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떠오르는 한중의 별 (1)2022.03.07.
모두는 한중에서 온 병사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지휘관들조차 우왕좌왕하는 마당에 전진이라니. 하지만 랑아대는 소무의 지시에 따라, 아군 진형의 선두에서 삼십 보를 나아가서 멈춰섰다. 중심에서 소무가 방패를 내뻗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추형방벽(錐形防壁)!” 백여 명의 대원들이 삼각형 모양의 쐐기 형태로 늘어섰다. “밀착!” 척-! 처척-! 방패들의 끄트머리가 서로 겹쳐지며, 철벽으로 변해갔다. 선두에서는 소무가. 두 번째 열에는 일광과 청해가 자리를 잡았다. 강한 자들일수록 앞 열에 자리하여,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는 방어벽을 완성했다. 본디 추형진은 공격할 때 사용하는 진법이다. 그걸 장양 장군이 고민하여 방어에 활용할 수 있도록 개량한 진법으로,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훈련만 몇 차례 한 것이 전부였다. 이 진형이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기마대의 충격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선 이들의 모습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일까? 주춤하던 아군 병사들이 점차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그때 진영 어딘가에서 장수 한 명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목책이다! 우리에게 목책이 생겼다!” 목책(木柵). 나무들을 엮어 만든 울타리로, 기병들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종종 이용되는 수단이다. 랑아대가 자신들을 직접 희생하여 목책 그 자체가 된 것이었다. 소리친 인물은 우고 장군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약탈 임무를 맡았던 그는 랑아대와 안면이 있었다. 랑아대의 행동에 크게 고무된 우고 장군이 대열의 곳곳을 누비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모두 대열을 갖춰라! 당황하지 말고 무기를 들어라!” 그 모습에 힘입어 몇몇 지휘관이 행동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기마병들과의 거리는 오십여 장 이내로 좁혀졌다. 장수들이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진영의 후미에서 지켜보는 사령관은 미동조차 없었다. 유광세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의 입이 달싹이며 부관에게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기마병들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 거리가 삼십 장 이내로 가까워지자 선두의 랑아대는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마치 산사태를 맨몸으로 막아내야 하는 심정이었다. 그 순간 소무가 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소리쳤다. “무적의 랑아대가 바로 우리다! 겁먹지 말고 버텨!” 기마병들과의 거리가 이십 장 이내로 좁혀지자, 모두가 양손에 움켜쥔 방패에 있는 힘껏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양팔과 두 다리에 전신의 힘을 집중했다. 거리가 십 장 이내로 좁혀지는 순간 전투마들이 고개를 숙였다. 충격돌파의 자세였다. 말 머리로 랑아대의 방어벽을 한 번에 부숴버리려는 심산인 듯했다. 한 호흡이 더 지난 후, 군마들이 랑아대의 철벽을 향해 사정없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콰앙-! 콰콰쾅-! 콰콰쾅-! 말 머리가 방패에 부딪힐 때마다 랑아대원들은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끄악!” “크으윽!” “크헉!” 대원들의 신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수백 마리의 군마들이 고꾸라지거나 튕겨 나갔다. 심지어 그 수는 계속해서 불어났다. 가장 큰 충격은 선두에 자리한 소무가 받아내고 있었다. 두 번째 대열의 기마병들이 충돌을 개시하는 순간, 일광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 악물고 버텨!!!” 콰앙-! 콰콰쾅-! “끄아아악!” “끄으윽!” 죽을힘을 다해 버텨내는 대원들. 시간이 갈수록 두 발이 지면을 움푹 파고들었다. 이들은 적들의 진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등 뒤의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오직 방패에 전신을 파묻은 채 인간 목책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기마부대는 랑아대의 철벽을 무너트리기 힘들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누군가가 깃발을 흔들자 대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양쪽 갈래로 우회하여 본진을 타격하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방향을 선회하는 이들의 기마 전술은 대단했다. 이로 인해 랑아대의 방패에 충격돌파를 시도하는 기병들이 크게 줄었지만, 간헐적으로 계속 들어오고 있었기에 진형을 풀 수 없었다. 소무는 방패 위로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전면으로 기병들이 삼 할 정도가 남아있었다. ‘조금 더 버텨야 한다.’ 후미에서는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반 각이 더 지나자 더는 돌진해오는 기병들이 없었다. 소무가 방패를 내던지자, 바닥을 뒹구는 천여 마리의 전투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다시 난전으로 합류할 때였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뒤돌아 명령을 내리는 소무. “자 모두…….” 그는 말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분노에 차오른 일광의 고함이 먼저 뿜어졌다. “개X끼들이 우리를 버리고 퇴각을 해!?” 가관이었다. 십만에 이르렀던 아군 병력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도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기병들이 뒤쫓으며 사정없이 도륙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령부에서 퇴각 명령을 내린 것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랑아대원들은 방패를 모두 내던진 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를 선택하다니. 대원들은 하나같이 사령관의 머리에 철퇴를 내리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맞서 싸운다 해서 승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최소한 이보다 피해는 적었을지 모른다. 보병이 평야에서 기마병을 피해 얼마나 도망칠 수 있겠는가. 지금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이제 우린 어쩌죠?” “계속 싸워야 하나요?” 랑아대는 아군이 있던 자리에 휑하니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기병들은 없었다. 사방에 전공을 세울 먹잇감들이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승리한 마당에 누가 위험을 감수하고 이 정예 병사들과 싸우려 들겠는가. “이미 퇴각 신호가 떨어진 것 같은데, 더 버티는 건 무의미하겠지. 한중으로 복귀할 때군. 모두 경공 펼칠 힘 정도는 남아있지?” “예, 충분합니다!” “문제없습니다! 어서 한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다들 한중에 있는 랑아대의 막사를 떠올렸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드넓고 아늑한 막사와, 해맑게 웃어주는 소소가 보고 싶었다. 그곳에 있을 때는 답답했지만, 막상 벗어나니 집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무는 대원들을 인솔하여 전장을 벗어났다. 그들이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자 말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까지 올라갔다. 이 속도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지만, 남소평야를 벗어나기까지는 문제없었다. 비록 전투는 허무하게 패배했지만, 자신들은 최선을 다했고 용맹하게 싸웠다. 게다가 한 명의 희생자도 안 나왔으니, 독자적인 파견부대로서는 최고의 성과였다. 전장을 벗어나고부터는 경공의 속도를 늦춰 조절했다. 이제부터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면으로 이름 모를 작은 대나무숲이 보였다. 일행을 인솔하던 소무가 그 앞에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십여 장이 떨어진 곳에서 낯이 익은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우고 장군이었다. 그는 대나무 아래 기대어 앉아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소무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장군?” “믿을 수 없군. 자네들이 살아남았다니.” 소무는 한눈에 우고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가슴에 입은 관통상. 당장은 버티겠지만, 결국에는 신의(新醫)가 오더라도 살릴 수 없는 부상이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상장군 유광세……. 그 빌어먹을 놈이,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직속 부대만 이끌고 먼저 전장을 떠났네. 나머지 군단들이 남아 버텨보았지만, 사령관이 도주한 상황에서 누가 싸우려 들겠는가.” “어찌 그런 자가 사령관이…….” “우리 송나라가 능력에 맞게 인정받는 나라였다면, 어찌 악비 대장군이 그런 꼴을 당했겠는가. 마음 같아선 황제고 재상이고 전부 목을 쳐버리고 싶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무는 황실이 얼마나 썩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야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말입니다. 황제와 간신배들의 목을 전부 쳐버리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생각만 해도 좋은지, 우고는 고통도 잊은 채 한참을 웃고 나서 말했다. “새로 황제가 되려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르겠지. 명군일지, 또 다른 금수일지. 설령 명군이라 할지라도, 그 뒤에는 다시 금수가 그 자리를 꿰찰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자가 황제가 되는 세상이 오지 않는 이상, 계속 되풀이될 뿐이네.” 소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백성들이 만드는 황제라…….’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어설픈 무림의 잣대로 이들의 세상을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성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는 자신 또한 한낱 백성에 불과했다. 아직은 배울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나중에 장양 장군과 의논하기로 마음먹은 소무는 화두를 돌렸다. “말씀하신 악비 대장군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진정한 충신이었습니다.” “허허……. 나는 그분의 부관이었네. 내 능력이 부족하여 그분을 지키지 못했지. 이번 생에서 가장 아쉬움이 남는 거라면 오직 그것뿐일세.” “유감입니다.” “근데 말일세. 그분께서 자신보다 뛰어난 인물이 한 명 있다고 했네. 그래서 난 그자가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네.” “그분이 누구입니까?” “자신의 사제라고 했네. 곁에 두고도 어찌 모르는가. 자네들을 보니, 악비 대장군의 말이 틀림이 없는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후후……. 이제 좀 쉬고 싶군.” “원하신다면 인근 마을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냥 좀 혼자 있고 싶네. 그리고…… 자네는 나처럼 장군을 잃지 말게나.” “조언 고맙습니다.” “어서 가보시게.” 소무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등을 돌렸다. 우고의 시선이 대나무 사이로 저무는 노을을 향했다. “후후……. 마지막을 홀로 보내기에는 좋은 장소군.” * * * 랑아대는 섬서에 진입하여 산양(山陽)을 통과한 후 순양현(旬阳县)에 진입했다. 이곳은 아직 전란이 미치지 않아, 거리에 생기가 넘쳐났다. 야외에 늘어선 노점식당에 자리를 꿰찬 대원들은 마른 침을 계속 삼키고 있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그동안 병량이 부족하여 며칠간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기 때문이다. 일광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주인장! 빨리 나오는 것부터 아무거나 내어주시오! 쓰러질 것 같으니까 아무거나 빨리!” 평소 한 끼에 다섯 명분의 식사량을 해치우는 일광이, 고작 하루에 한 끼로 지금껏 버텼다. 배고프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예, 금방 나갑니다요!” 소무는 묵묵히 대원들을 내버려 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괜찮으니 천천히들 먹고 있어.” “대장님, 어디 가세요?” “식사도 안 드시고요?” 대원들이 어리둥절할 찰나, 일광이 킥킥대며 말했다. “이번 달 급료도 미리 받았겠다, 선물 사러 가셔야지. 맨손으로 돌아가면 입 튀어나온 딸내미를 감당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