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명장과 졸장 (1)2022.03.02.
반복되는 일상 속에 한 달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직은 휘나라도 움직임이 없었기에, 군단의 모두는 훈련에 매진하며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고 있었다. 랑아대의 대원들은 방패술을 포함하여 진법 등의 집단전투 훈련에 전념하였다. 소무 또한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은 역시나 소소의 훈련지도였다. 무림 제일 고수가 온종일 딸아이를 일대일로 지도해주고 있었다. 대원들도 못 누려본 특권이었다. 게다가 빠른 속도로 내공을 쌓을 수 있도록 운기조식까지 직접 도와주는 상황이었다. 몸속에 탁기가 전혀 없었기에 대원들보다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게다가 타고난 재능과 자질까지. 하루하루 강해지는 소소의 검은 점차 묵직해졌다. 본격적으로 무기에 내력을 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이 없는 검이었지만, 일격에 나무를 꺾을 만큼 강하고 억센 힘이 내포되어 있었다. “얍! 얍!” 소무는 왼손을 뒷짐 쥔 채 계속해서 검을 쳐내며 소리쳤다. “바위처럼 무겁게! 물처럼 부드럽게!” 캉-! 캉-! 카캉-!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고, 그 소음은 계속해서 빨라졌다. “좀 더 빠르게!” 카카캉-! 카카캉-! 무려 일 합에 다섯 차례나 내지르는 소소의 움직임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에 파도의 웅장함을 담아봐!” 그때 소소의 움직임이 갑자기 정지했다. “파도가 뭐예요?” 소무는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닫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소소가 바다를 보았을 리가 만무했다. “바다라는 곳이 있어. 끝이 보이지 않도록 넓고 푸른 강물이지. 거기서 높게 일렁이는 물결을 파도라고 하는 거야.” “보고 싶어요. 바다…….” “나중에 바다에 꼭 데리고 갈게.” “꼭?” “응.” 위기를 넘긴 소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한중은 중원 내륙의 중심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깊숙한 곳이다. 강이라면 코앞에 있지만, 바다를 보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소소를 업고 그곳까지 내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다음번 휴가 때는 죽겠구나…….’ 그때였다. “방심은 죽음이다!” 한눈팔고 있는 사이 소소가 기습해왔다. 자신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런대로 위협적이고 쓸 만한 공격이었다. “비겁하구나.” 소무는 가볍게 검을 쳐내고는 반격을 개시했다. 살의(殺意)가 없는 공격이었기에,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상태였다. 곡선을 그리며 목을 향해 나아가는 검날. 소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를 낮춰 공격을 흘려보내며, 앞으로 파고들었다. 날다람쥐 같은 재빠른 움직임에 소무는 감탄했다. 그러나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갑자기 소소의 왼손이 불끈 움켜쥐어졌다. 허리춤에서 모습을 드러낸 작은 주먹은 소무의 복부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일타격산(一打擊山)!” 쩌엉-! 소무는 충격에 반보를 물러섰다.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맞아보았던 것이었다. “윽. 어디서 배웠어?” 묵직한 충격에 단전이 아직도 찌릿찌릿했다. 방심했다가는 어지간한 일류고수도 치명상을 입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허리에 양손을 올린 소소는 고개를 들며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광 삼촌한테 배웠어. 파산권 일 초식!” 예상대로였다. 이미 검법을 익히고 있지만, 근접 무공 하나 정도는 익혀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소소의 무공은 하나하나가 모두 위력적인 살상용이었다. 자칫 함부로 사용했다간 무고한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 일. “대단하네, 소소. 무공은 언제만 사용해야 한다고 했지?”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때! 나쁜 악당들로부터요.”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하지만 무공을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자. 조금 쉬었다가 저녁에 내공 수련할까?” “넵!” 소소는 대답과 동시에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 “놀러 가요~.” 병사들만 가득한 군영에서 어디를 놀러 간다는 말인가. 소소는 한 달 전부터 틈만 나면 어딘가로 싸돌아다니고 있다. 군단의 모두가 소소를 알고 있기에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사고를 칠까 걱정되는 판국이었다. 이미 소소의 수준은 군단 전체를 통틀어 상대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랑아대의 몇 명과 양연정 부장을 제외한다면, 소소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휴, 호기심이 많을 시기이니.’ 고민 끝에 조용히 미행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군영 깊은 곳으로 이동하는 소소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이미 갈 곳을 정해놓은 듯했다. 반 각이 지난 후 소소가 향한 곳은 놀랍게도 취사장(炊事場)이었다. 취사병들과 인사를 하는 모습이 결코 한두 번 방문해본 모양새가 아니었다. ‘배가 고팠단 말인가? 많이 먹을 시기는 맞다만…….’ 양손에 주먹밥 두 개를 들고 취사장에서 나온 소소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듯했다. 이윽고 오른손에 쥔 주먹밥을 먹으며, 군영의 더욱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병참 창고를 지나치고, 장교들의 막사도 지나쳤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몇몇 보였지만, 소소를 제지하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서로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어서 도착한 장소는 소무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설마?’ 어이가 없었다. 장양 장군의 집무실이었다. 말려야 하는지 당황스러웠다. 건물의 외형이 다른 곳보다는 화려했으니 호기심이 일 만도 했다. 우선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기척을 감춘 소무는 조심스럽게 집무실의 천장으로 뛰어올랐다. 소소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허허! 소소 왔구나.” “헤헤. 할아버지 뭐해요?” “음. 나는 지금 보급 물품의 목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거 먹을래요? 주먹밥이에요.” “허허. 그럼 이 할아버지도 소소한테 뭔가를 줘야겠구나.” “고맙습니다~.” 집무실을 나온 소소의 손에는 어느새 월병(月餠)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밀가루와 벌꿀, 달걀을 섞어서 만든 빵 속에 견과류를 넣은 것으로, 간부급 정도나 먹을 수 있는 간식이었다. 놀랍게도 이곳에 물물교환하러 온 것이었다. 소소는 신이 나는지 펄쩍펄쩍 뛰며 월병을 먹으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소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때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소무의 눈빛이 빛났다. 이곳으로 다급히 뛰어오는 행정병 한 명이 보였다. “장군, 양양성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들어오게.” 그 뒤 한동안 집무실은 조용했다. 아마도 서신의 내용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장양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말투가 터져 나왔다. “낙양을 공격하겠다니!?” 낙양은 군사적 요충지로 적들의 방비가 매우 잘 갖춰진 곳이었다. 그렇기에 악비 장군은 장안과 개봉을 먼저 공격하여 포위망을 구축하고, 한세충 장군이 합류한 이후 마지막에 낙양을 치자고 줄곧 주장해왔다. “군사 회의를 소집할까요?” “지금 즉시 지휘관들을 모두 모아주게.” 군사회의실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랑아대의 대장인 자신도 참석 대상자였다. 소무는 기척을 숨긴 채 한 식경을 대기한 후 군사회의실로 이동했다. 장양 장군은 먼저 대기하고 있었고, 다른 장수들도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일각이 지난 후 모든 지휘관이 한자리에 모였다. “열흘 이내에 남소평야(南召平野)로 병력을 보내라는 유광세 상장군의 전갈이 도착했네. 낙양을 공격하겠다고 하더군.” 부관 양연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북벌은 한세충 장군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악비 대장군은 분명 그렇게 주장했지. 하지만 황실에서는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네. 공격을 시작하라는 교지가 내려왔다고 하더군. 그리고 유광세 장군은 황실에 직언할 용기가 없는 자일세.” 위진철 부장의 얼굴에는 불만스럽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탁상공론만 펼치는 조정 대신들이 적들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중을 지키는 우리 군단이 병력을 비운다면, 장안성에 대기하고 있는 적군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우리 쪽에서도 여러 군단이 집결한다고 하네. 우리 군단의 병력을 모두 보낼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 “이곳의 방어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최소한의 병력으로 편성해야겠군요.”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시게.”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최소한의 병력으로 편성하되 어느 정도의 전력은 파견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반 각이 흐른 후 양연정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랑아대를 보내는 것은 어떻겠는지요?” 첨병대의 백문휘 부장이 다급히 반문했다. “고작 백 명만 보낸다면 상장군의 후환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장양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소무를 바라보았다. “랑아대는 백 명이지만 우리 군단이 자랑하는 일당백의 전사들이네. 전투에 돌입하게 되면 그러한 마음은 모두 사라지겠지.” 소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임무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전쟁은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소소의 안전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아직 장안성에 주둔해있는 적군은 움직임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중은 아직 안전하지만,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법. “딸아이를 부탁드려도 되겠는지요?” 장양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야 당연한 게 아닌가? 이미 소소는 내 손녀와 같은 아이일세. 내 목을 걸고 안전하게 보살펴 줄 것을 약조함세.” 장양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안심이 되었다. 비록 실전 경험은 없지만,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아이였다. “고맙습니다.” 장양은 소무를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유광세를 포함한 몇몇 장군들은 깐깐하고 답답한 면이 있네. 악비 대장군이 파직을 당하였으니, 유세가 더 심해졌겠지. 적당히 무시해버리고 유연함을 가지길 당부함세.” 두 번의 방어전에서 대승을 거둔 장양은 공로로 품계가 두 단계나 올랐다. 그러나 실세 군벌인 유광세나 장준 등에 비교한다면 아직도 계급이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그런 마당에 백부장급을 보내는 것이니, 그들이 랑아대를 얼마나 무시할지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무가 누구인가. 이미 험한 무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인물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 * 한중에서 집결 장소까지는 닷새 이상이 걸린다. 만약 랑아대의 대원들이 경공을 펼친다면 이틀 안에는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다고 기한에 딱 맞춰서 출발하면 장양 장군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었다. 닷새가 지나고 나서 랑아대의 모두가 무장을 한 채 훈련장에 모였다. 칠흑처럼 빛나는 흑갑과 투구.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모두의 어깨에 끈으로 고정된 방패가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장양 장군이 공성전에는 방패가 꼭 필요할 것이라며 구태여 챙겨준 것이다. 몇몇은 군단을 상징하는 깃발까지 움켜쥐고 있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소소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소한 보름에서 한 달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운명의 시간이었다. 소무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마음이 착잡했다. “소소야. 삼촌들이랑 어디 좀 다녀와야 해. 이번엔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어.” 소소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고 있는 듯했다. 펑펑 눈물을 흘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때 소소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꺼냈다. “소소 주려고 선물 사러 가는 거죠?”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닷새간 자리를 비우고 노리개를 사다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일광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대답했다. “뭐야? 눈치챘어? 역시 소소는 못 속이겠다니깐.” “헤헤. 나는 다 알아요~.” 지금까지 일광이 이렇게 고마운 순간이 없었다. 소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딱 걸렸네. 아주 귀한 선물이라서 좀 멀리 가야 해.” 소소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동안 누구랑 놀아야 하나 걱정하는 것이었다. “휴. 이제 할아버지랑 놀아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