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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떠오르는 한중의 별 (3) (37/250)

37화 떠오르는 한중의 별 (3)2022.03.09.

한중은 밀려드는 피난민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섬서에서 유일하게 굳건히 버티고 있는 이곳으로 백성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장수가 한자리에 모였다. 기다란 탁상을 끼고 부관 양연정이 한참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이번 달에만 벌써 일만이 넘었습니다. 계속 피난민을 수용하실 생각이신지요?” 상석에 앉은 장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 불쌍한 백성들이 갈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모두 받아들이시게. 결코 구휼(救恤)도 멈추어서는 안 되네.” “일자리와 식량 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현 상태가 계속된다면, 군량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몰려드는 피난민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겠지. 하지만 이들과 무엇인가를 함께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이점이 더 많지 않겠는가.” “묘안이 있으신지요?” “황실에 둔전 경영에 대한 허가를 요청했었네. 그리고 며칠 전에 승인을 받아냈지. 한중 일대의 토지를 모두 사용해도 좋으니, 수확량의 이 할을 내라고 하더군.” “황실이 순순히 허락해줬다는 말입니까?” “천도한 지 오래되지 않은 상태라 수도에 물자가 넉넉지 않은 모양일세. 오히려 반가운 상소문이었겠지.” 지켜보던 진립 부장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백성들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대대적으로 개간하여 밭을 일군다면 일자리 문제도 해결되고, 식량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둔전이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징수 비율을 책정하시겠습니까?” “백성들에게 육 할. 황실에 이 할. 나머지는 우리 군단에서 군량미로 비축할 것이네.” “육 할은 좀 많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그 어떠한 둔전에서도 백성들에게 오 할 이상을 나눠준 역사가 없습니다. 평균적으로는 삼 할입니다.” “둔전이 실패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네. 그러다 보면 누가 이 일을 하려 들겠는가. 동기를 준다면 작업량이 늘어날 것이고, 오히려 상상 이상의 성과가 나올 수도 있는 법이지. 인력과 토지가 충분하니, 나는 이 할로도 군량미가 풍족해질 것으로 생각하네.” 진립도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는 감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장군. 민생도 함께 살필 수 있으니,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소싯적 지방 현위로 근무하며 농민들의 세금 징수를 관리한 경험이 있었지. 그렇다면 이 일의 적임자가 아니겠는가. 앞으로 둔전 경영은 진립 부장이 맡아서 잘 추진해 주시게.” 진립은 고개를 잠시 갸우뚱했다. 자신의 과거는 아주 오래전 지나가는 말로 한 번 얘기했을 뿐이었다. 그걸 장양 장군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을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장양의 시선이 다시 양연정을 향했다. “우리 한중군에 소속된 함선이 얼마나 되는가?” “수송함으로만 사십이 척이 있으며, 한수항에 정박 중입니다. 나머지는 황제께서 장강 이남으로 도주할 때 모두 가져갔습니다.” 양연정은 천도 대신 도주라는 단어를 택했다. 수많은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재물을 가득 싣고 남하한 황제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수송함을 가만히 썩힐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사십이 척 모두 백성들에게 임대하여, 어획 사업을 병행했으면 하네. 당장 부족한 식량을 조달하고, 남는 것은 시장에 매각하여 군비를 확보하는 것이 좋겠군.” 수송함은 한중이 수세에 몰렸을 때 군단이 퇴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것을 어민들에게 빌려준다는 것은 배수의 진을 치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황실에서 허가를 해주겠는지요?” “최상급 어종을 따로 분류하여 헌납하겠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걸세. 황실이 호화로운 사치를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겠지. 오히려 간신들이 나서서 허가해줄 걸세. 조만간 상소를 올리도록 함세.” 한수(漢水)에서 간혹 포획되는 금단잉어와 백화잉어 등은 아주 진귀하여 최고의 사치품으로 분류된다. “분배는 어떻게 할 계획이신지요?”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육 할이네. 승인이 완료되면 바로 모집 공고를 올리도록 하세. 이 일은 백문휘 부장이 맡아주면 좋겠군. 자네의 고향인 수현읍은 어촌이 아니었는가. 아무래도 어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우리 중에선 가장 뛰어나겠지.” 묵묵히 듣던 백문휘는 흠칫했다. 장양이 자신의 고향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장양의 시선이 묵묵히 지켜보는 위진철을 향했다. “현재 우리의 총 병력은 팔천에 불과하네. 그러나 적들의 병력은 계속 불어나고 있으니, 우리도 대비를 더 강화해야겠지. 위진철 부장이 신병 모집을 추진하고 훈련을 총괄하여 주시게. 자네가 이 분야에서는 최고이지 않은가.” 위진철은 장양의 칭찬에 입이 귓가에 걸렸다. “맡겨만 주십시오. 천하의 강병으로 키워 내겠습니다.” “역시 믿음직하군. 그럼 당분간 정규군의 훈련은 곽철 부장과 한백 부장이 맡아주시게. 랑아대는 알아서 잘할 터이니 신경 안 써도 되겠지.” 곽철과 한백 부장이 동시에 대답했다. “예, 장군.” “알겠습니다.” 모든 장수의 눈빛에 의기가 서렸다. 장양은 흡족한 얼굴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 안건이 남았네. 나는 우리 군단에 별도의 의료부대를 창설하면 어떨까 생각해봤네.” 양연정 부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의무병들이 있지 않습니까?” “야전에서 함께할 별도의 의료부대를 말하는 것일세. 나는 전투에서 상처를 제때 치료받지 못하여 죽어간 가여운 병사를 보았네. 만약 멀지 않은 후방에 의료 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면 그 병사가 어찌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겠는가.” “묘안입니다. 전장에서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병사들은 다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기가 매우 높아질 겁니다. 비전시에는 민간 의료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군단의 의학 수준이 높지가 않다는 것이네. 민간 의원들의 도움을 받고 싶으나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고. 어찌하면 좋겠는가?” 묵묵히 지켜보던 소무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 일은 제가 맡아보겠습니다. 최고의 적임자를 알고 있습니다.” 소무가 아는 무림의 제일 신의가 바로 이곳 한중에 있었다. 그리고 그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장양의 눈빛이 지그시 가라앉으며 소무를 향했다. “왠지 자네에게는 매번 빚을 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군. 내 그자를 의료부대의 대장으로 기용할 생각이니, 반드시 포섭해오시게.”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었다. 소무로서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양은 자신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어떤 인물인지 안 물어보십니까?” “내가 자네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면, 자네의 안목도 틀림이 없을 것이라 믿네.” 소무는 묵묵히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자, 그럼 당분간은 모두 바쁘겠군. 우리 함께 모두가 웃으며 춤출 수 있는 세상을 한번 만들어 보세.” 장양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마지막 말은 소무의 가슴을 뛰게 했다. 자신이 꿈꿔본 세상. 우연일지라도 그것이 장양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 * * 생필신의(生必神醫) 모청. 그가 손을 댄 자는 반드시 살아난다고 하여 붙은 별호이다. 모청이 손을 대지 않는 자는 이미 죽었거나, 회생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인물뿐이었다. 얼마 전 그가 군영에 나타나 위진철 부장을 치료했다는 것은, 멀지 않은 곳에서 의료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개방의 도움을 받아도 되었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소무는 두 시진에 걸쳐 한중의 의원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스물세 번째 방문한 장소에서 드디어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간 방문했던 곳 중에서 가장 작고 허름한 곳이었다. 생화당(生化堂)이라는 현판만 달려있을 뿐,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의 형태로 지어진 민가였다. ‘후. 이럴 줄 알았으면 규모가 작은 곳부터 돌아다닐 걸 그랬군.’ 낡은 나무문을 열자 약재를 조재하는 노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인기척 좀 내고 들어와, 이놈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의술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니. “또 뵙는군요.” 고개를 돌린 모청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갔다. “거, 검성께서 어찌 이곳을…….” “편히 말씀하시지요, 어르신. 이미 강호를 떠났으니, 그곳의 배분을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모청은 기분이 묘해졌다. 검성은 지닌 무공과 명성만으로도 무림에서 최고의 배분으로 인정해주는 인물이다. 정마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림의 영웅이었다. 그런 자가 지금 자신에게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강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지만,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래도 되겠는가?” 소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어르신.” “누, 누추하지만 일단 앉으시게.” 조그만 식탁과 겨우 엉덩이만 걸칠 수 있을 만한 허름한 의자였다. 소무가 망설임 없이 앉는 것을 확인한 모청은 구석에서 차를 내왔다. 어느새 얼굴에는 다소 긴장이 풀어져 있었다. “생양차(生陽茶)이네. 몸속의 양기를 보충해주고, 독기를 몰아 내주는 효과가 있지.” 차를 한 모금 마신 소무는 반사적으로 내뱉을 뻔했다. 온갖 약재를 조재하여 만든 차이니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치 혀가 마비되는 듯한 맛이었다. 그러나 애써 표정을 유지하며 묵묵히 대답했다. “귀한 차로군요. 맛이 괜찮습니다.” “참을성이 대단하구먼. 헌데 어찌 이 볼품없는 노인네를 찾아왔는가? 차 한 잔 마시자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소무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르신. 강호를 떠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의술을 펼치는 이유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지. 근데 내가 강호에서 살리는 놈들은 모두 사람을 죽이는 놈들일세. 그렇다면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의원인가, 죽이는 의원인가? 회의감이 들었네.” “그럴 만도 하겠군요.” “결정적으로는 내가 살린 한 놈이 마교에 포섭되어 천 명을 죽였기 때문이네. 그 한 놈이 지금껏 내가 살린 자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네.” “마교에 포섭된 인물이라면 아마도 흑사신마로군요.” “맞네. 공교롭게도 정마전쟁에서 자네에게 죽은 쓰레기 놈이지.” “그렇다면 얼마 전 한중의 군영에서 죽어가는 장수를 살린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자도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자이지 않습니까.” 모청은 단호하게 말했다. “장양 장군은 예외일세. 그의 휘하 장수라면 당연히 살려야지.” “기준이 모호하군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중의 많은 백성이 알고 있네. 그는 오래 전부터 사복 차림으로 거리에 자주 나오곤 했지. 한 번은 부족한 약재를 사러 가던 중 우연히 그를 보았네.” 이것은 소무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넋을 잃고 주저앉은 상인 앞에서 오열하는 장군의 모습을 보았네. 다른 상인들에게 물어봤더니, 그 상인은 군영에서 죽은 병사의 아비라고 하더군. 죽은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자의 검은, 내 기준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검이 아닐세.” 군영에서 죽었다면, 휘나라의 별동대가 야습을 해왔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이곳의 백성들이 장양을 맹목적으로 응원하는 이유.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어르신의 뜻이 저와 같군요.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모청은 생양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나직이 대답했다. “수락하겠네.” “예?” 이유도 물어보지 않고 수락하다니.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양 장군을 위한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천하의 검성이 내게 부탁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 바로 내 생애에서 가장 영예로운 순간이네. 어쩌면 죽기 전에 그동안의 후회를 만회할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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