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불곰의 포효 (5)2022.03.14.
쿠웅-! 살찐 돼지가 기절하며 쓰러지는 소리였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찢어진 붕대 사이로 얼굴이 퉁퉁 불어터져 있었다. 자신이 지하로 내려간 사이 그가 문을 닫을 수가 있어서,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아해를 업은 소소는 계단을 향해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 외롭게 떨고 있을 청아의 모습을 상상하니 갑자기 다급해진 것이다. 이곳에서 혼자 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청아야!” “청아야, 어딨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드디어 청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홀로 외롭게 지하의 고분을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은 퉁퉁 불어 있었으며, 얼굴까지 핼쑥해 보였다. 소소와 아해를 확인한 청아는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자 소소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앙……. 무서웠어?” “흐흑……. 소소 언니…….” 세 명의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감정의 표현에 솔직하다. 무서운 곳에서 고통과 슬픔, 그리고 기쁨을 함께하였으니 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훌쩍대고 나서 진정이 되자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졌다. 다시는 들어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나갈까?” “응!” 셋은 손을 잡고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던 중, 청아와 아해가 안달 난 얼굴로 말했다. “빨리 엄마 보고 싶어!” “나두!” 그러고 보니 소소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기억이 없으니 그리움도 없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자신만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쓸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소소가 말이 없자 청아가 물었다. “언니는 엄마 안 보고 싶어?” “응, 나는 엄마 없어. 히히. 나중에 아버지한테 선물해달라고 해야지.” 소소는 애써 웃으며 힘있게 발을 옮겼다. 더는 이 아이들을 막아서는 자들이 없었다. 한 명의 사내로 인해 한중의 암흑가가 들썩이며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이곳에 신경 쓸 만한 여력 따위가 없는 상황이었다. * * * 표국(鏢局). 사례금을 받고 물품을 안전하게 호송해주는 역할을 하는 세력이다. 가격만 맞으면 육로든 수로든, 어디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호송한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한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곳은 원강표국(原强鏢局)이다. 천여 평에 이르는 지부의 둘레로는 낮은 담벼락이 둘러싸고 있었다. 담벼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백성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저 새끼들이 지금껏 납치해온 사람들을 호송했던 거야!?” “어, 어머 어떡해…….” “한중에 이런 쓰레기들이 얼마나 더 있는 거야?” 이곳은 군중들이 일광을 뒤따르며 다섯 번째로 방문한 장소였다. 지금 장원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야수가 포효하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두 손을 타고 진득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순백처럼 깨끗했던 장삼은 혈의(血衣)로 변했으며, 찢어진 의복 사이로는 베어진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글거리는 일광의 눈동자가 주위를 살폈다. 이십여 명의 표사가 흉측해진 몰골로 바닥을 뒹굴고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많은 숫자가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반적인 왈패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도적들로부터 호송 물품을 지키기 위해 오랜 기간 검술을 연마한 자들이다. 일류고수들도 제법 되기에, 어지간한 무림의 문파도 쉽게 대하지 못하는 세력이었다. 무엇보다 합격진이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포위 속에 갇힌 그의 눈빛에 두려움이란 없었다. 일광은 두 주먹을 눈높이까지 치켜들고 있었다. 표사들이 공격해오지 않자 오른손을 까닥이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상대들을 도발하는 것이다. 그때였다. 그의 좌측에서 한 명의 표사가 선공을 개시하며 검을 내질러왔다. 반사적으로 일광의 상체가 우측으로 비틀어졌다. 검날이 어깨를 스치고 가는 순간, 그의 주먹은 상대의 턱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고 있었다. 파산권 이 초식 맹룡산격(猛龍山擊). 사나운 용이 산을 때린다는 초식이다. 쩌어엉-! 턱뼈가 산산 조각난 표사는 전신에 힘이 빠지며 고꾸라졌다. 그자가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일광은 재빨리 상체를 뒤로 젖혔다. 자신의 가슴을 스치며 지나가는 검날이 보인다. 그리고 검날을 움켜쥐고 있는 손목까지. 일광은 왼손으로 표사의 손목을 붙잡고는 오른손으로 목을 틀어쥐었다. “컥!” 그 순간 일광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움켜쥔 목을 하늘 높이 치켜세우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아 버렸다. 콰아앙-! 등뼈가 산산조각 난 건지, 쓰러진 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검날이 스쳐 지나가며 일광의 등 근육을 베고 지나갔다. 촤아악-! 등줄기에서 화끈거리는 통증과 핏물이 흘러내리는 따듯한 감촉이 느껴진다. 그러나 입에서는 조금의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단지 등을 돌려 그의 복부에 주먹을 내지를 뿐이었다. 쩌억-! “끄헉!” 허리를 새우처럼 구부리며 앞으로 내민 얼굴에, 통나무 같은 무릎이 쑤셔박혔다. 콰앙-! 그때 좌우에서 두 자루의 검날이 등장하며 일광의 허벅지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촤악-! 촥-! 공격을 반쯤 성공시켰지만, 상대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틈새로 더욱 깊게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일광은 자신을 공격하고 지나가는 표사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닭 모가지를 잡듯이 말이다. 엄청난 악력에 표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크, 크윽! 도와줘!” 우측에서 누군가 내지른 검이 다가오자, 일광은 손아귀에 움켜쥔 표사를 그쪽으로 밀어 넣었다. 푸욱-! “끄으윽!” 아군을 죽인 표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친분이 깊은 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그는 제때 검을 회수하지 못했고, 그 얼굴로 커다란 주먹이 다가갔다. 쩌어엉-! 집채 같은 주먹에 적중당한다면 그 누구든 한 방이었다. 표사들의 눈동자에 공포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표행을 다녔고, 무수히 많은 도적과 싸웠다. 그러나 어떤 순간도 지금만큼 두려운 적이 없었다. 이렇게 무식하게 싸우는 자는 본 적은커녕,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베어도 꿈쩍조차 하지 않으니 기가 질린 것이다. “저, 정체가 뭐냐?” “사, 사람이 맞느냐?” 눈앞의 사내가 강시인지 사람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표사의 숫자가 줄어들자 진법의 위력이 감소한 것이다. 전세가 기우는 순간이었다. 일광은 대답 대신 표사들의 사이를 쏜살같이 파고 들어갔다. 그의 어깨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표사들의 얼굴에 거대한 주먹이 망치처럼 쑤셔박혔다. 콰앙-! 콰앙-! 쾅-! 동료들의 얼굴이 한 명씩 함몰되고 있다. 가공스러운 광경에 표사들은 몸이 얼어붙고야 말았다. 진법은 한순간에 와해되어 버렸다. “사, 살려줘…….” 급기야 싸우기를 포기하고 물러서는 자들도 있었지만, 일광의 주먹에 자비란 없었다. 반격해오는 자는 팔다리를 꺾고 목을 분질렀다. 반항을 포기한 자들은 급소에 주먹을 꽂아 단번에 즉사시켜버렸다. 처절한 비명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멈출 무렵. 일광의 주변에는 오십 구가 넘는 처참한 시신들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드넓은 장원에 서늘한 한기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담벼락에서 구경하던 군중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심신이 약한 자들은 애초부터 고개를 돌리거나,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거대한 사내의 발걸음이 한 발자국씩 움직이며 나아갔다. 아직 한 명이 남아있었다. 원강표국의 총표두이자 국주인 혁리문이었다. 그는 검 한 자루를 움켜쥔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회환, 후회, 분노 등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일광의 입이 처음으로 달싹였다. “누구한테 의뢰를 받았는지 말하면 편하게 죽을 수 있다. 주둥이를 닫는다면 개처럼 때려죽이겠다.” “알지 않는가. 표국은 죽더라도 의뢰자를 발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임을.” “요즘엔 인신매매도 표행이라 부르나 보군. 그럼 처맞아야지.” 일광의 험악한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때 혁리문의 검에서 빛줄기가 솟아나며 검날을 감쌌다. 일광의 두 주먹에도 밝은 빛무리가 발현되며 빛나기 시작했다. 검기와 동급의 경지인 권기(拳氣)였다. 이미 서로의 수준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선공은 일광이 먼저 개시했다. 상체를 낮춘 채 재빠르게 파고드는 그의 몸놀림은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충분했다. 검기와 권기가 부딪치며 거센 굉음이 뿜어져 나왔다. 콰앙-! 파고들려는 일광과 저지하려는 혁리문. 일광은 처음부터 맹공을 퍼부으며 그를 몰아붙였다. 시간을 오래 끌수록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한 호흡에 십여 차례나 주먹을 내지르는 무지막지함에, 상대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일광은 한참 전부터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이것은 처음부터 혁리문이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표사들이 모두 죽었지만, 그럼으로써 자신이 기회를 잡을 수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광의 움직임은 조금씩 느려졌고, 권기는 희미해졌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며 혁리문이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뒷걸음질하던 일광의 권기가 기어코 소멸해 버렸다. 기를 발출할 수 없다면 검기를 막아낼 수도 없다. 이제는 피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체를 비틀며 뒷걸음질하는 그의 주변으로 검기가 사정없이 요동쳤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계속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어코 일광의 왼쪽 복부에 검이 틀어박혔다. 푸욱-! 혁리문의 얼굴에 회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상대가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상대의 수법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지금 상황은 상대가 유도한 것임이 확실했다. 악력이 어찌나 센지, 손을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혁리문은 자유로운 왼손을 이용해 일광의 얼굴을 후려쳤다. 콰앙-! 내력이 담긴 주먹이었다. 상대의 입술과 코에선 핏물이 흘러내렸지만, 오히려 웃는 것 같았다. 이번엔 일광의 차례였다. 우악스럽게 움켜쥔 그의 주먹이 바람을 찢으며, 혁리문의 인중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냥 휘두르는 주먹이 아니었다. 붉은 기류가 그의 주먹을 감싸고 있었다. 파산권 삼 초식 일타섬격(一打閃激). 이 주먹에는 일광에게 남은 모든 내력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혁리문의 동공에 공포가 떠올랐다. 쩌어엉-!!! 결과는 너무나 처참했다. 혁리문은 단 한 방에 아래턱이 날아가고 다리가 풀려버렸다. 그러나 쓰러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멱살을 움켜쥔 일광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해서 강타했다. 콰앙-! 콰앙-! 콰앙-! 공격은 멈추지 않고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악행에 대한 죗값을 충분히 치렀다고 판단될 때까지 말이다. 풀썩-! 쓰러진 그를 뒤로한 채 신형을 곧추세우던 일광은 걸음을 휘청거렸다. 그러나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는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푸욱-! 복부에 틀어박힌 검을 뽑아내는 소리였다. 상처 부근의 혈도를 짚어 간단하게 지혈한 뒤, 그의 발걸음은 이 층 구조로 만들어진 표국의 전각을 향했다. 비틀거리며 터벅터벅 걷는 일광의 뒷모습에는 비장함이 보였다. 담벼락에서 지켜보던 군중들은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 누구도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 뒤로 한 식경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전각으로 들어간 사내가 다시 나올 때까지 모두가 숨죽인 채 기다렸다. 한 식경이 더 지난 후. 전각의 입구에서 사내가 쩔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힘겹게 걷는 그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사내의 뒤로 향했다. 그곳에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십여 명의 젊은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백여 명의 군중이 동시에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실종된 자들의 가족이었다. 미친 듯이 내달려 가족을 찾은 그들은 저마다 부둥켜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아까 길거리에서 오열했던 중년의 여성도 있었다. 담벼락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군중은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때였다. 쿠웅-! 어디선가 들려온 둔탁한 소음. 일광의 무릎이 지면에 닿는 소리였다. 지금껏 신음 한 번 안 뱉었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한계를 뛰어넘는 피해가 누적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쓰러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아직 더 구해야 할 아이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력으로 버틴다고 한들, 더는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상체는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져갔다. 그 순간 군중 중 누군가가 소리치며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대, 대협이 쓰러진다!” “대협을 구해야 해!” 약속이나 한 듯 수백 명의 군중들이 하나둘씩 담벼락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일광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빠, 빨리!” “하나씩 잡고 들어봐!” 거대한 일광의 몸체는 결코 한두 명이 들어 올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려 십여 명이 달라붙어서야 안정적으로 들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 이 중에 의원님이 있습니까?” 그때 인파들의 틈에서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 알고 준비해왔는지, 등 뒤에 의료상자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의료상자의 모퉁이에 관군의 표식이 있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