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명장과 졸장 (4)2022.03.05.
주어진 시간은 이제 고작 한 시진. 그러나 마을을 벗어난 피난 행렬은 아직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잠시 후면 본대가 당도하여 본격적으로 약탈을 시작할 것이었다. 마을 어귀의 고지대에 모여 광경을 지켜보던 랑아대는 다급해졌다. 중간마다 보이는 수레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대부분이 말이나 소를 이용하여 끌었던 짐마차들이었다. 하지만 가축은 이미 오래전에 모두 약탈당했고, 그걸 사람이 이끌다 보니 제 속도가 나올 리 없었다. 설상가상 비가 온 지 얼마 안 되어 땅이 질퍽한 것도 한몫했다. 보다 못한 소무가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군복 벗어.” 소무가 갑주를 풀고 휘나라의 군복을 벗어내자, 대원들도 묵묵히 그를 따라 했다. 반나체의 랑아대는 소무를 따라 비어있는 민가들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한 벌씩 찾아서 대충 입고 모여!” 다급히 도주하는 백성들이 물품을 제대로 챙겨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비어있는 민가에는 색이 바래고 해진 옷들이 널려있었다. 이들이 백성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시간은 반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소무는 대원들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반시진 후 집결 장소에 모인다.” “예, 대장님!” “알겠습니다!” 대원들은 네다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소무의 옆에도 일광과 청해가 붙었다. 이십여 장 앞에 낑낑대며 수레를 끄는 십여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다들 좀 더 힘 좀 내봐요!” “시간이 없어!” 그들의 틈새에 소무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끼이이이익-! 마치 날개를 단 듯, 수레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걸음걸이보다 더욱 빨라지는 수레에 백성들이 어리둥절했다. “뭐, 뭐야?” “이, 이거 갑자기 왜 이래?” 이미 수레의 삼면으로 열 명 이상이 달라붙어 있었기에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수레가 미친 듯이 속도를 내자, 이번에는 몸이 불편한 자들이 문제가 되었다. 노인들을 포함하여 임산부나 걸음이 느린 아이들이 점차 뒤처진 것이다. 그때 일광과 청해가 눈빛을 교환했다. “으랏차!” “자, 올라갑니다!” 동시에 수레 위로 하나둘씩 올라오는 노약자들. 걸음이 느린 자들이 짐수레 위에 가득 올라탔으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이러한 장면은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피난 행렬의 속도가 배는 빨라졌다. 알 수 없는 고무적인 현상에 백성들은 힘이 나기 시작했다. “하늘이 도와주나 봅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를 향해 연신 감사의 말을 건넸다. 부처님이든 마을의 수호신이든 누군가가 자신들을 도와줬다는 것은 분명했다. 한 식경이 더 지난 후, 마지막 피난민의 발걸음이 드디어 회환읍을 벗어났다. 어느새 행렬에서 빠져나온 대원들은 본래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집결 장소에 모여들었다. 회환읍의 마을 입구에 모여앉아 휴식을 취하는 랑아대원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대부분이 다소 지친 몰골이었지만 표정은 밝아 보였다. 고작 두 시진 안에 모든 백성을 피난시킨 것에 성공한 것이다. 청해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보상은 아무것도 없지만, 마음은 뿌듯하네요.” 소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이 뿌듯하다니, 제일 큰 보상을 받았군.” 그때였다. 백여 장 앞에서 먼지가 일며 아군의 약탈부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 오천여 명에 가까워 보였다. 랑아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서서 그들을 마주했다. 약탈부대를 이끄는 자는 막사에서 만났던 우고 장군이었다. 말 위에 올라타 있는 그는 곧바로 소무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어찌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가?” “한발 늦은 것 같습니다. 휘군이 또 한 번 들이닥쳤는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주한 것 같습니다.” 우고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화를 낼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겠네.” 우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의 머리를 돌렸다.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인해보지 않으십니까?” “자네들이 이미 확인했지 않은가. 여기서 봐도 확실히 마을이 텅 비어있군.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굳이 확인할 필요까진 없겠지.” 우고의 심정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반기지만 내색을 못 하는 것이었다. 우고는 늘어서 있는 휘하의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마을이 이미 텅 비어있으니 임무는 실패다! 우리는 다시 본진으로 합류한다!” * * * 한중성의 군영. 장양 장군의 집무실에는 모처럼 생기가 넘쳤다. 드넓은 공간이 텅텅 비어 허전함이 감돌던 이곳에 두 명의 식객(食客)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소소였다. 낮에는 훈련복을 입고 군영 어딘가를 싸돌아다니다가, 해가 질 때면 항상 이곳에 찾아와서 자고 갔다. 장양 장군이 내주는 간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최근 눈앞에 마주 앉은 자와 노는 재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소소와 마주 앉은 인물은 부관 양연정이었다. 얼마 전 살수를 조심하라는 경고가 군영에 당도하였기에, 그가 직접 장양의 호위를 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양에게 있어서 그는 조자룡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긴 양연정이 온종일 호위를 선다는 것은 무척이나 곤욕이었다. 그는 심심했던 차에 눈앞에서 알짱대는 소소에게 장기를 가르쳐봤다. 그 뒤로 장기의 재미에 푹 빠진 소소는 계속 자신을 쫓아다니며 도전하기 일쑤였다. 묵묵히 집무를 보는 장양을 뒤로한 채, 이 둘은 지금도 구석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장군이다.” 양연정이 마(馬)와 상(象)으로 소소의 왕(王)을 포위했다. 소소는 조그만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흐앙……. 어떡하지…….” 울상을 지은 소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또 이겼군. 어서 내놓거라.”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쉰 소소는 떨리는 손을 품속에 넣었다. 잠시 후 손때가 잔뜩 묻은 월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남은 비상 간식이었다. 양연정에게 넘기려고 손을 내밀며,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그때였다. “우리 소소가 적에게 포위를 당했군. 비록 궁성까지 뚫렸지만, 용맹한 장수 하나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왕을 지킬 수도 있는 법이지.” 장양이 은근슬쩍 훈수를 둔 것이었다. 월병을 재빨리 품속으로 갈무리한 소소는 눈에 불을 켜고 다시 장기판을 살폈다. 잠시 후 소소의 손이 차(車)를 집어 들었다. “헤헤. 멍군!” 탁-! 차(車)가 상(象)을 잡아먹자, 마(馬)가 그 자리를 다시 빼앗았다. 그러나 그 움직임 덕분에 전황이 바뀌면서, 장군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법이구나.”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소소의 역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애초에 양연정은 차(車) 하나를 양보하고 시작했기에, 공세를 다시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열 수가 지나자, 어느새 소소의 포(包)와 상(象)이 양연정의 왕(王)을 완벽하게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장군이에요!” “허……. 이번 판은 내가 졌구나.” 드디어 양연정이 패배를 시인했다. 그러자 소소는 집무실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좋아했다. 그러더니 장양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할아버지, 제가 드디어 이겼어요!” “허허.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잠시 후 한숨을 내쉬는 양연정의 코앞에 작은 손이 내밀어졌다. “내놔요!” “휴…….” 품속에 손을 넣어가던 양연정. 그 순간 갑자기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품속으로 향하던 손이 쏜살같이 움직이며 옆에 세워놓은 장창으로 향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장양이 무어라 입을 열 찰나, 양연정은 이미 집무실의 문짝을 향해 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콰직-! 그가 문짝에 틀어박힌 창을 뽑아 들자 창끝으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장군,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외마디와 함께 양연정의 오른발이 문짝을 강타했다. 콰앙-! 문짝이 떨어져 나가자, 그 뒤로 흑의를 입은 자들의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살수(殺手).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작정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양연정은 집무실의 문 앞으로 두 발자국을 나섰다. 실내에서는 장창을 사용하기가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아무도 못 지나간다.” 직선으로 내뻗고 있는 창끝에 서늘한 창기(槍氣)가 감돌았다.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일까. 살수들은 바로 접근하지 않고, 방위를 잡으며 기회를 노렸다. 동시에 달려들 심산이리라. 어느새 검을 뽑아 든 장양이 소소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뒤에 숨어 있거라.” 소소는 화산에서 살수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이들의 모습이 기억에 좋게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악당들이에요!” 장양은 소소에게 연신 손짓하며 물러서라고 했다. 어이없게도 소소가 허리춤에서 장난감 같은 검을 꺼내서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밖에서는 본격적으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양연정과 살수들의 격돌이 시작된 것이다. 집무실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지만, 소소의 얼굴에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악당들이 지붕에 왔어요!” 장양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소소의 말대로, 분명 무엇인가가 천장에 있었다. 근데 자신도 느끼지 못한 기척을 소소가 어찌 느꼈단 말인가. 하지만 의문을 이어갈 틈이 없었다. 콰직-! 쾅-! 지붕이 무너지며 세 명의 살수가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미간을 좁힌 장양은 묵묵히 자신의 검을 휘두르며 맞서나갔다. 정신없이 공격을 펼치면서, 연신 소소에게 소리쳤다. “어서 도망치거라!” 집무실 안에 갇혀있는 상황에서 도망칠 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도 무엇이든 시도라도 하길 원했다. 자신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수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참담한 심정이었다. 수세에 몰리자 장양의 손발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하나둘씩 드러나는 허점들. 기어코 측면에 자리한 살수의 검이 장양의 허리를 향해 파고들었다. 피해낼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장양이 이를 악다문 그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 그와 함께 뒷걸음질 치는 살수의 모습이 보였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살수의 서늘한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일곱을 넘어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존재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때는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소무의 가르침을 크게 외친 소소가 살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복면에 가려 겉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어린아이가 상대라 해도, 살수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소소의 돌진을 저지하는 검에는 살의(殺意)가 가득 머금어져 있었다. 서로의 검이 처음으로 맞부딪치며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까앙-! 살수는 묵직한 힘에 검을 놓칠 뻔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믿을 수가 없었다. 허리춤밖에 안 오는 여자아이였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자신이 시작부터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살수는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살수를 향한 공격의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그때, 장양을 상대하던 살수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애부터 잡아!”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 살수의 등은 벽 뒤에 붙어버리고 말았다. 퇴로가 막혔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소소의 검에는 날이 없다. 그러나 내력이 담긴 묵직한 검은 일격에 나무를 분쇄한다. “흐앙. 미안해요!” 결심을 굳힌 소소가 검을 움직여 살수의 오른쪽 다리를 때렸다. 콰직-! 살수는 단번에 다리가 꺾여 고꾸라지며, 미친 듯이 고함을 내질렀다. “끄아아악-!” 차라리 베이는 게 나을 뻔했다. 뼈가 모두 부러지고, 기이한 각도로 꺾여 버렸다. “아저씨, 괜찮아요?” “크아악! 이 빌어먹을 꼬맹이!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나 바닥에 누워 바동댈 뿐, 그는 이미 전투력을 상실해 있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소소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다음 상대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