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불곰의 포효 (2)2022.03.11.
소무는 허규와 함께 나란히 시장을 거닐었다. “양장림에 진입한 휘나라의 병사들이 동시에 실종되었네. 그것도 무려 수천 명에 이르는 병력이 말일세.” 양장림(陽長林). 장안성의 남쪽에 존재하는 울창한 대나무 숲의 이름이다. 소무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휘나라가 그곳엔 왜?” “양장림을 지나야만 갈 수 있는 작은 마을이 있지. 그곳으로 약탈을 떠났던 병사들이 닷새가 넘도록 귀환을 안 하더군. 그 뒤로도 정찰대가 양장림으로 진입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네. 들어가는 것만 봤다는 얘기일세.” “숲으로 들어간 자들은 있는데, 나온 자는 한 명도 없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양장림에 악귀(惡鬼)가 산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고 있네. 이러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자가 살왕 말고는 누가 있겠나.” 확실히 그럴듯한 정보였다. 태양 빛을 가득 머금고 하늘 높이 자란 대나무가 빼곡한 숲이다. 살수가 활동하기 더없이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아직도 거기 있을까?” “정황상 휘나라의 많은 병사가 마을 안에 고립된 것 같네. 이놈들이 장안으로 복귀하려면 양장림을 통과해야 하는데, 과연 살왕이 곱게 보내줄까?” “당분간은 그곳에서 움직임이 없겠군.” “분명한 일이지. 헌데 살왕은 왜 찾는 거지?” “포섭해보려고.” 허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미쳤군.” “미친 세상인데 나 또한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그만 가봐야겠군. 급료가 나오면 내가 술 한 잔 사지.” 허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그의 시선은 멀어져가는 소무의 등 뒤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허규의 입이 달싹이며 나직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부디 조심하시게. 하나뿐인 나의 막역지우(莫逆之友)를 잃고 싶지는 않으니…….” * * * 장양은 집무실에 앉아 수북이 쌓인 종이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군단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행정관이 보고하면, 그가 직접 일일이 검토를 하고 보완한다. 최근에는 더욱 숨 가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우선 개방의 정보를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귀중한 내용이었기에 쉽게 흘려넘기는 경우가 없었다. 군영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백성들의 지원 물품 처리문제도 있었다. 운명을 함께하는 백성들이 관군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했다. 병참으로 사용될 물자는 비축하고, 사치품은 전부 매각하여 소를 사들였다. 사들인 소는 모두 둔전에서 일하는 백성들에게 무료로 대여해주었다. 장양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풍족한 군량미의 확보였다. ‘첫 번째는 굶주리지 않는 것이다. 한중의 누구도 배고픔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싸울 수 있고, 버틸 수 있다.’ 마지막 남은 종이에 그가 서명할 찰나였다.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조그만 여자아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 양 아저씨 어디 갔어요?” 오전 훈련을 마치고 휴식시간에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소소였다. 장양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데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허. 우리 소소 왔구나.” 소소는 장기판을 끌어안은 채 연신 두리번거렸다. “휴……. 또 도망갔어!” 양연정은 장기에 푹 빠진 소소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가르쳐준 것이 자신이었으니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곧 있으면 올 텐데, 기다려보지 그러느냐.” 고민하던 소소는 장양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었다. 잠시 후 기다리기 지루해졌는지 의자 밑으로 늘어뜨린 다리를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비상 간식을 꺼내 들었다. 큼지막한 당근이었다. 당근을 반 토막 낸 소소는 하나를 장양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 이거 먹을래요?”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다. 업무의 늪에 빠져 식사도 잊은 것이었다. “허허. 마침 출출했는데 고맙구나.” 둘이 사이좋게 당근을 먹고 있는 사이, 집무실에 두 명의 손님이 찾아들었다. 집무실에 막 들어선 그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장양을 찾아온 이들은 소무와 일광이었다. 당황하는 그들을 향해 장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놔두시게. 적적한 것보다는 좋으니.” 소무는 일광을 슬쩍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오늘부터 거리로 나가 임무를 수행할 십부장입니다.” 마치 불곰을 세워놓은 것 같은 거대한 체구에, 위압감을 주는 얼굴. 게다가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까지. 외모상으로는 완벽했다. “체구를 보니 든든하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게. 병력 지원은 필요 없겠는가?” “괜찮습니다.” 일광은 최선을 다해 웃어 보였다. 험악한 인상이 미소를 지으니 더욱 흉악해 보였다. “허허. 확실히 최고의 적임자가 맞는 것 같군.” 칭찬을 받은 일광은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자신도 뭔가를 말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닷새 안에 해결하겠습니다.” 장양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군단 차원에서도 해결을 못 하던 골칫거리였다. 내심 일 년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닷새라니. “랑아대의 저력은 볼수록 놀랍군. 자네들이 나의 부하들이란 것이 정말 자랑스럽네.” 소무와 일광은 묵례를 해 보였다. 용무를 마친 그들은 몇 마디 말과 함께 작별을 고하고 나왔다. “할아버지, 내일 또 올게요.” 집무실을 나온 소소가 지면을 박차며 소무의 어깨 위로 뛰어 올라탔다. 탓-! “목말 태워 줘요.” “이미 타고 있으면서?” 이미 어깨 밑으로 소소의 작은 발이 내려와 있었다. 일광은 장양에게 칭찬받은 것이 뿌듯한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바로 출발할게.” “음. 닷새 후에 보지.” 일광은 경공까지 펼치며 금세 시야에서 멀어졌다. 일광과 헤어진 소무 부녀는 느릿한 걸음으로 막사로 향했다.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이렇게 함께 걷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길가에 자리한 모란꽃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다가오며 이들을 반겨주었다. “아버지! 내 이름이 왜 소소(笑笑)예요?” “음. 웃고, 또 웃으라고 지어준 이름이야. 그러니 소소는 웃는 일만 있어야지.” “히히. 그럼 아버지 이름은 왜 소무(笑舞)예요?” 소무는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비록 고아로 자랐지만,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한참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니, 자신도 누군가의 어깨 위에 올라타 같은 질문을 하는 장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소무의 눈이 어느새 서글픈 모양으로 변했다. “웃고, 춤추며 자라라고 지어진 이름이야.” “그럼 아버지도 웃고, 춤추면서 자랐어요?” 그러고 보니 살면서 웃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소소를 만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일상과 비극이 자신과 함께했다. 아이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응.” 지금 이 순간보다 행복했던 기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소소가 언제나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울 것이다. 이 미친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는 언제나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그것은 개인이 아닌 천하를 위한 숭고한 고뇌였다. 이제 겨우 목표를 향해 걸음을 막 뗀 상황이었다. 멈추지 않고 또 한 걸음을 움직여야 했다. “아버지도 어디 좀 가 봐야 해. 이틀 정도는 돌아오지 못할 수 있어.” 소소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다가 이내 밝게 웃으며 소리쳤다. “응, 알았어요!”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반응이 평소와는 달랐다. “이틀이나 못 보는데, 안 보고 싶어?” “괜찮아요.” 분명 뭔가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소무가 삐친 듯 대답을 안 하자, 소소가 그의 양쪽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엎드려 절 받는구나. 장군님 괴롭히지 말고, 잘 있어.” 어느덧 랑아대의 막사에 도착해서 소소를 내려놓았다. 이제 장안성 부근의 양장림으로 향해야 했다. 소소는 멀어져가는 소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돌연 막사로 뛰어 들어갔다. 이제 막 오후를 넘어선 시간이었다. 삼촌들은 모두 훈련장에 있었고, 막사 안은 텅 비어있었다. 소소는 옷을 훌러덩 벗으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개인 상자에서 한복을 꺼내 입었다. 저고리에 대롱대롱 달린 주머니도 열어, 그동안 모은 엽전과 간식 몇 개를 갈무리했다. 소소는 막사 밖을 나와서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군영의 정문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삼촌들이 있는 훈련소를 우회해서 말이다. 머지않아 출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병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잘 아는 얼굴들이었다. “헤헤. 안녕하세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병사들이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오늘 예쁘게 하고 나왔네.” “어디 가니?” “아버지 만나러 가요!” 병사들에게 있어서 랑아대의 대장은 자신들의 영웅이었다. 당연히 소소를 제지할 리가 없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잘 다녀오고.” “네. 안녕히 계세요~.” 손쉽게 군영을 빠져나온 소소는 한중의 거리로 향했다. 이전에 와봤던 곳이기에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길가에는 수많은 상점과 식당을 비롯한 온갖 점포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바쁘게 북적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소소는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선물부터…….’ 소무에게 줄 선물을 사러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나오니 뭘 사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시세가 얼마인지, 자신이 지닌 엽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한참을 방황하던 소소의 눈이 곧 근처의 한 노점에 고정되었다. 나무막대에 온갖 열매가 꽂혀있는 탕후루를 파는 상인이었다. 냉큼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 한 개 주세요!” 상인의 시선이 소소를 잠시 훑어보았다. 고려에서 수입되는 값비싼 한복 차림에 비단 저고리까지. 영락없는 어느 부호집의 딸처럼 보였다. 상인이 탕후루를 건네며 말했다. “두 냥이다.” 소소가 허리춤의 주머니를 열고, 두 냥을 꺼내었다. “여기요!” 아직도 엽전이 여덟 냥이 남아있었다. 소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탕후루를 선물할까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거리를 다시 활보하기 시작했다. “히히. 맛있어.” 난생처음으로 돈을 주고 사 먹은 간식이니 맛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가를 해냈다는 사실에 점점 마음이 들뜨며 신이 났다. 그때 소소에게 은밀히 접근하는 한 남성이 있었다. “꼬마야, 길을 잃어버렸니? 부모님은 어디 있어?” 천으로 만든 원형 모자를 눌러쓰고, 푸른색 장삼을 입은 사내였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요? 어디 가서 모레쯤 온대요.” “음. 그렇구나! 여긴 뭘 하러 왔니?” “아버지 선물 사러요.” 사내는 턱을 괴고는 고민하는 시늉으로 말했다. “흐음~. 아버지 선물인데 아무거나 사면 안 되지. 아저씨가 좋은 거 아는데, 따라올래? 세 냥이면 살 수 있어.” 소소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세 냥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