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떠오르는 한중의 별 (2)2022.03.08.
소무가 랑아대의 복귀 경로로 순양현(旬阳县)을 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개방의 섬서분타를 이곳으로 이전한다고 했지.’ 군단에 지원하기 전 허규에게 들었던 내용이었다. 휘나라는 무공을 사용하는 거지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기에, 분타 이전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곳은 한중이 무너지지 않는 한 안전한 위치였다. 순양현의 저잣거리에서 개방의 문도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지척에도 전각 외벽에 기대앉아 있는 꾀죄죄한 거지가 한 명 있지 않은가. “너는 이결제자로군.” 거지의 눈알이 돌아가며 소무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처음 보는 전투복과 갑주였지만, 분명 관군의 복장이었다. 그것도 투구에 붉은 술이 장식되어 있다면 장교급이다.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다간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일. 거지는 최대한 공손히 말했다. “나으리, 소인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요?” 소무는 품속에서 소량의 엽전 뭉치를 꺼냈다. 소소의 선물을 사고 조금 남은 돈이었다. “분타주에게 내 말을 전해준다면 이것을 너에게 모두 주지.” 거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핏 보아도 엽전 삼십 냥 정도는 되어 보였다. 국수를 여덟 그릇은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게다가 말만 전하는 것 정도야 문제 될 것이 없지 않은가. “저, 정말입니까요?” “그저 오랜 지인이 찾는다고만 전해주게. 오든 안 오든 이 돈은 너에게 주지. 다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마침 분타는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위치였다. 거저먹는 돈이나 다름이 없었다. 거지의 목소리는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예, 나으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무의 시선이 지척의 찻집을 향했다. 송나라는 중원의 역사에서 차 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였다. 야외에 탁상 두세 개를 내놓고 영업하는 찻집이 저잣거리에 널려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소무는 소엽차 두 잔을 주문했다. 소엽차는 소엽초를 건조하여 끓인 차로, 가격도 저렴했다. 차가 나오고, 반 각이 더 지날 무렵. 먼 곳에서 경공까지 펼치며 미친 듯이 달려오는 거지 한 명이 보였다. 한달음에 달려오는 분타주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분타주가 마주 앉자 소무는 주위로 기막(氣膜)을 둘렀다. 대화 소리를 외부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보다시피.” 허규는 소무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며 한참을 웃었다. “천하의 검성이 관군이 되었다니? 지나가던 똥개가 웃겠구만. 낄낄.” “먹고 살려면 뭐라도 해야지. 급료도 꼬박꼬박 나오고, 뭐 나쁘지는 않아.” “장양 장군이 기적적으로 승리했다더니, 역시 그 안에 자네가 있었어.” 대화 중 소무의 시선이 우측으로 향했다. 개방의 거지 한 명이 눈치를 보며 기웃거리고 있었다. 소무가 손목을 튕기자 엽전 뭉치가 거지의 가슴팍을 향해 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약속했던 수고비였다. 거지가 춤을 추며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소무는 다시 말문을 이어갔다. “개방이 무림사는 내버려 두고 국가 정세에 관심을 두는군.” “지금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휘나라의 개새끼들이네. 무림을 들쑤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하긴. 화산파가 무너졌으니.” “어디 화산파뿐이겠는가?” 소무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화산파가 당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다른 곳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사이 다른 곳이 또 당했다니, 믿기지가 않는군.” “놈들은 지금 종남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네. 그리고 얼마 전 살문도 휘국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지.” 살문이 어디인가. 섬서에 위치한 살문은 무림의 역사상 가장 역사가 깊은 살수 집단이다. 구파일방은 건드려도 살문과는 척을 지지 말라는 무림의 명언이 있을 정도였다. “살문도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말인가?” “문주가 살아남았다고 하더군. 알고 있지? 최연소의 나이에 살왕(殺王)의 칭호를 거머쥔 천부적인 살수 말이야.” 소무도 얼핏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그자가 살왕이 된 이후, 살문은 죽을 만한 죄가 없는 자들에 대해선 의뢰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젊은 살문의 문주가 화가 많이 났겠군.” “킬킬. 복수는 이미 시작되었네. 영문도 모르고 객사한 휘나라의 장수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네. 누구 짓일 것 같은가?” 소무는 찻잔을 든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규에게 들은 내용은 굉장히 솔깃한 정보였다. ‘무공이 약한 장양 장군이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호위무사가 필요하다. 만약 이 자를 포섭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적임자가 될 수 있겠군. 하지만 쉽지는 않겠지.’ 살왕이 누구인가. 소무는 감히 그를 호위무사로 고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기절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소무로서는 탐나는 인재가 아닐 수가 없었다. 일 할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시도해봐야 했다. “그자의 위치가 대략적이라도 포착되면 나에게 바로 알려줘. 어디로 와야 하는지는 알지?” “어디긴, 장양 군단의 랑아대겠지.” “거기까지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한중에 우리 개방의 거지들이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은가. 섬서에서 가장 배부른 도시라, 서로 그곳으로 보내 달라고 난리일세. 그나저나 잡담이나 나누자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용건은 따로 있을 텐데?” “인력이 부족한 만큼 우리 군단의 정보수집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앞으로 개방에서 수집된 휘나라의 모든 정보를 한중의 군영에 전달해줘.” 소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허규는 한참이나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겨우 진정된 그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개방을 호구로 보는군. 정보야말로 우리 개방의 밥줄이고 생명줄이네. 이걸 그냥 공짜로 넘기라고?”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소무는 묵묵히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나직이 말했다. “한중이 뚫리면 개방도 무사할 수 없겠지.” 소무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교통의 요충지인 한중이 뚫리면 중원 전역이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들의 승패에 무림의 존망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열세의 상황이 된다. “뭐, 운명공동체란 말인가? 장담은 못 하지만, 자네 부탁이니 방주님과 한번 의논해 보지. 마침 이곳에 와계시니 오늘 바로 결정 내릴 수 있을 걸세.”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어.” 허규는 소무를 바라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기분이 찜찜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는 아니겠지?” “그거 맞아. 생각해보니 남은 돈을 아까 거지한테 다 줘버렸더군. 계산 좀 해줄 수 있지?” 허규는 똥 씹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군영에 막 당도한 랑아대는 군장부터 풀기 위해 막사로 이동했다. 좌우로 늘어선 훈련장에는 병사들이 들어차 훈련에 열중이었다. 반 각을 더 걸어가자 랑아대의 훈련장이 나타났다. 쪼그만 여자아이 하나가 훈련복을 입은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홀로 있는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소소!” 익숙한 음성에 소소의 얼굴이 휙 돌아가며 상대를 찾았다. 아버지와 삼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달음에 달려간 소소는 바로 소무의 품에 안기며 소리쳤다. “흐앙…….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잘 지내고 있었어?” 소소는 대답 대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내 선물은요?” 선물부터 찾는 소소의 모습에, 지켜보던 모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소무를 기다렸던 건지 선물을 기다렸던 건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일광이 옆에 있던 청해를 바라보며 킥킥댔다. “내 말이 맞지?” “깜빡이라도 했으면 큰일날 뻔했네요.” 소무는 등 뒤의 봇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었다. 고려의 전통의상으로, 십여 년 전 중원에 전파되어 유행을 타고 있는 한복이었다. 눈처럼 흰 윗옷에 꽃 모양이 수놓아진 분홍 저고리, 그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청홍치마까지. 게다가 비단의 원단을 사용한 고급의류였다. 한눈에 보아도 무척 화사해 보였다. 옷을 받아든 소소는 언제 울었냐는 듯 해맑게 웃기 시작했다. “히히. 이것 좀 만져 봐요. 부드러워!” 비단을 처음 만져보았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온종일 군복만 입고 군영을 돌아다니는 소소의 모습이 평소 안쓰러웠다. 한복을 끌어안고 좋아하는 모습에, 소무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구나.” “고맙습니다, 아버지!”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랜만에 왔으니 우선 장군님부터 보고 와야겠구나.” “할아버지요? 내가 어딨는지 알아요!” 당연히 집무실에 있을 시간이었다. 소무는 모르는 척 소소를 따라 이동하며 대원들에게 말했다. “이따가 막사에서 보지. 다들 쉬고 있어.” “예, 대장님!”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대원들을 뒤로한 채 소무는 장양의 집무실로 곧장 향했다. 장양도 이미 소식을 들어 기다리고 있었기에, 대면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집무실이 많이 바뀌었군요.” 장군의 집무실은 소박하고 깔끔하던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널브러진 장기판과 먹다 남은 간식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이 소소의 작품이었다. “허허. 텅 빈 집무실이 쓸쓸하고 허전했는데, 심심하지는 않았네.” 소무의 시선이 은연중 집무실의 천장과 문틀로 향했다. 모두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벽면에는 전투의 흔적까지. ‘자객이 왔었군.’ 하루빨리 장양의 호위무사를 구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우선 눈앞의 일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랑아대가 출진한 지 보름도 채 안 되어 돌아왔다. 장양은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닐 텐데도 먼저 얘기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전투는 패배했습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빨리 올 수 없었겠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앉지.” 소무는 고개를 한 번 숙여보이고는 딸에게 눈짓을 보냈다. “할아버지랑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나가서 놀고 있을래?” “싫어요~ 나는 아버지랑 같이 있을 거예요.” 오랜만에 만나서 떨어지기 싫은 모양이었다. 소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장양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나는 괜찮으니 그냥 놔두시게. 얌전히 있는데 굳이 쫓아낼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노년에도 가족이 없는 장양에게 소소는 이미 친손녀 이상의 존재였다. 주전부리 몇 개를 건네주자, 소소는 해맑게 웃으며 구석으로 달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딸을 바라보던 소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장양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털어놨다. 집결 장소에 합류한 이후부터 군단이 해산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얘기를 듣는 장양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일각이 지난 뒤, 장양은 가장 호탕한 부분부터 거론하기 시작했다. “허허허! 회환읍의 주민들을 그렇게 대피시켰다니, 잘하였네!” “자칫하면 장군님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만약 자네들이 약탈에 합류하기로 했다면 크게 실망했을 걸세. 아주 고생했어.” “하지만 저희 때문에 전투에서 불리해진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시작부터 진 싸움이었네. 상대는 북부 초원의 군마를 대량으로 양성하고 있는 휘국이지 않은가. 평야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행군하다니, 죽여 달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지. 무능한 사령관 때문에 우고 장군이 죽은 것은 안타깝군. 명장 하나가 너무 허무하게 갔어…….” “사령관은 전공에만 눈이 먼 자로 보였습니다.” “유광세는 원래 그런 인물일세. 나라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자가 어찌 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장준에 비교한다면 유광세를 욕할 수는 없을 걸세.” 추밀원사 장준. 이번 집결에 오만 군세를 이끌고 합류하기로 약조해 놓고 끝까지 나타나지 않은 인물이었다. “유광세보다 더 심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군요. 어떤 인물입니까?” “천하의 몹쓸 놈이네. 장준이 출진한다는 소식만 들려와도 경로상에 있는 모든 마을의 백성들이 피난을 가고 있네.” 소무는 장양의 양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가 이렇게 흥분한 모습으로 남을 험담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약탈을 자주 했나 보군요?” “전투에는 관심도 없고, 지나는 모든 마을마다 약탈과 노략질만 일삼고 있네. 심지어는 부녀자들을 잡아다가 강간까지 일삼고 있지. 아군의 장수가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네.”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렸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장준이란 자는 확실하게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놈이로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살려둘 수가 없었다. 비록 아군의 지휘관이지만, 언제라도 기회가 온다면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소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장양이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휘국이 소강상태에서 승기를 잡았으니 곧 남진을 시작할 걸세. 대비를 강화해야겠지. 하지만 그보다 앞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네.” “무엇입니까?” “최근 한중으로 피난을 오는 백성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일세.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정리하러 가려는 참이었네. 어서 함께 가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