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명장과 졸장 (5)2022.03.06.
장양 장군과 두 명의 살수는 맞수를 이루고 있었다. 승부는 쉽게 나지 않을 듯했다. 그때 어느새 다가온 소소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흐잉. 미안해요, 아저씨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소소는 내심 웃고 있었다. 그들의 틈새로 파고든 소소는, 똥개를 때려잡듯 날이 없는 검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람쥐처럼 날랜 움직임에 살수들은 혼비백산했다. 하지만 장양에게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소소의 일 검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콰직-! 퍼억-! “크아악!” “끄헉!” 소소의 검날이 적중하는 곳마다 살수들의 팔다리가 사정없이 꺾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수들은 바닥을 뒹굴며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악에 받쳐 소리쳤다. “끄으윽! 이 꼬맹이, 정체가 뭐야?” “도, 도대체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온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전문적인 살수의 훈련을 거친 자신들이었다. 그런데 고작 허리춤밖에 안 되는 꼬맹이한테 허무하게 당하다니. 순식간에 전투 불능이 된 살수들은 억울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양마저도 황당한지 두 눈을 끔뻑거리며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의 착잡한 심정은 소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지금 무척 신이 났기 때문이다. 소무와 한 약속 때문에 평상시에는 무공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동안 본능을 억눌러왔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껏 무공을 사용해도 되는 순간이었다. 흥분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끝나면 언제 또 기회가 찾아올지 기약이 없었다. “할아버지, 어디 좀 다녀올게요!” 말을 마친 소소는 다짜고짜 지면을 박찼다. 용수철(龍鬚鐵)처럼 튀어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집무실의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재빨리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작은 얼굴은 다음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바로 지척에는 집무실의 입구를 지키는 양연정의 모습이 보였다. 십여 명의 살수들을 상대로 한 치의 밀림도 없이 홀로 버텨내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별로 흥미가 일지 않았다. 소소의 눈이 좀 더 먼 곳으로 향했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살수들과는 다르게 죽립을 눌러쓰고 있는 자가 보였다. 기습을 지휘하고 있는 조장급의 살수였다. 그는 상황이 쉽게 마무리되지 않자, 등 뒤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보다 못한 자신이 직접 나서려는 것이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한순간 그의 신형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방향은 정확하게 양연정을 향하고 있었다. 경공에서부터 다른 살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 순간, 집무실의 지붕에서 소소가 도약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한 마리의 참새가 조장급의 살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죽립 아래로 드러난 살수의 두 눈이 번뜩였다. 동시에 창공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검날. 카앙-! 일격에 베어버릴 심산으로 올려친 공격이었다. 그러나 일합을 겨룬 상대는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꼬맹이라니. “움직임을 보아하니, 기연이라도 얻었나 보구나.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가슴 높이로 치켜세운 살수의 검날에서 유백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검기(劍氣)를 발출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소소는 놀라긴커녕 배시시 웃으며 소리쳤다. “히히. 나도 할 줄 알아요!” 소소의 검에서도 수백 가닥의 빛살이 뿜어져 나오며 작은 검을 감쌌다. 처음으로 살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일곱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검기를 발출하다니. 무림의 역사상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었던가. 아무리 기연이 있었다고 한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제법이구나. 우리와 함께 가겠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어찌하겠느냐?” 아이의 재능이 탐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살수의 교육을 받게 한다면 훗날 특급살수, 아니 살왕(殺王)의 자리를 넘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소는 정색하며 소리쳤다. “싫어요!” “그렇다면 오늘 반드시 죽어줘야겠구나.” 소소는 검을 어깨 높이로 치켜세우며 반보를 내디뎠다. 백팔식광풍쾌검(百八式狂風快劍)의 기수식이었다. 살수가 움직임을 개시하자, 소소의 검이 바닥을 차고 오르며 다시 곡선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직선으로 바뀐 검은 서서히 전면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카카카캉-! 살수는 묵묵히 검을 쳐내며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 초식이 끝나는 순간 일격에 목을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본디 초식이란 몇 번의 공격을 끝낸 후 다시 호흡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소소의 공격에 호흡 따위는 없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연계기는 어느새 스무 번의 공격을 넘어서고 있었다. ‘뭐, 뭐 이런 경우가…….’ 더욱 그를 당황하게 했던 것은 소소의 체형에 있었다. 본디 살수는 상대의 목과 심장 등 급소를 노리는 공격이 몸에 배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소소의 키는 성인의 심장보다 훨씬 아래에 있었다. 그렇기에 타점을 잡기조차 힘들었으며, 예측하지 못한 위치에서 공격이 날아오기 일쑤였다. 한번 수세로 몰린 이상, 분위기를 뒤집을 수가 없었다. 초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뭐, 뭐냐?” 그렇게 서른 번의 공격을 받아낸 순간, 아이의 공격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카카캉-! 카카카캉-! 그리고 마흔 번을 넘어가자 바람을 찢는 파공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살수는 미친 듯이 검을 쳐내며 방어해야 했다. 그는 크게 당황하여 계속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왜 초식이 끝나지 않는 거냐!?” “백팔식이거든요.” “이런 미친!” 이제 겨우 절반이었다. 그리고 공격은 지금도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카카캉-! 카카카캉-! 육십 합이 넘어서부터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주위로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면의 흙먼지가 소용돌이치며 올라와 살수의 신형을 덮어버렸다. 이때부터는 그가 막아낼 수 있는 속도를 월등히 초과해 있었다. 상대가 저항할 수 없게 되자 소소는 검기를 소멸시켰다. 대신 날이 없는 검이 상대의 전신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광풍의 틈새를 비집고 처절히 울려 퍼지는 비명. “끄아아악!!!” 비명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 소리를 듣자 소소는 다급해졌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백팔식광풍쾌검에는 단점이 있었다. 한번 펼치고 나면 즉시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먼지의 소용돌이가 서서히 걷히며 살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눈이 풀린 그의 신형이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쿠웅-! “어, 어떡해…….” 쪼그리고 앉은 소소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용기를 낸 소소는 작은 손가락을 내밀어, 쓰러져있는 살수의 손을 조심스럽게 찔러 보았다. “주, 죽었어요?” 대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하아…….” 이미 시체들을 여러 번 보았기에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엇인가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그때였다. 쪼그려 앉은 소소의 뒤로 어느새 장양이 다가왔다. 상황이 모두 마무리된 것이었다. “흐엉……. 어떡해요?” 어느새 소소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양은 소소를 안아 들고는 다독였다.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허. 소소가 이 할아버지를 살렸구나. 저자는 단지 기절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니 미세한 호흡이 느껴졌다. 소소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칭찬까지 받고 나니 마음이 진정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검기를 발출하면 막대한 내력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배고파요…….” “어디, 무엇이 먹고 싶은지 얘기해 보아라.” “만두!” “허허허. 어디 만두뿐이겠느냐.” 장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보니, 한쪽에서 병사들이 호각을 불며 몰려들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양연정이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은 옥에 가두거라! 내가 직접 심문할 것이다.” * * * 남소평야에서 집결했던 송나라의 병력은 북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계획했던 약탈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남은 식량을 아끼며 각개의 군단들이 본영으로 복귀하는 일만 남았다. 시작도 못 하고 해산이라니.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망신이었다. 어설픈 곳에서 섣불리 해산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었다. 각 군단의 지휘관들은 안전한 지역까지 행군을 같이하기로 했다. “북진할 때는 선두고, 왜 회군할 때는 꼬리예요?” 랑아대의 철두가 투덜거렸다. 십만에 이르는 대군의 행렬. 그중에서도 랑아대가 가장 후미에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나란히 걷던 화산파 출신의 현정이 대답했다. “원래 행군할 때는 선두와 후미에 가장 강한 부대가 서는 거야.” “어떻게 아세요?” 현정이 랑아대에 합류한 기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본 전술 지식은 다른 대원들을 압도했다. “무림에서도 그래. 적들에게 기습을 받을 때 첫 열이 쉽게 무너지면 바로 진형이 와해되거든. 하지만 능히 버텨낸다며 아군은 사기가 오르고, 적들은 오히려 당황하겠지.” “아. 그래서 우리를 맨 뒤에 세웠구나.” 현정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꼭 그런 건 아니야. 가끔 본진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칼받이로 세워둘 때도 있어.” “아오.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그때였다. 랑아대의 선두에서 걷던 소무의 발걸음이 돌연 멈췄다. 모두가 걸음을 멈춘 채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집중하던 그의 귀가 갑자기 쫑긋 하고 움직였다. 먼 곳에서부터 무엇인가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지면이 진동하고 있다.’ 느껴지는 강도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거세져 갔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 먼 곳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아?” 소무의 말에 모두가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분명히 무엇인가의 기척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몇몇 대원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기, 기습이다!” “적군이 공격해온다!” 진영의 후미에서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음에 소란이 일었다. 병사들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행렬이 뱀처럼 출렁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뭐라고 소리치려는 찰나였다. 지평선에서부터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깃발들. 휘나라의 것이 분명했다. 행렬의 중간 곳곳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선두에 있던 지휘관들이 다급히 말을 타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후미의 기습이다!” “전투를 준비하라!” 급작스러운 전투 개시에, 병사들의 얼굴에 조금씩 불안이 떠올랐다. 먼지가 피어오르며 모래바람처럼 몰아쳐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면은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그것은 곧 병사들의 마음을 함께 뒤흔들었다. 소무는 적들의 규모를 파악하는 한편,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랑아대는 모두 도열하라!” 수없이 반복했던 훈련이었다. 백여 명의 대원들이 일렬로 늘어서며 방패를 움켜쥐었다. 드넓은 평야를 가득 메우며 쏟아져 오는 적군은 대규모의 기마부대였다. 대부와 장창을 움켜쥔 기병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흡사 갯벌을 향해 돌진하는 밀물과도 같아 보였다. 그 광경을 전면에서 마주하는 자들은 소름이 오싹 돋았다. 랑아대의 대원들도 움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뭐 이리 많아?” “저, 저걸 어떻게 막아?” 적의 규모를 가늠한 소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기병들의 머릿수는 최소한 오만 명을 상회했다. 평야에서 이루어지는 전투에서 한 기의 기병은 열 명의 보병을 상대한다고 알려져 있다. 송나라는 지역 특성상 군마가 많지 않기에, 대부분이 보병의 편제로 이루어져 있다. 그나마도 아군이 보유한 삼천 기의 기병들은 행렬의 선두에 있어, 지금의 습격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휘관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적들이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었음에도 아무도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포. 그리고 절망이 모두의 머릿속을 서서히 잠식해갔다. 일광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휘관 새끼들은 대체 뭐 하는 거야!?” 아무리 랑아대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기마대를 상대로는 답이 없었다. 답답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가 혼란에 빠진 그때, 소무가 내공을 실은 목소리로 거센 고함을 뿜어냈다. “랑아대, 삼십 보 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