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한중의 수호자들 (1)2022.03.15.
양장림(陽長林). 대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숲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양기를 듬뿍 먹은 대나무들은 그 높이가 십여 장까지 이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장엄한 경관을 보기 위해 찾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인적이 뚝 끊긴 상황이었다. 이곳에 악귀가 산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 유령의 숲을 병사 한 명이 태연히 진입하고 있었다. 휘나라의 소유가 된 장안성의 관할 구역이지만, 이 병사는 놀랍게도 송나라의 병사였다. 칠흑처럼 검은 흑갑(黑鉀). 게다가 붉은 술이 달린 투구까지. 한중의 영웅들인 랑아대의 복장이었다. 양장림에 진입한 순간부터 소무는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예민한 후각으로 시체 썩는 냄새가 스멀스멀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이십 장 밖의 전면으로 향했다. 살해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휘나라의 병사가 보였다. ‘확실히 누군가 있군.’ 다가가 시신에 남겨진 흔적을 살펴보았다. 목덜미에 자리한 한 줄기 검흔(劍痕). 방어조차 제대로 못 하고 일격에 죽었다. 살수의 솜씨가 분명했다. 시신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깊게 들어갈수록 더욱 많은 병사가 보였다. 눈으로 확인한 것만 오십여 구. 이 양장림에는 최소한 천 구 이상의 시신이 널려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소무는 은연중 자신의 기운을 외부로 흘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랑아대의 군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상대가 우호적으로 나올 리 없었다. 그리고 반응은 의외로 빨리 왔다. 묵묵히 걷던 소무의 미간이 좁혀졌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퉁겨지듯 지면에서 솟구쳐 올랐다. 써컥-! 발아래에서 밝은 빛무리가 번뜩이며 이내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던 두 그루의 대나무가 깨끗이 잘려 넘어갔다. 기습은 피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도약하는 자신의 아래에서 한줄기 빛살이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무의 검이 움직이며 아래로 강기를 뿜어냈다. 초승달 모양을 한 푸른 빛무리가 발밑에서 무언가와 충돌을 일으켰다. 콰앙-! 퉁겨 오른 소무는 한 발로 대나무의 머리를 밟고 우뚝 섰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자신의 몸놀림에 조금 놀란 것일까? 공격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지상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섬뜩한 빛줄기가 물결이 퍼지듯 번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수십 그루의 대나무가 동시에 베어졌다. 써컥-! 소무의 신형이 쓰러지는 대나무에서 도약하여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른 곳으로 옮겨 타도 되었지만, 그는 도망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지면을 밟은 그는 검을 사선으로 내리깔며 주위를 살폈다. “제법이군.” 짐작대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한 호흡이 지난 후,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잔상을 볼 수 있었다. 벼락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소무의 검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곡선을 그렸다. 까앙-! 검강을 발현시킨 일격이었다. 그것이 막혔다면 상대도 검강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을 뜻한다. 살왕(殺王)이 분명했다. 그의 공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잔상이 나타나며 소무의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유령 같은 움직임이었다. 돌풍 안에 갇힌 소무는 사방으로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카카캉-! 카캉-! 날카로운 소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며 양장림을 진동시켰다. 돌풍 속에 검강이 부딪치며 번쩍거리는 모습은 흡사 뇌우(雷雨)와도 같아 보였다. 검성과 살왕의 싸움. 그야말로 세기의 대결이었다. 이 싸움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가져다 바칠 무림인이 줄을 설 것이다. 어느 순간 뇌우가 단번에 소멸하며, 소무의 모습이 드러났다. 수십 합을 겨루었지만 소무는 아직 상대의 모습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화산에서 만났던 특급살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최상급 화경. 게다가 천부적인 살수의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소무는 차분히 검 끝을 내리깔며 공격을 기다렸다. 목적은 살왕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극강의 살상무공인 탈혼검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초식을 펼치지 않고 살왕을 굴복시켜야 한다. “오너라.” 소무는 상대가 당황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아마도 자신의 공격이 이렇게 쉽게 막힌 적은 처음이었으리라. 역시나 살왕은 쉽게 공격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그의 귓가로 소무의 도발이 다시 이어졌다. “나한테 잔재주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전력을 다하여라.” 그때였다. 돌연 소무의 발아래에서 희뿌연 연무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연막 따위의 어설픈 소품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퍼져나가는가 싶더니, 연무는 어느새 십여 장에 걸쳐 깔려있었다. 이 기괴한 현상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꽃냄새가 진동하는 짙은 안개. 살문의 절학 중 하나인 만화살무(萬花殺霧)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희뿌연 안개 속에서 한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소무의 검도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그것을 거둬냈다. 까앙-! 한 호흡이 지난 후 또다시 섬광이 번뜩였지만, 이번에는 단발이 아니었다. 첫 번째 섬광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빛무리가 나타나며 사선을 그렸다. 소무도 지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맞섰다. 카캉-! 곧이어 연달아 번뜩이는 섬광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폭풍우 속에서 뇌전(雷電)이 번뜩이는 듯했다. 카카캉-! 카카캉-! 검강이 부딪치는 소리가 양장림을 뒤흔들었다. 연무 속에 갇힌 소무의 움직임은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한 호흡에 수십 번이나 검을 휘두르는 그의 속도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동작이었다. 곧이어 그의 신형이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내며 환영을 일으켰다. 만화살무의 위력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이었다. 콰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연무가 단번에 사그라졌다. 동시에 살왕이 모습을 드러내며 한 걸음을 물러섰다. 처음으로 그의 모습을 확인한 소무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의를 입고 있었지만, 복면은 하지 않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에 제법 남자다운 얼굴이었다. “최연소의 나이로 살왕의 자리에 올랐다더니, 젊은 친구가 재능이 대단하군.” 살왕은 손에 쥔 태도를 어깨 위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살문의 만화살무를 최초로 막아냈으니 인정해주겠소. 절초도 한번 막아보시오.” 소무도 살문의 절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추혈살무(推血殺舞). 살문의 역대 문주에게만 일인 전승으로 내려오는 비전절학. 소무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오른손에 쥔 검을 전면으로 내뻗고 왼손으로는 뒷짐을 지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실수가 발생한다면 죽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살왕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감히 한 손으로 추혈살무를 막아보겠다니. 기수식을 마친 살왕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와 함께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는 태도의 끝자락. 가히 섬전과도 같은 속도였다. 푸슉-! 소무의 고개가 흔들리며 한 치 차이로 비껴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신을 향해 다섯 번의 공격이 동시에 짓쳐들어왔다. 그의 공격은 순간적으로 현경(玄境)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다 쳐내는 소무의 반응 속도에 살왕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곧이어 소무와 살왕의 신형이 뒤섞이며, 금속성이 연달아 뿜어져 나왔다. 카앙-! 캉-! 캉-! 캉-! 살왕은 한 호흡에 수십 번씩 난도질하며 죽음의 춤을 추고 있었다. 소무도 지지 않고 함께 검무(劍舞)를 추며 굳건히 맞섰다. 이들이 자리한 주변의 공간이 밝은 빛을 발하며,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급해진 것은 살왕이었다. 추혈살무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진기를 폭발시켜, 한계를 초월한 움직임을 내는 무공이다. 공격이 끝나면 탈진할 수밖에 없는 양날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추혈살무가 이렇게 막히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조롱하듯이 한 손으로 방어만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겨우 마지막 동작이 남았을 뿐이었다. 잠시 후,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태도가 소무의 목젖을 향해 파고들었다. 소무도 이것이 마지막 동작임을 직감했다. 그의 신형이 한 줄기 섬광과 함께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검성의 경신법인 섬전비영보(閃電飛影步)였다. 살왕의 허리에 완벽한 허점이 나타났다. 이를 본 소무가 손목을 비틀자, 검면이 모습을 드러내며 울음을 토해냈다. 찌잉-! 동시에 검면은 살왕의 허리를 향해 쏜살같이 다가가 사정없이 후려쳤다. 콰직-! “크윽!”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강타했음에도 충격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틀거리는 살왕의 목젖에 어느새 소무의 검이 겨눠져 있었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군.” 살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이시오.” “왜?” 살왕의 고개가 살짝 갸우뚱했다. “휘나라 사람이지 않소. 조롱하지 말고 죽이시오.” “나는 송나라의 일개 병사일 뿐이다. 먼저 공격한 것은 내가 아닌 네놈이었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송나라의 병사가 왜 장안성의 코앞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가. 그러고 보니 휘나라의 갑옷과는 모양이 달랐다. 예전에 보았던 송나라 관군의 복장과도 달랐지만, 투구에는 송나라를 상징하는 붉은 술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휘나라 소속이 아니라 해도, 일개 병사가 이렇게 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짜 정체가 무엇이오?” 소무는 검을 거두고는 허리춤에 넣었다. “지금은 장양 장군 휘하의 랑아대를 이끌고 있지. 한때 무림에 있긴 했지만.” 한때 무림에 있었다면 대상은 한정적이다. 현 강호에서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떠오르는 자가 한 명이 있었다. “검성(劍聖)……?” “그렇게 불렸던 기억이 나긴 하는군.” 살왕의 표정이 한층 나아졌다. 상대가 검성이라면 치욕스러운 패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 당신 같은 분이 관군에…….” 살왕의 의문에, 소무는 진지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싸우는 병사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가?” 살왕은 한동안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기준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소무가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물체 하나가 그의 앞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얼떨결에 부여잡은 살왕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엽전 한 냥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청부 의뢰는 받을 수 있지?” 무림 제일고수로 인정받는 검성이 자신에게 의뢰를 맡긴다. 그것도 엽전 한 냥으로 말이다. 사실 소무는 이번 달의 급료가 나오지 않아 돈이 없는 상황이었다. 엽전 한 냥은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딸에게 선물을 사주느라 전부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살문은 이미 멸문했소.” “듣기로 살문은 죽을죄가 없는 자는 청부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필요악이겠지. 의뢰를 받는다면 내가 살문의 재건을 도와주겠다.” 검성이 힘을 실어준다면 살문의 재건에 탄력을 받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보다 당장 더 중요한 사안이 있었다. “그 전에 나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소.”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소무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혼자서 휘나라를 상대로 몸부림친다고 해결될 일인가? 뭐, 흠집 정도는 낼 수 있겠군. 의뢰를 받는다면 확실한 살문의 복수를 약속하지.” 살왕은 의뢰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뢰가 무엇이오?” “장양 장군을 해하려는 자들에 대한 청부를 의뢰한다.” 자신보고 호위무사가 되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 의뢰였다. 검성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이가 없었지만 궁금함은 더해갔다. “어떤 인물이오?” “세상을 바꾸려는 자. 그중에는 휘나라의 파멸도 포함되어 있지. 물론 살왕이 도와야만 가능한 일이고.” 왠지 모르게 그자에 관해서 확인하고 싶어졌다. 어떤 인물이기에 검성이 그토록 지키려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섣불리 수락할 수도 없는 일. “어떤 자인지 내가 직접 지켜보고 판단하겠소.” 소무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머금다. “물론 그래야겠지.” “혹여 수락하더라도, 오직 의뢰를 맡긴 일에 대해서만 움직이겠소. 그 외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서지 않을 것이오.” “그것이 살문의 규칙이라면.” 소무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이제 살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는 오로지 장양 장군에게 달린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