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명장과 졸장 (2)2022.03.03.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지에 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곳 남소평야는 섬서와 하남을 잇는 중요한 요충지로도 유명했다. 평야를 가득 메운 야전 막사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군데군데에는 수백여 대의 보급 수레들이 널려 있었다. 송나라의 집결 장소였다. 지휘 막사에서는 한참 소란이 일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탁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앙-! “장군이 암살을 당하다니!? 도대체가 군영의 경계태세들이 얼마나 엉망이라는 거야!” 호통치는 인물은 상장군 유광세였다. 수십 명의 장수들이 주위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얼음장의 한기처럼 싸늘했다. 참모장이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접경지역의 모든 군단에 경계 강화 지령을 전달하고 있으니, 곧 진정될 것입니다.” “정확하게 보고해!” “현재 파악된 자들만 여문호 장군, 진충 장군, 왕휘 장군입니다.” 어디선가 살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 송나라 각지의 군영을 기습하고 있었다. 이들의 수법은 매우 은밀하고 교활했으며, 철저히 지휘관들만 암살한 이후 연기처럼 사라졌다. “장군이 죽었으니 병력도 못 보낸다?” “하나같이 지휘부가 혼란에 빠져, 당장 부대를 편성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유광세의 두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는 화가 가라앉지 않는 듯 연신 심호흡을 들이켠 후 물었다. “그래서 지금 얼마나 집결했는가?” “십만이 조금 안 됩니다.” 애당초 이곳에는 이십만의 병력이 집결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실제 집결한 병력은 고작 절반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다. “추밀원사는 어찌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겐가?” “군단 편성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합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하면 오만의 군세를 이끌고 합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유광세는 머리가 아픈지 눈을 질끈 감고 등을 기대었다. 추밀원사 장준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합류를 늦추고 있었다. 재상 진회를 등에 업고 있는 그는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가 침묵을 깨며 물었다. 일만의 군세를 거느리고 있는 한성 장군이었다. “지금의 전력으로 낙양성을 공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유광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 공격을 개시하라는 황실의 명령이오! 한성 장군이 책임지고 상소를 올려보겠소?” 유광세의 의지는 확고했다. 이 모습을 본 모두는 입을 꾹 닫은 채 침묵에 잠겼다. 장수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악비 대장군이 양양의 방어를 지휘했을 때는 이러한 잡음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지휘 막사로 장교 한 명이 들어오며 기립했다. “장군, 지금 한중의 군단이 당도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보내 왔는가?” “그게…… 백 명입니다.” 유광세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한중이 지리적으로 처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삼천 명은 파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고작 백 명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유광세였다. 방금 들은 소식은 그를 폭발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이것들이 날 가지고 놀아!? 지휘 장수가 누구야? 당장 들어오라고 해!” “그, 그게…… 저들을 이끄는 자는 백부장입니다.” 유광세는 탁상 위에 놓여있던 가죽 두루마리를 집어던졌다. 이곳으로 불러서 화낼 가치도 없었다. 고작 백부장급을 자신이 직접 상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선두에 세워버려!” * * * 집결 장소에 도착한 랑아대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십만이라는 대 군세. 드넓은 평야를 가득 메운 아군의 진영은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들은 다른 장교의 안내를 받아 정해진 위치로 이동하면서도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자리는 선두 쪽인가 본데요?” “역시 우리 부대의 실력을 인정해주나 봐요.” 대원들이 쑥덕거리는 소리에 일광이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미친놈들이냐? 공성전에서 앞줄에 자리한 병사들은 다 죽어! 선두에서 화살받이 하면서 성벽을 기어올라야 하는데, 그렇게 좋아?” 젊은 대원들에 비교해 일광은 주워들은 것이 많았다. 이번 전투는 야전이 아니라 공성전이었다. 공성전에서 선두에 서면 죽을 가능성이 높기에, 일반적으로 그 자리에는 죄수 출신의 병졸들을 세운다. 죄를 면제해주는 대가로 말이다. 또는 가족들에게 지급될 사례금을 약속받고, 죽기를 각오한 병사들이 앞장서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렇기에, 가장 강한 병사들은 선두가 아니라 중간쯤에 배치된다. 설명을 듣고 시무룩해진 대원들을 향해, 일광이 어깨를 펴며 말했다. “뒈지기 싫으면 혼자 나서서 깝죽거리지 말고, 이 형님 뒤에만 잘 따라다녀.” “역시 일광 형님밖에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이들의 대화를 들은 소무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곳까지 와서 뒷골목의 두목 시절 행세를 하다니. 고개를 돌린 소무는 진세를 둘러보았다. ‘경계가 이리 허술하다니……. 진형 배치도 중구난방이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세만 거대했지, 곳곳이 허점투성이였다. 게다가 이곳까지 오는 도중 마주친 아군의 정찰병도 열 명을 넘지 않았다. 병력의 일 할을 수색과 정찰에 할애하는 한중의 군단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지휘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대기하시오.” 랑아대를 안내하던 장교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진영의 선두 어딘가 오십여 평의 공터였다. 대원 몇몇이 등 뒤의 봇짐을 풀기 시작했다. 천막과 말뚝을 이용하여 야전 막사를 조립하기 위해서였다. 한 식경이 지난 후에야 모든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어느새 해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좁고 불편한 임시 막사였지만,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다른 군단의 아군 병사들도 하나둘씩 취침을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언제 행군을 시작할지 모르니 다들 푹 쉬어둬. 혹시 모르니 갑주는 벗지 않는다.” “갑주를 입고 어떻게 자요?” 대원 중 한 명이 투덜대자 소무가 피식하고 웃었다. “어차피 자지 않을 거 알아.” 랑아대가 언제 이 시간에 누워서 잠을 자보았단 말인가. 대원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자리를 맡아 가부좌를 틀기 시작했다. 누구의 얼굴에도 첫 출전 때와 같은 긴장감은 없었다. 평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아군의 군세를 보니 안심까지 되었다. 그러나 소무는 어딘지 모를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대기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겠지.’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드러누웠다. 어차피 자신에게 내공 수련은 무의미했다. ‘잘 지내고 있겠지?’ 딸아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씩씩하고 사교성이 좋은 아이라 모두에게 귀여움을 받는 아이였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장군을 못살게 굴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소소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기를 한 시진 후. 돌연 소무의 얼굴이 굳어졌다. 먼 곳에서부터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기(氣)의 흐름. 그리고 정체 모를 소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허나 이곳에는 무려 십만 인파가 있기에, 정확하게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귀를 쫑긋하며 집중하던 그는, 한 호흡이 더 지난 후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말발굽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역시나 불길했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기습이란 말인가? 게다가 기마부대라니.’ 평야에서 기마부대에 기습을 받는다면, 규모에 따라 아군 진영이 다 쓸려나갈 수도 있다. 우선 대원들의 운기조식부터 마무리시켜야 했다. “모두 그만 일어나 봐!” 서둘러 운기조식을 마무리한 청해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 순간 먼 곳에서 고함이 먼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모두 일어나!” “적군의 기습이다!” 뿌우우우우-! 곳곳에서 뿔피리 소리가 이어졌다. 랑아대는 막사 밖으로 나오며 주변을 살폈다. 진영의 후미 먼 곳에서부터 곳곳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군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적군의 기마병은 아군의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곳곳을 누볐다. 말 위에서 능숙한 솜씨로 화살을 쏘아대며, 장창으로 아군의 병사들을 사정없이 후리고 있었다. 모든 기수는 말안장 뒤에 횃불을 매달고 있었고, 틈만 나면 불을 지르기 일쑤였다. 적들의 규모는 대략 수천 기는 되어 보였다. 그들의 움직임을 잠시 주시하던 소무는, 놈들의 목적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병량이 목표란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던 소무는 다급히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오(伍)를 이루고 근처의 병량 수레를 이곳으로 모아와! 일광, 청해, 현정은 나와 함께 이곳을 방어한다!” 소무의 외침과 동시에 다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진영의 후미에 있던 수레들은 상당수가 불타오르는 상황이었다. 이곳까지 털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후미에서 기습을 시작한 기마대는 어느새 이곳까지 접근해오고 있었다. 소무의 눈앞으로도 두 명의 기수가 보였다. 먼저 다가갈 필요는 없었다. 가까이 올 때까지 대응하지 않고, 소무는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첫 번째 기수가 일 장의 거리까지 근접하자, 소무는 오른손을 쏜살같이 움직여 말의 목덜미를 강타했다. 내공을 실은 일격이었다. 꽈앙-! 지면에 처박히며 먼지를 뿜어내는 군마는 단번에 즉사한 듯했다. 기수 또한 말 아래 깔려 움직임이 없었다. 뒤따라오던 기병이 놀라 움찔하면서도, 침착하게 장창을 내질렀다. 훈련의 강도가 대단함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소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창을 양손으로 마주 잡고 두 발에 내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힘에서 못 이긴 기수는 창을 놓치며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창을 놓치면서 손아귀가 찢겨나갔기에, 기수는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크윽!” 기수가 지면에 떨어지기도 전에, 장창은 이미 소무의 오른손에 옮겨져 있었다. 곧이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장창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쏘아져 나갔다. 쐐에에엑-!!! 바람을 찢으며 나아가는 장창은 다가오는 두 명의 기수를 동시에 꿰뚫었다. 쿠웅-! 쿵-! 장창이 몸통을 관통하는 것과 동시에, 소무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전면에서 또다시 다가오는 세 명의 기병. 소무의 신형이 한 줄기 빛이 되어 마주 쏘아져 나갔다. 그들을 스쳐 지나는 순간, 소무가 쥔 검날에서 맹렬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써컹-! 한 호흡에 기병 셋을 동시에 양단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기수가 이 상황을 발견하고서 호각을 짧게 두 번 불었다. 그러자 기병들이 갑자기 거리를 벌리며 넓게 분산하기 시작했다. 소무는 그들을 뒤쫓아 십여 명을 더 쓰러트렸지만, 이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들 중에 위협이 될 만한 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기병을 일일이 쫓아다녀 봐야 자신 혼자서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 ‘후……. 역시나 무림의 전투와는 다르군.’ 주위를 살펴보자 청해와 일광, 그리고 현정의 모습이 보였다. 이들 또한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기병들은 철저하게 고수들을 파악하고, 우회 및 분산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곳곳에선 대원들이 다섯 명씩 조를 이루어 병량 수레를 옮기고 있었다. 두 명이 수레의 좌우를 붙잡고 경공을 펼치면, 다른 세 명이 품(品) 자 형태로 보호하며 기병들을 쳐내고 있었다. 대부분이 한 번의 왕복을 끝내고 두 번째 수레를 옮기는 상황이었다. 이제부터는 방어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었다. 하나둘씩 속속들이 목표지점으로 도착하는 수레들. “모두 수레를 지켜! 너희들은 가서 방패를 가져와!” 막사 입구에는 백여 개의 방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먼저 도착한 다섯 명의 대원이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일일이 들어 나를 필요는 없었다. “던져!” 수레를 향해 하나둘씩 허공으로 날아드는 방패들. 랑아대의 대원들은 묘기를 하듯 지면을 박차며 그것을 하나씩 낚아챘다. 대다수에게 방패가 준비되자 소무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랑아검진(狼牙劍法)!” 화산파의 무상검진을 조금 변형하여 만든 랑아대의 진법이 펼쳐졌다. 좌우를 보좌하며,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펼치는 다용도의 검진이었다. 한곳으로 모아진 사십 대의 병량 수레. 그리고 그 주위를 방패를 움켜쥔 랑아대가 철벽같이 둘러쌌다. 어느새 마지막 남은 아군의 병량이었다. 당연히 적들의 목표는 한곳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 자리한 기병들은 말 머리를 돌려, 랑아대를 향해 사정없이 돌진했다. 그러나 충돌의 순간, 앞서 달리던 기병들은 화들짝 놀라며 주춤거렸다. 방패 사이로 드러난 검날에서 검기가 발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코앞이라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과 함께 하나둘씩 토막 나며 허공으로 썰려 나가는 기수들. 이들의 모습은 불 속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들과 흡사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