았다. 그동안 무엇인지도 살펴볼 새가 없었다. 아마도 이대제자인 자신은 평생 익힐 기회가 없었을 상승무공이리라. 백팔식광풍쾌검(百八式狂風快劍). 비급의 이름이었다. “……X팔.” 도사의 입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나직이 삐져나왔다. 화산파에서 자랑하는 극강의 쾌검술은 맞지만, 하필이면 여자들만 익힐 수 있도록 고안된 검법이라니. 이딴 것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비급을 내어준다고 한들 자신을 살려 보내줄 리도 없었다. 다시 비급을 품속에 갈무리한 도사는 매화 문양이 새겨진 검을 움켜쥐었다. 살수들은 자신의 체취를 추적해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또다시 이동해야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미간을 좁힌 도사는 재빨리 우측으로 굴렀다. 그 순간, 그가 기대었던 나무가 쩍 갈라지며 서늘한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벌써 한 놈이 왔단 말인가?’ 도사는 뒤돌아볼 새도 없이 재빨리 내달렸다. 이곳에서 싸우며 지체했다간 또 다른 살수들이 몰려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면에는 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의 사이를 비집고 내달렸다. 나뭇가지들이 사정없이 도복을 찢어내고 전신을 긁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잠시 후 십여 장 아래로 얕은 절벽이 보였다. 떨어져도 부상은 없을 것이리라. 도사는 망설임 없이 절벽을 향해 짧게 도약했다. 그리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살수가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을 감싼 흑의 사이로 서늘한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멈추지 않고 내달리며, 도사가 사라진 절벽을 향해 지면을 박찼다. 잠시 후 살수가 하강을 시작할 무렵. 돌연 절벽 아래에서부터 무엇인가가 마주 솟구쳐 올랐다. 그것을 바라보는 살수의 눈동자는 급격히 흔들렸다. 설마 도사가 뛰어내리지 않고 절벽을 붙든 채 숨어있을 줄 어찌 예상했겠는가. 게다가 도사의 검날에는 미세한 유백색의 광채가 출렁거렸다. 이대제자 따위가 검기를 발출하다니. 도사의 검날은 무방비 상태인 살수의 복부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사정없이 그어버렸다. 촤아악-! 뿜어지는 혈무(血霧)에 화산파의 도복이 피로 물들었지만, 그것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재빨리 언덕 위에 올라선 도사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폈다. ‘휴. 결국, 그날의 치욕이 나를 살린 셈이로군.’ 도사의 정체는 화산파의 이대제자인 현정이었다. 화양객잔에서 일광에게 당한 개망신은 그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날 이후 모든 생활을 전폐한 채 오로지 수련에만 매진해왔다. 그 결과 일대제자들도 상대가 몇 없을 정도로 그의 무공은 급상승했다. ‘곧 놈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올 것이다.’ 뛰어난 살수는 예민한 후각으로 오십 장 밖에서 느껴지는 혈향을 맡을 수 있다. 절정고수는 그보다 더 먼 거리까지 감지가 가능하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호흡을 고른 현정은 우측으로 방향을 틀며 계속해서 내달렸다. 반각동안 내달렸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아니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조금 전부터 뒤쪽에서 자신을 쫓고 있는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전면에서도 또 다른 살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작 이곳에서 죽으려고 그동안 개고생한 게 아니다!’ 억울했다. 이대로 죽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를 악다문 현정은 지면을 박차고 이 장 높이로 도약했다. 발밑으로 살수의 모습이 보인다. 낙영검법 육 초식 비화난격(悲花難擊). 현정의 검 끝이 매화를 그리며 지면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살수의 검에서도 섬뜩한 빛살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카앙-! 한 차례의 격돌. 동수를 이루었지만, 도주할 수 있는 방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지면에 내려선 현정은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었다. 좌우에서 두 명의 살수가 다시 공격을 개시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인영이 뒤섞이자 금속성이 사방으로 난무하며 요동쳤다. 카카카캉-!!! 두 명을 상대로는 무리였다. 시간이 갈수록 손발이 조금씩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들이 싸우는 소리는 또 다른 살수를 부르고 있었다. 이십 장 밖에서 일직선으로 내달려오는 복면인이 보였다. 세 명이라면 몸을 빼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현정의 두 눈은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낭패다.’ 도주할 수 있는 방위 따위는 없었다. 새로 합류하는 복면인이 삼 장 거리에서 도약을 시도했다. 한눈에 보아도 지금 상대하는 자들보다 강해 보였다. 최후를 각오한 현정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가닥의 빛줄기가 쇄도해오며, 날아드는 복면인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다가갔다. 난데없이 등장한 사내는 다짜고짜 복면인의 허리에 옆차기를 쑤셔 박았다. 콰앙-! 복면인은 날아들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후방으로 튕겨나갔다. 이것은 분명 화산파의 소엽퇴법(掃葉腿法)이었다. 난데없는 기습에 살수들은 현정에게서 떨어지며 상황을 살폈다. 현정은 자신을 구해준 인물을 눈으로 찾았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현정 사형!”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을 구해준 인물은 청해였다. 그동안 자신이 화산파에서 멸시하고 무시했던 그 청해가 분명했다. “청해야…….” 현정은 만감이 교차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또 한 명의 낯익은 사내가 이곳으로 날아들었다. 곰 같은 체구를 가지고 있는 흉악한 인상의 대머리.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무식한 놈이었다. 이들의 검날에는 마르지 않은 혈흔이 보였다. 아마도 이곳까지 오며 몇몇 살수들과 이미 마주쳤으리라. 그러나 이들의 얼굴에서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강해졌다고 자신했지만, 이들은 더욱 괴물이 되어있었다. 이 세 명은 곧 품(品)자를 이루며 서로 등을 맞대었다. 일광이 등 뒤를 향해 소리쳤다. “도사 양반! 제법 잘 버티던데? 처맞고 나더니 정신 좀 차렸나 봐?” 현정의 눈썹이 꿈틀댔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존심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맙소…….”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십여 장이 떨어진 매화나무 아래. 어느새 소무의 어깨 위에 옮겨탄 소소가 작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가리는 척만 하는 것이었다. 소소는 손가락 틈새로 몰래 삼촌들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소무는 미동조차 없는 모습이었다. 대원들을 도와주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소름 돋는 기운이 미세하게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그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코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살수라면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어깨에서 소소를 조심스럽게 내려 왼쪽 팔로 안아 들었다. “두 눈 가리고 꽉 잡아, 소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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