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명장과 졸장 (3) (32/250)

32화 명장과 졸장 (3)2022.03.04.

행군을 시작하기도 전에 집결지에서 기습을 받았다. 적들이 물러난 뒤, 지휘관들이 다급히 모여들었다. 장수들의 신음이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병량이 모두 불타버렸으니 곧 탈주병들이 생길 것입니다.” “다 끝났습니다. 회군하기도 전에 모두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병참이고, 그중에서도 으뜸이 병량이다. 치명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짊어져야만 했다. 상장군 유광세는 두 눈을 감은 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였다. 지휘 막사로 위관급 장교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환희에 휩싸여 있었다. “아, 아직 남아있는 병량 수레가 사십 대가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수레 사십 대면 무려 팔백 가마니의 식량이었다. 장군 중 한 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십 대가 남아있다니? 분명 모든 수레가 불타고 있는 것을 내가 다 보았네.” “아군 진영의 전열 한쪽에 모여 있었습니다! 한중에서 온 병사들이 지켜냈습니다!” 절망에 빠졌던 지휘관들의 얼굴이 갑자기 활짝 펴졌다. 눈을 감고 있던 유광세가 손뼉을 ‘탁’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중이라면 장양 장군 휘하의 병사들이 아닌가? 고작 백 명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장교는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숨을 고른 후 차분히 말했다. “그들에게 쓰러진 기병만 오백 기가 넘습니다.” 이곳에 모인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군벌들이다. 그들의 얼굴에 동시에 감탄이 떠올랐다. “장양 장군이 군단의 최정예 병사들을 골라서 보내주었군.” “섬서의 떠오르는 별이라더니.” “한중을 지켜낸 게 결코 운 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랑아대의 활약은 다른 군벌들이 장양을 다시 평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얼굴이 한층 밝아진 유광세가 누군가를 지목했다. “참모장. 이 정도의 병량이면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사흘입니다. 하지만 배급을 줄인다면 열흘까지는 버틸 수 있습니다.” 열흘이면 집결한 군단들이 굶어 죽지 않고 각지의 본영으로 복귀하는 데는 충분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유광세는 뜻을 굽힐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곳에서 낙양까지 강행군으로 얼마나 걸리겠는가?” “재고하여 주십시오, 장군. 적들은 많은 수의 군마를 보유하고 있기에 야전으로 대응할 확률이 높습니다. 먼저 목책을 대량으로 제작하고 신중하게 이동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군량이 부족…….” 유광세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나는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다.” “야전이 없더라도 닷새는 걸릴 것입니다만……. 남은 군량이 바닥날 때까지 낙양을 함락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금은 회군하셔야 합니다.” “부족한 군량은 경로에 있는 마을에서 조달하면 충분하겠군.” “예?” 참모장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다른 장군들도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좋게 말해서 조달이지, 이것은 곧 수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한성 장군이 나서며 말했다. “회환읍이 있지만, 이미 휘나라에 약탈을 당했던 마을입니다.” “그것은 몇 개월 전의 일이고. 지금은 수확기가 지났으니 쥐어짜면 다시 나올 것이오. 이 부분에 대해서 더는 이의를 받지 않겠소.” 그때 누군가가 다시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섰다. 의창에서 이천의 군세를 거느리고 합류한 현령 왕준이였다. “악비 대장군께서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백성들의 재물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백성이 등을 돌리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돌연 유광세의 신형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왕준 앞에 다시 나타난 유광세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내 앞에서 악비 얘기 꺼내지 말라니까!” 콰직-! “크윽!” 화경에 이른 유광세의 몸놀림은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왕준을 옆에 자리한 장수들이 잡아주었다. 분했지만 사령관의 뜻에 반기를 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씩씩대던 유광세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군벌들을 향해 말했다. “군량미 확보의 책임자는 우고 장군이 맡아주시오. 그리고 한중에서 온 병사들에게도 포상으로 하루 동안의 약탈을 허가해주겠소.” * * * 공훈을 세운 랑아대는 나름대로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모두가 기습의 잔해를 수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휴식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다른 군단의 병사들도 이 처사에 대해 불만을 품는 자가 없었다. 랑아대원들은 틈만 나면 한순간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모두가 임시 막사에 늘어앉아 운기조식을 행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들에게 찾아왔다. 붉은 전투복 위에 은빛이 감도는 갑주. 그리고 멋들어진 술로 장식된 투구까지. 한눈에 보아도 장군급의 지휘관이었다. “자네들 중에서 대장이 누구인가.” 소무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주했다. “장양 장군 휘하의 백부장 소무입니다.” “고생했네. 자네들이 우리를 살렸군. 내 나중에 따로 그분께 감사를 표할 것이네.” 장군이나 되는 자가 고작 이 말을 전하러 올 리가 없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사령관께서 자네들에게 포상으로 하루 동안의 약탈을 허가해주셨네. 그러니 회포도 좀 풀고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놓으시게.”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가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은 고대에서부터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일이다. 그러나 우고 장군의 말을 들은 대원들은 일주천을 하던 중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다. 소무도 내심 당황했지만,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대상은 어디입니까?” “회환읍이네. 서두른다면 반나절에 갈 수 있는 거리지. 우리 병사들이 도착하면 남는 것이 없을 터라, 자네들에게 좀 더 기회를 주고자 미리 알려주는 걸세.” “그럼 저희는 먼저 출발해도 되는 건지요?” “물론이네. 오늘 저녁에 그곳에서 만나세.” 말을 마친 우고는 등을 돌려 막사를 벗어났다. 그 순간 소무는 우고의 나직한 전음을 들을 수 있었다. -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게. 그들도 결국 우리의 백성들이니……. 신나게 약탈을 하라고 하고선, 심하게 하지 말라니. 그의 행동에는 알 수 없는 모순이 있었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일광이 어이없다는 말투로 소리쳤다. “포상으로 약탈 허가라니 이게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어쩔 생각이세요?” 청해의 물음에도 소무는 미동조차 없었다. 답변은 일광이 대신했다. “뭘 물어? 랑아대가 약탈하고 왔다면, 우리 장군님이 뭐라고 할 것 같아?” 고향인 백양현이 휘나라에 약탈을 당했을 때도 마지막까지 남아 상인들을 도왔던 일광이었다. 그는 지금의 상황에 매우 분개하고 있었다. “당연히 가만 놔두지 않겠죠.” 다른 대원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소무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참이나 미동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대원들은 은연중 섬뜩함을 느껴야만 했다.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자신들의 대장이었다. 그가 격정에 차오르고 있는 모습은 지금껏 본 일이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대원들은 입을 꾹 닫고 묵묵히 그를 기다렸다. 반각이 지나서야 소무의 시선이 막사 밖의 하늘을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회한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지금 이들의 행동이 어찌 휘나라와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단순히 휘나라가 없어지면 이 참혹한 일들이 모두 끝나리라 생각했다. 현 시국은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일광이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씩씩댔다. “사령관이란 놈이 생각할수록 개새끼구만. 우리 장군님 같은 분이 사령관을 해야 이런 금수 같은 짓거리를 못 하지.” 그 순간 소무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욕망이 가득한 자가 기득권을 갖게 된다면 이러한 악행은 계속해서 반복될 뿐이다. 일광의 말대로 장양 장군이 권력을 가진다면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겠지. 우선 이것이 첫걸음이다.’ 장양 장군을 도와, 우선 그의 품계를 한계까지 올린다. 물론 그는 심지가 굳은 만큼, 악비 대장군처럼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방법을 찾아 문제를 제거하면 그뿐이었다. 대략이나마 생각을 정리하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회환읍이라고 했나? 어서들 채비해.” 일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뭐야? 진짜 가려고?” “장군이나 되는 자가 굳이 직접 와서 우리에게 이런 정보를 줘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방금 그자는 우리를 먼저 보내 마을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의도였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조금이라도 먼저 가서 들쑤셔 주라는 의미지. 본진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백성이 도망갈 수 있도록. 아마도 저 장군은 약탈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일에 가담해야 한다는 얘기야?” 소무는 묵묵히 자신의 병장기를 챙겨 들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빨리 가서 모두 대피시켜야지.” 일광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하하! 역시 우리 대장이라니까!” 약탈을 막는다면 군량미가 부족하여 아군의 작전에 차질이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행위를 통해 얻는 승리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바로 출발하지. 시간이 없으니 전속력으로 달린다.” 만약 랑아대의 행동이 사령관에게 발각된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전원이 참수를 당할 수도 있을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일을 벌일 소무가 아니었다. 군영 밖을 빠져나온 랑아대는 경공을 펼치며 회환읍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고 장군은 반나절의 거리라고 했지만, 이들에게는 한 시진이면 충분했다. 남소평야에서 낙양까지 이르는 길은 대부분 지세가 평탄한 들판이었다. 반 시진이 지나고부터는 적들의 정찰병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백여 장 앞에 모닥불을 피어놓고 음식을 준비하는 이십여 명이 보였다. 소무가 손짓을 보내자 대원들이 흩어지며 내달렸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정찰병들을 둘러싸듯 포위하며 좁혀갔다. “뭐, 뭐야?” “적들이다!” 몇몇이 랑아대를 발견하고 소리쳤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에서 급소를 노리고 들어가는 백여 개의 검날이 놈들의 전신을 동시에 파고들었다. 푹-! 푸욱-! 이십여 명의 정찰병들이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호흡에 불과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소무의 명령에 대원들이 재빨리 정찰병들의 갑주와 투구를 벗기기 시작했다. 물품을 챙긴 이들은 잠시의 휴식도 없이 또다시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랑아대는 마주치는 정찰대마다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그리고 회환읍에 당도할 때는 인원수에 맞춰 휘군의 복장을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회환읍은 본디 가난한 마을이었다. 그런 와중에 약탈까지 더해져 더욱 피폐해진 삶을 살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허름한 민가들. 그 틈새에 보이는 순박한 주민들은 하나같이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한차례 호되게 당했기에 또다시 약탈이 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려는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마을 어귀에 떡하니 등장한 백여 명의 병사들. 이들은 모두 휘나라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진득한 피가 묻은 채로 말이다. 공포에 질린 몇몇 마을 주민들이 숨어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숨어 보는 것도 모르는 채 큰 목소리로 쑥덕거렸다. “두 시진 후에 약탈을 시작한다고!?” “그래, 본진이 올 때까지는 먼저 나서지 말고 대기하래!” “두 시진이란 말이지! 하하 오늘 실컷 회포를 풀겠구나!” “흐흐. 오늘 우리 휘나라에서 영혼까지 싹 다 거둬주마!” 이들의 대화를 숨어서 엿듣던 주민들은 부리나케 흩어지기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은 두 시진이었다. 그 안에 모두 대피해야만 했다. 소문은 마을 안에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다급히 봇짐을 챙기는 자들이며, 집안에서 아이를 안고 혼비백산하여 뛰쳐나오는 여인 등 곳곳에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휘, 휘나라 병사들이 오고 있다!” “모두 대피해!” 거리에는 겁에 질린 채 분주히 움직이는 주민들로 가득 찼다. 피난 행렬이 시작되었지만, 머지않아 모두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발생한 곳은 선두 부근이었다. 하필이면 가장 거대한 수레가 지면의 틈새에 바퀴가 빠져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수레에는 이것저것이 가득 실려, 한도 중량을 한참이나 넘긴 상태였다. “빨리 밀어봐!” “어떻게 좀 해봐요!” 이곳의 주민들은 점차 다급해졌다. 설상가상 병사 세 명이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피난 물품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이었다. 짐을 포기한다면 어차피 굶어 죽게 될 운명이었다. 모두가 멀찍이 떨어진 채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그때 흉악한 인상에 거대한 체구를 가진 병사가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장군님께서 본진이 행군할 길목을 깨끗하게 해놓으란 말 못 들었어? 거치적거리는 것들 빨리 치워 버려!” 장정 수십이 달라붙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수레였다. 그것을 두 명의 병사가 양쪽에서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쿠웅-! 수레바퀴가 다시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정상궤도에 올라섰다. 그 근처에서는 주민 십여 명이 죽창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병사들을 위협했다. “이, 이놈들아. 이미 다 뺏어 가놓고 뭘 더 가져갈 게 있다고 또 왔느냐.” “수, 수레에 손만 대봐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늘 너희도 죽고, 우리도 모두 죽자.” 그들을 바라보던 흉악한 인상의 병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이럴 수가!? 숫자가 너무 많아! 빨리 도망쳐!” 세 명의 병사들이 부리나케 도망치자 주민들은 용기를 얻었다. “자! 힘내서 빨리 갑시다!” “할 수 있어요!” 끝도 없이 밀려드는 주민들의 행렬은 이백 장을 못 가서 또 멈춰서야만 했다. 전면으로 보이는 두 갈래 길. 전면은 개봉과 창서현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우측은 남소평야를 거쳐 송나라의 영토로 가는 길이였다. 당연히 이들은 우측으로 가려 했으나, 그곳은 이미 이십여 명의 병사들이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이놈들, 감히 송나라로 넘어갈 생각이더냐!” “이쪽으로 한 걸음이라도 들어오는 놈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병사들이 막고 있는 길목은 유광세의 군세가 진군해오고 있는 방향이었다.

1654867012874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