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악연과 인연 (4)2022.03.01.
청해의 사부를 묻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사부의 무덤 앞에서 오열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모두의 시선은 모닥불에 익어가는 멧돼지를 향해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무르익자, 일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무 꼬치에 꿰어진 멧돼지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해가 저무는 시간인데도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으니 당연했다. 그때 소소가 정적을 깨며 물었다. “청해 삼촌, 괜찮아요?” 청해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으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응. 위로해줘서 고마워 소소.” 소소는 청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일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광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왜?” “배고파요~.” “그래, 백정 일은 항상 내 몫이지.” 일광은 멧돼지의 앞다리를 움켜쥐고는 사정없이 찢기 시작했다. 무식한 그 모습이 마치 산적과도 같아 보였다. 뜨거울 만도 했지만, 내공을 수련한 그에게 이 정도 열기는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일광이 움켜쥔 족발의 단면에서 육즙이 광채를 드러냈다. 침이 넘어갈 정도로 기가 막히게 익었다. 일광은 미리 준비해둔 나무줄기로 발목을 둘둘 말아 소소에게 건네었다. “자! 어디 배 터지도록 한번 먹어봐!” “헤헤. 잘 먹을게요, 일광 삼촌~.” 보조개를 만들며 활짝 웃는 소소의 모습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일광은 다리를 하나씩 찢어서 일행들에게 건네었다. 현정은 뻘쭘한지 눈치만 살피는 모습이었다. “이름이 현정이라고 했나? 어디 하나 먹어봐, 동생!” 얼떨결에 족발 하나를 건네받은 현정은 실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자신은 일광의 동생이 되어있었다. 서로 나이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자신보다는 조금 많아 보이긴 했다. “고, 고맙소.” “형님한테 고맙소는 뭐야?” “고, 고맙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의 자존심은 이미 한중의 화양객잔에서 증발한 상태였다. 족발을 건네받은 현정은 그것을 허겁지겁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의 먹성은 보기와는 다르게 대단했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야 이상함을 느낀 현정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입안에는 아직도 고기가 한가득 물려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럴 만도 했다. 이틀간 화산의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살수들로부터 도망만 다녔으니, 배가 안 고프면 이상한 일이었다. “사형, 이제 어디로 가실 거예요?” 청해의 물음에 현정은 고기를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모르겠어. 사문이 멸문을 당했으니, 속가제자들도 곧 해산하겠지. 무림맹에 있는 사형들하고는 엮이고 싶지 않아.” 무림맹에 파견 나가 있는 화산파의 도사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이 과거 청해를 멸시했듯, 무림맹의 일대제자들 또한 현정을 하찮게 대하기 일쑤였다. 현정의 모습이 조금 안쓰러워 보였는지, 소무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갈 곳이 없으면 우리와 함께해도 괜찮아. 병졸 따위이지만, 이 짓도 나름대로 먹고살 만하거든.” 현정은 잠시 고민했으나, 생각은 길지 않았다. 비록 악연으로 시작되었지만, 때로는 그것이 인연이 되기도 하는 법. 어차피 갈 곳도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들이 아닌가. “그래도 될까요?” 일광이 현정의 등 뒤를 탁 치며 소리쳤다. “당연하지! 앞으로 이 형님만 믿고 따라와. 어디서 나대다가 또 처맞고 다니지 말고.” “예…….” 비록 장양 장군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현정의 실력이라면 두 발까지 들고 환영받을 것이 분명했다. 다사다난했던 이들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 * * 닷새간 주어진 휴가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소무의 예상대로 현정의 합류는 장양 장군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검기를 발출할 수 있는 무인은 군단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력이다. 그러나 장양이 아직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랑아대의 대원들이 하나둘씩 검기 발출을 습득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랑아대의 막사. 새로 합류한 현정은 어색한지 구석에 찌그러져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어쩌다가 청해가 말을 한 번 걸어주면 엄청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소소가 현정에게 다가가 그와 마주 보며 쪼그려 앉았다. “현정 삼촌!” “응?” “이거 먹어봐요.” 소소의 작은 손에는 만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디서 구해온 것이란 말인가. 손때가 묻어 차갑게 식은 만두였다. 아마도 군영을 돌아다니다가 누군가에게 얻은 것 같았다. 소소의 비상 간식이었다. “고, 고마워…….” 얼떨결에 만두를 한 입 베어 문 현정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눈앞에선 소소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왠지 모르게 서러웠다. 아이에게 동정을 받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보았단 말인가. “현정 삼촌, 울어요?” “아, 아니 맛있어서…….” 묵묵히 만두를 먹던 현정도 소소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진 것이 없었다. 화산에서 개처럼 도망쳐 나온 빈털터리였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등 뒤에 있는 자신의 개인 물품함. 현정은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었다. “이거 소소에게 줄게.” 한 권의 서적이었다. 백팔식광풍쾌검(百八式狂風快劍). 오직 여자들만 익힐 수 있도록 만들어진 화산파의 극 쾌검술. 총 백팔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광풍이 몰아치는 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위력으로만 따진다면 화산의 모든 검법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굉장한 보물이었다. 이 비급을 위해서라면 지금도 목숨을 내걸 무림인들이 줄을 설 것이다. 만두 하나의 값치고는 굉장히 비싼 답례였다. 하지만 현정에게는 망설임도, 후회도 없었다. ‘이제 나에게는 의미 없는 물건이다.’ 서책을 건네받은 소소는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헤헤. 고마워요, 현정 삼촌!” 소소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냥 무엇인가를 받으니 좋은 것이다. 서책을 열어보자 검을 움켜쥔 사람이 갖가지 동작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까지. 영락없는 무공비급이었지만, 소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윽고 아버지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가부좌를 틀고 있는 그의 다리 위에 걸터앉아 서책을 건네며 물었다. “아버지! 이거 뭐예요?” “음……. 한번 보자꾸나.” 소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책장을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훌륭한 검법이다. 소소가 익히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군. 하지만 검술의 위력이 오로지 쾌(快)에만 집중된 나머지, 깨달음을 얻은 자와의 싸움에서는 위력이 반감이 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변화를 좀 담는다면, 능히 대적할 무공을 찾기가 어려울 터.’ 일식경의 시간 동안 비급을 모두 살펴본 이후 나직이 말했다. “현정 삼촌이 줬으니 한번 익혀볼까?” “좋아요!” 소소는 연신 신나 있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받았고, 그것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무척 설렌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훈련장으로 나가자 일광 삼촌이 보였다. 오늘은 야외 수련이 없는 날인데도 그는 홀로 훈련장을 지키고 있었다. 일광은 무기를 내려놓은 채 연신 허공에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복면인에게서 강탈한 파산권을 수련하는 것이리라. “일광 삼촌, 뭐해요?” “소소 왔어? 이건 내 비장의 무공이야. 무섭지?” 일광이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마치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검술이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자신에게 딱 맞는 무공을 발견한 일광은 수련의 욕구가 불타올랐다. 어느 정도 화후에 오르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도 산을 무너트릴 만한 위력이 담겨있는 듯했다. 무공에 대한 욕심은 소소도 일광에 못지않았다. “우와~. 손에서 소리가 나요! 나중에 나도 알려줘요!” “오냐!” 일광을 뒤로한 소무 부녀는 연무장의 가장 구석으로 이동했다. “잠시 앉아서 지켜봐.” 쪼그려 앉은 소소는 턱을 괴고 소무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는 검을 어깨 위로 잡아당긴 채 명상에 잠겨있었다. 백팔식광풍쾌검의 동작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변화를 담아 자신만의 동작을 그리고 있었다. ‘여성의 신체조건에만 맞춰서 만들어진 검법이다. 남성이 펼친다면 제 위력을 내지도 못할 뿐더러, 흉내조차 힘들겠지.’ 그러나 소무가 누구인가. 검성(劍聖)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소무의 칼끝이 서서히 움직임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주 느릿하게 소소가 자세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아래에서 차고 오르는 검날은, 다시 곡선을 그리다가 또다시 직선으로 바뀌어갔다. 왼발을 내디딘 그의 신형이 좌측으로 기울며 다시 전 방위를 서서히 난자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하는 소무. 그의 검 끝이 바닥을 가르며, 다시 창공을 양단했다. 소무의 동작은 끝도 없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백팔초식의 연계기. 소무의 움직임은 검무(劍舞) 그 자체였다. 마치 천상의 무녀가 내려와 검을 들고 춤을 추는 것과도 같아 보였다. 그때였다. 소무의 검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초식의 구결을 몸으로 시연해 본 이후. 본격적으로 다시 펼쳐보려는 것이었다. 백팔식광풍쾌검의 무서움은 초식이 뒤로 갈수록 점점 빨라진다는 것이다. 갑자기 빨라진 소무의 검법은 곧이어 거센 파공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한 호흡이 더 지난 후에는 그의 모습을 육안으로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리고 그 속도가 절정에 이르자 주변으로 광풍이 휘몰아치며, 사방에 먼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초식을 모두 끝마친 소무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에게는 맞지 않는 검법이지만, 위력만은 일품이로군.’ 그에게는 검성의 독문절기인 탈혼검법이 있었다.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펼칠 수 있는 고난도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백팔식광풍쾌검은 초식이 난해하지 않으며, 자신이 돕는다면 능히 소소가 익히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때 소소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재촉했다. 어느새 손에는 날이 없는 소검(小劍)이 움켜쥐어져 있었다. 손잡이 끝에는 소무가 선물해준 노리개가 보인다. “나도 해보고 싶어요!” 소소에게 무공은 놀이와도 같았다. 화려하고 신기한 광경을 보니, 해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자 따라 해봐, 소소야.” 왼발을 뒤로 내 소무의 검이 전면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와 마주 보고 소소가 동작을 따라 했다. “얍!” 백팔식광풍쾌검의 연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