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불곰의 포효 (1)2022.03.10.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소소였다. 주위를 살피던 소소는 다짜고짜 막사 안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어서 일어나세요! 훈련장 갈 시간이에요!” 대원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한두 명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모두의 얼굴에 피곤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새벽까지 운기조식을 하느라, 평균 수면 시간이 두 시진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뭐야 벌써?” “난 방금 누웠어…….” 잠이 다 깨어버린 대원들은 원흉을 눈으로 찾았다. 소소는 마치 나 좀 봐달라는 듯한 몸짓을 하며 삼촌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군복만 입고 다니던 아이가 화사한 한복을 입고 있으니, 확실히 달라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한숨과 함께 두 눈을 다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어제도 봤잖아…….”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잖아.” 아침마다 자신들을 깨우며 이러고 있었다. 소소의 눈이 맞은편에서 묵묵히 훈련복을 입고 있는 현정을 향했다. 화산파 출신의 그는 자신의 비위를 가장 잘 맞춰주는 인물이었다. “현정 삼촌, 나 예뻐요?” 어제도 물어봤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현정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소소 정도면 천하제일 미인이지. 강호에서도 본 적이 없어.” “헤헤. 이거 먹어요!” 현정의 시선이 소소가 내민 작은 손으로 향했다. 손때가 진득하게 묻은 곶감이 보인다. 얼마나 주물럭거렸는지,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고, 고마워.” “삼촌만 주는 거예요.” 아래에서 큼지막한 눈으로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안 먹을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 입을 깨물어보았다. 단맛이 나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짠맛도 섞여 있는 듯했다. “마, 맛있네.” 현정과 소소가 노닥거리고 있는 사이, 어느새 다른 대원들도 모두 기상하여 훈련복을 입고 있었다. 대원들의 마음에는 은연중 무공 성취에 대한 경쟁심리가 자라나 있었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였다. 하나둘씩 나가는 대원들을 뒤로한 채, 소소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한복을 벗었다. 훈련장에 아끼는 옷을 입고 나갈 수는 없는 일. 목합 형태의 개인 상자를 열고 조심스럽게 한복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소무가 슬그머니 눈을 뜨고는 소소의 개인 물품을 바라보았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나 궁금했던 것이다. 한쪽 구석에는 온갖 종류의 간식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밤, 대추, 당근 등은 물론이거니와 전통 과자들까지. 피난 준비를 위한 비상식량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도대체 이런 걸 어디서 다 얻어왔단 말인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상자의 구석에는 전투복을 포함한 의복이 있었고, 소량의 엽전까지도 보였다. 아마도 싸돌아다니면서 조금씩 받은 용돈을 모아놓은 모양이었다. “엽전은 뭐 하려고 모으고 있어?” 소소는 재빨리 상자의 뚜껑을 닫으며 소리쳤다. “비밀이에요!” 목적이 궁금했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일. 급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누구나 비밀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 오늘은 삼촌들이랑 같이 좀 놀고 있을래?” “어디 가요?” “후후. 요즘 찾는 사람이 많아서 바빠. 대신 내일은 같이 경공 수련이나 할까?” “히히. 좋아요!” 경공은 소소가 제일 좋아하는 수련이었다. 정군산의 입구까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달리는 것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훈련장 밖에서는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처럼 함께 나서는 순간이 기다려지는 건 당연했다. 막사 밖으로 나온 소소의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내일 함께 경공 수련을 할 생각을 하니 좋은 모양이었다. 소무는 딸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잘 놀다 와.” “이따 봐요, 아버지!” 소소는 요즘 삼촌들과 대련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멀어져 가는 소소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소무는 발길을 돌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랑아대의 훈련소와 반대 방향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일각이 지나 도착한 곳은 군영의 의료막사였다. 야전 의료부대가 새로 신설되면서 이곳은 가장 바쁜 곳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인물은 생필신의 모청이었다. 새로 차출된 오십여 명의 의무병들에게 의술을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막사에 들어서자 짚단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인형들이 보였다. 그리고 대침을 움켜쥔 채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청의 모습도 말이다. “이 미친놈아! 그곳을 찌르면 즉사야, 즉사!”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네 손가락은 방금 사람을 죽인 거여! 한 번만 더 실수하면 눈알을 확 찔러버린다!” 역시나 소문대로 괴팍한 성격이었다. 소무는 웃음을 참으며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자신을 발견한 모청이,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왔다. “침술을 교육하고 계셨나 봅니다, 어르신.” “허허. 내 종심(從心)의 나이에 군에 들어와 이런 꼬맹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니.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일세.” “편히 보내시는 걸 고생시켜드려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 평생의 후회를 만회할 기회를 얻게 해주었으니 오히려 고마울 뿐일세. 어떤 병신이 되었든 내 앞으로 가져다만 놓으시게. 숨만 붙어 있으면 살려서 집으로 보내줄 테니.” 그때였다. 의료막사에 누군가가 들어오며 인기척을 냈다. “다친 병사들을 집으로 보내준다니, 그보다 더 반가운 말이 어디 있겠소. 우리와 함께해주어 정말 든든하오.” 장양 장군이었다. 그가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나타난 것은 새로 창설된 이 의료부대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모청은 굽은 허리를 더욱 굽히며 장양에게 말했다. “말씀을 편히 하십시오, 장군. 저 때문에 군의 위계질서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장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 모청 대장.” 말을 마친 그는 기립하고 있는 의무병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만약 전방에서 병사들이 열심히 싸운다면, 그건 모두 후방의 자네들을 믿고 있기 때문일 걸세. 최고의 신의(神醫)에게 배우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모두 자긍심을 가지도록 하게.” “예, 장군!” “알겠습니다!” 의무병들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막사를 한 바퀴 둘러본 장양의 얼굴엔 흡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모청 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요청하시게. 의료부대에 대한 물자는 조금도 아끼지 않을 걸세.” “예, 장군. 알겠습니다.” “소무 대장은 나와 함께 좀 걷지.” 모청에게 눈인사를 건넨 소무는 장양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둘은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고 묵묵히 길을 걸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장양이 말문을 열었다. “고생이 많았네. 자네한테는 무슨 일을 맡기든 기대 이상으로 해내는군. 매번 놀라게 된다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최근 들어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네.” 짐작가는 바는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무슨 일입니까?” “어제부터 군영 앞에 거지들이 계속 찾아와서 휘나라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네.” “정보를 취급하는 거지라면 무림의 개방이겠군요.” “그런 것 같기도 하군. 하나같이 매우 귀하고 값진 정보이지만, 그것을 어찌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 군단에서 딱히 지원을 해주는 것도 없거늘.” “아시다시피 우리 랑아대에 무림인 출신이 몇 명 있습니다. 게다가, 휘나라는 무공을 사용하는 거지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음. 그렇다면, 우리 한중이 무너지면 그들도 곤란하겠군. 이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작전 능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할 수 있을 것이네.”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마침 그들이 랑아대의 대장을 지목하며 직접 보자고 요청했네.” “저를 말입니까?” “자네에게만 따로 전달해야 할 정보가 있다더군. 랑아대의 명성 때문이겠지. 직접 만나보고 그들의 본심을 파악해주시게.” “알겠습니다.” “저잣거리로 나오면 알아서 연락한다더군. 그리고 또 한 가지. 자네와 상의해보고 싶은 문제가 있네.” 여러 가지 내부 정책으로 부장들은 정신이 없을 시기였다. 소무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최근 밀려드는 피난민으로 인해 치안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네. 심지어 납치와 인신매매를 일삼는 점조직까지 있는 모양일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범죄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나 국경 부근에 있는 도시에서는 전란의 혼란을 틈타 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에 관심이 없었던 소무로서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병사들을 대대적으로 풀어 조사하고, 하나씩 소탕해보는 것은 어떨지요?” “나도 그 방법은 생각해 보았네. 하지만 관군이 거리로 몰려나와 헤집고 다닌다면, 백성들이 불안해하지 않겠는가.” 소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호라면 모를까, 이 바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던 중 뒷골목의 생태계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인물이 하나 떠올랐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어디 한번 말씀해보시게.” “우리 부대에 이쪽 방면으로 능통한 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자를 풀어 한중의 뒷골목을 평정시킨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얼굴이 활짝 펴진 장양이 손바닥을 부딪쳤다. “허허허! 그거 정말 묘안이로구만. 우리 쪽 사람이 저들의 위에 군림할 수만 있다면, 모두 한 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지. 허나 혼자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도 백양현의 뒷골목을 평정한 일광이었다. 지금은 어지간한 일류고수도 때려죽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걱정되는 것은 오히려 상대들이었다. “문제없습니다.” * * * 군복을 입고 저잣거리의 중심가로 나온 소무는 묵묵히 주변을 살펴보며 거닐었다. 아침인데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생기가 감돌았다. 노점식당에는 밤새 술을 마시고 해장을 하는 자들이며, 이른 아침부터 차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자들로 가득했다. 전면으로는 거대한 삼 층 구조의 전각들이 보였다. 최근에 생긴 이곳은 다와채(多瓦寨)라는 다중 복합 건물이었다. 이름 있는 대부호가 삼 층 구조의 전각 세 채에 구름다리를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이곳에는 찻집과 객잔, 그리고 음식점들이 공존하며, 각종 곡예와 연극 등 수백여 명이 관람할 수 있는 공연장도 존재한다. 지난 휴가 기간에 방문했던 때와는 많은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도시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어?” 어느새 다가온 개방의 허규였다. 소무도 이미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에 태연히 답했다. “중원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군.” “한중성이 지켜지고, 인구가 늘어나니 부호들이 중심가에 투자를 쏟아붓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개봉과 장안이 털린 이상, 이곳이 중원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바뀔 걸세.” “그럼 이참에 개방도 투자 좀 하지그래?” “개방은 무소유가 원칙이지만, 운영자금이 필요한 것도 현실이고. 사실 방주님이 총단의 자금을 탈탈 털어 몰래 사놓은 곳이 있네. 껄껄.” “그렇다면 한중이 무너지면 더더욱 안 되겠군. 이 근처인가?” 허규가 손가락으로 우측에 자리한 전각 하나를 가리켰다. 그런대로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이 층 구조의 전각. 안에서는 몇몇 상인들이 종이 뭉치를 정리하고 있었다. 안력을 돋우어서 보자 확실히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거지들이 기웃거리며 전각의 창틀로 무엇인가를 은밀히 밀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밀 분타일세. 이곳에서 정보를 분류하여 필요한 자들에게 팔고 있지. 휘나라에 대한 정보는 따로 모아 군영으로 전달하고. 아무튼, 앞으로 급한 용무가 있으면 이곳으로 찾아오게.” 소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 얘기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눈치 하나는 귀신이군. 부탁한 것 말일세. 확실하지는 않지만, 살왕이 있을 만한 곳으로 짐작되는 장소를 포착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