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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악연과 인연 (3) (28/250)

28화 악연과 인연 (3)2022.02.28.

검명(劍鳴). 검이 우는 소리를 말한다. 경지에 이른 자만이 나타낼 수 있는 지고한 현상이다. 이것은 검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소리가 극명하게 나뉜다. 칠현금(七絃琴)의 선율처럼 구슬픔 속에 청명함을 내재한 울음. 이것은 소무의 검명이었다. 나뭇가지의 그늘 사이로 드러난 검날이 태양 빛을 머금으며 밝게 빛났다. 검날은 무희의 몸짓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빛살을 뿜어냈다. 까앙-! 웅장한 종소리와 함께 늘어지는 그림자. 일합을 겨루고 물러나는 살수의 몸짓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소무의 두 눈이 빛났다. 주변에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누가 감히 검성의 시선을 현혹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더욱 놀란 인물은 암습을 가했던 살수 그 자신이었다. 화산파의 누구도 막아내지 못했던 일격이었다. 그것이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완벽하게 막혔다. 소무의 주변으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소소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어디서 이런 살수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특급살수. 무림을 통틀어도 몇 없을 정도로 굉장한 실력이었다. 게다가 그조차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수법이 교활했다. 소무는 묵묵히 오른손에 쥔 검을 앞으로 내밀며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일렁이는 모든 미세한 기척이 감각으로 낱낱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의 귀가 쫑긋했다. 믿을 수 없게도 느껴진 기척은 자신의 그림자였다. 소무는 반사적으로 도약하며 아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지면을 향해 뿜어지는 붉은 강기가 무엇인가에 부딪히며 거센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앙-! “크윽.” 미세한 신음. 그리고 재빨리 지척의 나무 밑으로 스며드는 그림자. 살수의 몸놀림에 소무는 감탄했다. 지면에 내려선 소무의 시선이 상대를 찾았지만,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그의 주변으로 희뿌연 연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연막이로군.’ 반경 오 장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운무가 펼쳐졌다. 어둠 속에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 초인적인 시야도 운무에는 소용이 없었다. 이 운무가 어떠한 것으로 만들어졌는지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더는 시야가 무의미했다. 소무의 두 눈이 지그시 감겼다. 모든 것을 감각에 의지한 채 그는 살수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백여 장 위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떼들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리고 새들의 지저귐이 화산을 울릴 무렵. 운무를 뚫고 날카로운 검 끝이 소무의 목젖을 향해 날아들었다. 쐐에엑-! 검 끝에 서려 있는 푸른빛의 일렁임. 정련되지 않은 불안정한 검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주하는 소무의 검강에는 한참이나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까앙-! 격돌의 순간 느껴지는 살수의 비틀거림. 소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를 향해 반격을 개시했다. 직선으로 쏘아져 나간 그의 검 끝은 상대의 옆구리를 정확히 관통했다. 푸욱-! 손아귀에 전달되는 감각이 없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옷자락만을 뚫은 것이다. 그때 상대의 신형이 증발하듯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형환위(以形換位)?’ 이형환위란 몸을 순간적으로 날려 위치를 마음대로 바꾸는 경신법이다. 살수는 어느새 소무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복면 속에 감춰진 살수의 얼굴에 회심의 표정이 걸렸다. 그러나 이형환위는 그만이 쓸 수 있는 수법이 아니었다. 번쩍-! 눈부신 섬광과 함께 소무의 신형은 어느새 삼 장이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검성의 경신법으로 알려진 섬전비영보(閃電飛影步)였다. 계속되는 살수의 얄팍한 수작에 소무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더는 시간을 끄는 것도 위험했다. 눈앞의 특급살수와 비슷한 고수가 더 나타난다면, 일행들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지.” 그는 소소를 자신의 발밑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아있어.” 허리춤의 검집에 검을 꽂아 넣은 소무는 양발을 벌린 채 자세를 낮추었다. 검집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완벽한 발검(拔劍)의 기수식이었다. 일격에 승부를 보려는 것이었다.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던 살수도 긴장하며 절초를 준비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며 주변을 얼어붙게 했다. 그 순간 근처의 어디선가 한 줄기 비명이 뿜어져 나왔다. 청해와 일광이 있는 위치였다. “끄아아악!” 그때였다. 소무의 측면 삼 장 거리. 한 줄기 희뿌연 연기가 전광석화처럼 그를 지나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소무가 움켜쥔 검집에서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탈혼검법 제일초식, 탈혼일섬(奪魂一閃). 빛보다 빠른 한 줄기 섬광이 눈부시게 번뜩였다. 그리고 한 호흡이 더 지난 후 무엇인가 베어지는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촤아아악-! 소리가 검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에 뒤늦게 들려온 것이었다. 검성의 독문절기인 탈혼검법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소무를 지나친 희뿌연 연기는 혈무(血霧)로 변했다. 곧이어 혈무가 걷히자, 무릎을 꿇고 있는 복면인이 드러났다. 그가 움켜쥔 검은 부러져 있었으며, 갈라진 허리로는 핏물이 꾸역꾸역 쏟아져 내렸다. 소무는 소소를 안아 들며 그에게 다가갔다. “살문의 살수는 아니로군. 어디서 온 자인가.” 당연히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영교인가?” 소무는 살수의 어깨가 흠칫하는 것을 보았다. “맞는 모양이로군.” 더 이상의 추궁은 무의미했다. 그가 부러진 검으로 자신의 목을 그었기 때문이다. 털썩-! 소무는 쓰러진 살수의 품에서 무엇인가가 삐죽 튀어나온 것을 보았다. 무공비급이었다. 이미 자신만의 독문절기를 완성한 그였기에 무공에 욕심은 없었지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급의 표지에는 네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무상검진(舞狀劍陳).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동시에 펼치는 화산파의 상승 진법이었다. 소무도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마침 대원들에게 쓸 만한 진법이 필요했는데, 잘되었군.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겼어.’ 무상검진의 비급을 품속에 갈무리한 그는 청해와 일광의 위치를 찾았다. 불과 십여 장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도 지금 막 마무리가 끝난 상황이었다. 현정은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었지만, 청해와 일광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들에게 다가가자 소소가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일광 삼촌, 뭐해요?” 소소는 시체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기억에서 지워진 잔혹한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가만있어봐.” 일광은 쭈그리고 앉은 채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복면인들의 품속을 뒤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현정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태연하게 화산파의 무공비급을 강탈하고 있다니. 곧이어 일광은 서책 하나를 발굴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가 꺼낸 비급에는 세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파산권(破山拳). 화산파의 주류는 대부분 검술이지만, 유일하게 강호에서 인정받는 상승 권법이 하나 있다. 삼대 장문인이 창안해 낸 이 파산권은, 일격에 산을 무너트린다는 이름대로 패도적인 위력으로 유명했다. 일광은 태연하게 파산권의 비급을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무림의 정세에 어두운 그로서는 이것이 화산파의 무공인지, 복면인들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청해는 무덤덤했지만, 현정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고 비급을 돌려달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일광에게 뺏을 자신도 없었으며, 화산이 멸문지화를 당한 마당에 무의미한 짓이었으니까 말이다. “왜 쳐다봐?” 당돌한 일광의 물음에 현정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달싹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때 청해가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현정 사형, 어떻게 된 거예요?” “보다시피. 매화검수고 뭐고 이놈들의 기습으로 다 죽었어. 나도 이틀 동안 개처럼 화산을 헤집고 다니면서 겨우 도망 다녔어.” “혹시 저희 사부님도…….” “유감이지만 장로님들은 우리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시겠다고……. 아무튼 빨리 움직여야 해. 이런 녀석들이 수백 명은 더 있어.”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비록 청해가 슬픔에 잠겨있었지만, 소무도 더는 양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자신이 상대했던 특급살수가 또 나타날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여러 명이라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청해. 나와 한 약조는 잊지 않았지?” 상황의 여의치 않다면 철수하기로 했던 약조였다. 사부의 시신을 묻어주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지만, 지금으로선 방도가 없었다. “예……. 제가 앞장설게요.” “아니. 이번에는 내가 앞장서지. 소소나 챙겨줘.” 소소는 양팔을 벌리며 청해에게 안아달라고 재촉했다. “자, 삼촌하고 함께 가자.” 준비가 끝나자 소무가 선두로 나서며 나직이 말했다. “출발하지.” 소무는 자신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일행을 안전한 경로로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방향은 파악해두었기에,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행이 경공을 펼친 지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그의 귓가로 뒤쪽에서 소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해 삼촌, 울어?” “아니……. 조금…….” “왜요?”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 누구예요?” “아버지…….” 청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소소가 갑자기 훌쩍거렸다. 삼촌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흐앙……. 청해 삼촌 아버지 죽은 거예요?” “보고 싶어……. 너무…….” 이들의 대화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말없이 흐느끼는 청해의 숨소리만이 연신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소소는 연신 훌쩍거리고 있었다. 앞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소무도 마음이 무거웠다. 청해에게 있어서 사부는 자신이 짐작했던 것 이상의 존재였다. 시신조차도 수습하지 못하고 버려두고 가는 상황이다. 청해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행은 화산을 벗어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일다경을 내달리고서야 이들은 목표로 한 거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원사(太原寺). 이 버려진 사찰은 스님들이 불경을 공부하던 곳으로 나름대로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그때 일광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한중에 도착하기 전에 굶어 뒈지겠구나. 이곳에서 요기나 때우고 가지?”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었다. 소무는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찰의 구석에 앉아 넋을 놓고 있는 청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소소가 쪼그려 앉아 위로하고 있었다. “멧돼지라도 있나 찾아보고 올 테니까, 불이라도 좀 지피고 있어.” 말을 마친 소무는 태원사를 벗어나 일행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무의 움직임이 벼락처럼 빨라졌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지금 화산의 연화봉을 향해 일직선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검성이 절정으로 내뿜는 움직임. 그것은 곧 한줄기 섬전(閃電)이었다. 소무의 경신술에 바람이 비명을 토해내며 거센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현 장로가 청해의 사부라고 했지?’ 과거 정마전쟁에서 함께 했던 자로 이미 일면식이 있는 인물이었다. 무공은 강하지 않았지만, 인자하고 곧은 성품을 가지고 있던 자로 기억했다. 반각이 지난 후. 정적이 감도는 연화봉의 화산파에 돌풍이 들이닥쳤다. 오래전 이곳에 방문해본 적이 있었기에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지나는 자리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도사들의 시신이 보였다. 초인적인 그의 시야는 재빨리 목표로 한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주변에서 숨 막히는 살기들이 하나둘씩 조여 오는 것이 느껴졌다. 싸울 필요는 없었다. 소무는 살수들을 무시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장로들의 복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태화각이란 현판이 각인된 전각의 앞마당. 그곳에서 떼죽음을 당한 듯 장로들의 시신은 한쪽에 몰려있었다. 소무의 신형이 그들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재빠르게 하나를 낚아챘다. 그 순간, 십여 명의 살수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소무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유령처럼 쭉쭉 늘어나는 그의 신형은 포위망을 단숨에 돌파했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은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살수들은 어리둥절하며 자신들이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한 식경이 지난 후. 멧돼지 한 마리를 움켜쥔 소무가 태원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어깨 위에 걸쳐진 한 명의 노인. 그 모습을 발견한 청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벅차오르는 청해를 바라보며, 소무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멧돼지 잡으러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했어. 도망치다가 이곳 근처까지 와서 죽은 도사들이 꽤 되나 본데? 혹시 아는 사람이야?” 청해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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