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불곰의 포효 (4)2022.03.13.
“맛있어?” “응, 언니.” 순식간에 국수 면발을 다 먹은 소소는 그릇을 움켜쥐고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붙잡혀있는 청아를 생각하자니 느긋하게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소, 소소 언니…….” 공포에 질린 목소리. 동시에 아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이상함을 느낀 소소가 고개를 돌려 보니, 복면을 쓴 십여 명의 장한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노점식당을 둘러싸며 퇴로를 막았다. 무공을 익힌 자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아버지에게 배워서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위기란 것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각오는 되어있겠지?” “감히 어르신을 불구로 만들었겠다.” 소소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검이 필요했다. 자신이 아는 근접 무공은 파산권의 일 초식과 약간의 소엽퇴법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 굴러다니는 검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소소는 아해의 앞을 가로막으며 양팔을 벌렸다. “오지 마요!” “놀고 있네.” 앞서 다가오던 복면인이 다짜고짜 주먹을 내뻗기 시작했다. 피하거나 반격한다면 등 뒤의 아해가 다치게 되는 상황이었다. 소소는 두 주먹을 얼굴 앞에 모으며 일광에게 배운 방어 동작을 취했다. 그러나 이어질 줄 알았던 손목의 고통은 없었다. 대신 뭔가를 움켜쥐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었다. 터업-! 어리둥절한 소소는 양팔을 내리며 상황을 살폈다. 자신의 얼굴보다 큰 손바닥이, 다가오던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모가지를 확 뽑아버릴라.” 어느새 자신들의 틈새에 끼어든 거구의 사내가 보였다. 흰색 장삼의 위로 선을 그리고 있는 다부진 근육. 산맥처럼 거대한 어깨를 지닌 일광이었다. 일광을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소소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흐엉……. 무서웠어…….” 그토록 강한 척을 했지만, 지금은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의지할 사람이 생기자 억지로 지탱해왔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눈 뜨고 잘 봐둬. 삼촌이 진짜 싸움이 뭔지 보여줄 테니.” 일광을 마주 보고 있는 복면인은 흠칫 놀라고 있었다. 흉악한 얼굴이 눈알을 부라리는 모습이 섬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 새끼는 뭐야?” 일광은 대답 대신 움켜쥐고 있는 상대의 손을 잡아당겼다. 끌려오는 상대의 턱 아래에서 그의 왼손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콰앙-! 비명조차 없었다. 턱뼈가 산산 조각나고, 목뼈가 뒤로 꺾여버린 복면인은 지면으로 고꾸라졌다. 단 한 방이었다. 복면인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하고, 본격적으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소소는 아해를 데리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복면인 중 하나가 일광의 옆구리를 향해 쏜살같이 공격을 개시했다. 뱀처럼 움직이며 각도를 트는 주먹은 타점을 예측하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일광은 방어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콰앙-! 공격이 적중했지만, 일광은 비명은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공격의 대가로, 복면인은 일광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일광의 얼굴이 우악스럽게 구겨지며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허공으로 떠오른 복면인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끄어억!” 복면인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일광은 하체를 낮추며 등 뒤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뒤에서 공격을 시도하던 또 다른 복면인은 그대로 적중당하고 말았다. 파산권 일 초식 일타격산(一打擊山). 쩌어엉-!!!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소소가 펼친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복면인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후방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일광의 좌우에서 발차기가 날아왔다. 콰직-! 콱-! 제대로 들어간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음 한마디 없이 얼굴을 더욱 구기고 있을 뿐이었다. 일광의 손등이 우측에 자리한 복면인의 얼굴을 강타했다. 콰직-! 복면이 찢겨나가며 이빨 몇 개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목이 돌아간 그는 단 한 방에 정신을 잃으며 무릎을 꿇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포위하던 복면인들은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춤하는 사이, 한 명이 일광에게 머리채를 붙잡히고 말았다. 어느새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상인들까지 노점을 내버려 둔 채 이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불어난 구경꾼의 숫자는 어느새 백 명을 넘어서 있었다. 달빛이 깔린 늦은 밤이었지만, 한중의 중심가에서 소란이 벌어지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군중들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복면을 쓴 괴한들. 그리고 하나둘씩 사라져갔던 아이들. 최근엔 젊은 여인들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고 있었다. 대부분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면서도 후환이 두려워 나서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복면인들이 도리어 공격당하는 모습이 못내 통쾌했던 것이다. 그때 군중들의 틈새에서 헤진 천 옷을 입은 중년 여성이 뛰쳐나왔다. 그녀는 다짜고짜 쓰러져있는 복면인을 붙잡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내 새끼 내놔! 내 새끼 어딨어!!!” 사라진 아이를 찾기 위해 매일 밤거리를 헤매던 여인이었다. 여인의 울부짖음에는 한이 맺혀있었다. 주변의 복면인들이 눈알을 부라렸지만,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새끼 내놔, 이놈들아! 끄흐흑…….” 오열하는 여인은 복면인을 붙잡고 마구 흔들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이 어찌 다르겠는가. 군중들이 모이면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저마다 한 소리씩 내뱉기 시작했다. “이, 이 쓰레기 같은 놈들아!” “이런 천벌을 받을 놈들!” 어떤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눈치챈 일광의 두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그는 조금 전에 붙잡은 복면인의 머리채를 꽉 쥐고서 거리의 중심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그를 포위하던 나머지 복면인들도 주춤하며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거리의 중심에 선 일광은 놈의 머리를 올리고 복면을 벗겨냈다. 턱에서부터 목선을 타고 내려오는 뱀의 문신(文身)이 보였다. “나 백양현의 일광이야! 나도 왈패로 살아왔지만,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잖아! 이 개X끼들아!” 무지막지한 일광의 주먹이 상대의 얼굴을 강타했다. 콰앙-! 단 한 방에 상대의 코뼈가 부러지며, 얼굴이 피범벅으로 변했다. 그의 두 눈은 단번에 풀려버렸다. “왈패들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있는 거야!” 일광의 주먹이 다시 한번 움직이며 상대의 얼굴을 후려쳤다. 콰앙-! 이미 숨이 끊어진 듯했지만, 일광의 주먹은 멈추지 않고 계속 쑤셔박혔다. 콰앙-! 콰앙-! 콰앙-! 그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구경꾼들은 하나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당사자인 복면인들은 더욱 심한 공포에 젖어서, 품속에서 저마다 날카로운 무기를 꺼내어 들었다. 한중의 시장에서 무기를 사용하면 관군의 체포 대상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일광은 축 늘어진 남자를 놓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우드득-! 움켜쥐는 두 주먹의 마디마디에서 뿜어진 소리였다. 흉악한 얼굴 속에 분노가 서린 찢어진 두 눈.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한순간 일광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전광석화같이 쏘아져 나가는 그의 움직임은 어설픈 무공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광이 전력을 다한 순간부터는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응징이었다. 복면인들은 팔다리가 꺾이고 전신의 이곳저곳이 함몰된 채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처절한 비명이 한중의 거리를 뒤흔들었다. 잠시 후, 두 발로 서 있는 복면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일광이 일부러 남겨둔 것이었다. 그때였다.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군중들이 좌우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십여 명의 관군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들을 가장 반긴 것은 복면인이었다. “이, 이놈이 사람을 죽였소! 나 좀 도와주시오!”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복면을 쓰고 흉기를 든 채로 도와달라니. 일광이 관군을 향해 두 눈을 부라렸다. “아무도 나서지 마.” 그 말을 들은 관군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것은 복면인이었다. “왜 도와주지 않는 것이오!?”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관군의 반응들. “누굴 도와?” “네놈이 나쁜 놈 같은데?” 황당한 눈빛을 하던 복면인은 곧 일광에게 머리채를 붙잡혔다. “죽을 때까지 처맞기 싫으면 애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확실했다. 자신이 안내하지 않으면 그의 말이 곧 현실이 될 것을. 복면인은 개 끌려가듯이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수백 명의 군중들이 뒤따랐다. 상인들까지 장사를 포기하고 대열에 합류할 정도였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구경꾼의 숫자는 지금도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그때 소소가 아해를 등에 업고는 관군에게 소리쳤다. “삼촌들, 조금 이따가 올게요! 놓고 온 게 있어요!” 그러더니 휙 몸을 돌려 내달리는 것이 아닌가. 관군의 정체는 사라진 소소를 찾기 위해 거리를 뒤지고 다녔던 랑아대였다. 썰렁해진 거리에 외롭게 남겨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찮겠지?” “안 괜찮을 것 같아. 일광 형님이 저렇게 화난 거 처음 보는데.” “아무튼, 거리에서 일광 형님 마주치면 못 본 척하라고 했으니까 돌아가자고.” “쩝. 우리 소소 무사한 것은 확인했으니 되었지 뭐.” 그때였다. 멀어졌던 소소가 다시 방향을 돌려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청해 삼촌, 잠시 검 좀 빌려줘요!” “어? 어……. 근데 등 뒤에 꼬마는 친구니?” “동생이에요. 아해!” 얼떨결에 자신의 검을 넘겨준 청해는 멀어져가는 소소를 멍하니 바라봤다. “조심히 잘 다녀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나 무기까지 챙긴 아이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청해가 소소를 은밀히 뒤따랐다. * * * 소소는 자신이 갇혀있었던 전각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왼손으로는 등 뒤로 업은 아해의 엉덩이를 받치고, 오른손은 청해의 검을 움켜쥔 채였다. 청해의 검은 자신의 검보다 묵직하고 손에 감기지 않아 불편했지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일광 삼촌이 향하는 곳은 청아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납치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청아는 자신이 구해야 했다. 지금이야말로 망설임 없이 무공을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소무가 말했던 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아해야, 집에 가구 싶어?” “싫어, 언니랑 같이 갈래!” 아해의 말에 소소는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히히. 빨리 청아 구하러 가자!” 수중에 검이 들어온 순간부터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미 길은 알고 있었다. 경공을 펼치면 반 각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잠시 후 낯익은 허름한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한차례 소란이 있었던 때문일까? 십여 명의 사내가 전각의 주위에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도 하나씩 들려 있었다. “나쁜 아저씨들!”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많아야 일곱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마가 좀 더 작은 아이를 업고 내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황당함에서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이가 움켜쥔 검에서 유백색의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거, 검기?” 소소의 눈이 빠르게 움직이며 조직원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이었다. 소소는 검기를 다시 소멸시키고는 검을 비틀었다. 검면으로 때리기 위해서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소소의 신형이 날다람쥐처럼 그들의 사이를 휘저었다.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기 시작했다. 뻐억-! 뻐버벅-! 빠악-!! “크으윽!” “끄아악!” “크헉!” 어느새 소소는 전각의 입구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등 뒤에서 조직원들의 신음이 계속 들려왔다. “뒤에 보지 마, 아해야.” “응!” 소소는 문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양손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작은 발이 전각의 문을 때렸다. 콰앙-! 전각의 내부에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살찐 돼지 하나가 앉아있었다. 소소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당황한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 “왜, 왜 또 왔어?” 소소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때 조금 전 일광 삼촌이 복면인한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기 싫으면 문 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