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한중의 수호자들 (2)2022.03.16.
온몸이 분쇄되어버릴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눈을 뜸과 동시에 느낀 것은 전신의 근육이 찢어진 듯한 통증이었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사지가 멀쩡하다는 것이다. 일광은 천천히 좌우를 훑어봤다. 자신은 어딘가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이를 악다물고는 자리에서 일어서기 위해 시도했다. “끄으윽…….”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도 다른 곳에 아이들이 더 잡혀있을지 모른다. 오직 이 생각만이 일광의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일광이 간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토해냈다. 붕대가 감겨 있는 왼쪽 복부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 쩔뚝거리는 걸음으로 문 앞으로 나아갔다. 어찌 된 일인지 살짝 벌어진 문틈으로 관군의 패가 걸려있었다. 출입금지(出入禁止)라는 문구와 함께 말이다. 끼이익-! 문을 열자 밝은 햇살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가늘게 뜬 시야로 낯익은 장원이 들어왔다. 이곳이 어딘가 했더니, 자신이 쓰러졌던 원강표국이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했다. 장원의 앞마당을 수백 명의 인파가 메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상당수 보였다. 일광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쩔뚝거리는 걸음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짙은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군중들이 환호성을 토해냈다. 그 내용은 일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대, 대협이 나오셨다!” “무, 무사하셨어!” 주민들이 일광에게 동시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일광은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대협!” “아저씨, 고맙습니다!” “끄흑……. 제 아이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이 구해준 어린아이들도 몇 명이 보였다. 몇몇은 감정에 겨워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며칠째 아침부터 나와서 기다렸던 것이었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이 언제 이런 환대를 받아보았단 말인가. 그리고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졌다. 일광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벼, 별말씀을…….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이만 가보겠소.” 일광은 쩔뚝거리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장원의 한쪽 구석에서는 어두운 얼굴을 한 인파가 보였다. 아직도 가족을 구해내지 못한 자들이 상당수 되는 듯했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 입은 자에게 차마 도와달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의 심정을 모를 일광이 아니었다. “아직 한중에 남아있다면 반드시 구해보겠소.” 일광의 한마디는 이들에게 뜨거운 힘이 되었다. 저마다 눈물을 쏟아내며 그를 응원했다. “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군중들을 뒤로한 채 일광은 원강표국 밖으로 나왔다. 다시 점조직의 흔적을 찾아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수십여 명이나 되는 장한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눈에 보아도 한가락씩 해 보이는 왈패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반응이 뭔가 좀 이상했다.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형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일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인신매매 집단하곤 상종 안 해. 닥치고 이빨이나 악물어.” 주먹을 움켜쥐자 왈패들이 손사래를 치며 재빨리 말했다. “오, 오해입니다!” “저, 저희는 아닙니다!” 일광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어느 곳이나 반대세력은 있는 법이다. 이들은 정체불명의 점조직에 밀려나 숨죽이고 있던 패거리들 같아 보였다. “확실해?” 이들의 두목쯤으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저희가 바로 이곳의 토착 왈패들이었습니다. 단지 보호세나 조금 받으면서 연명해 왔습니다.” “아는 대로 계속 불어봐.” “형님께서 박살 낸 놈들은 학맹(鶴盟)이란 단체입니다. 장진상이란 대부호가 맹주입니다. 돈으로 한중의 조직들을 포섭하고, 원강표국까지 끌어들여 대대적인 인신매매 사업을 벌여왔었습니다.” “근데 왜 너희는 포섭당하지 않았지?” “아무리 왈패라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우리 세계에는 선을 넘지 말아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일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당연히 선을 넘으면 처맞아야지.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안내해. 오늘 안에 다 때려 죽여야겠으니.” “저, 저 그게…….” “왜?” “오늘 학맹의 남은 조직원들이 모두 자수했습니다. 형님이 혼자서 원강표국을 작살 낸 것을 보고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장진상은?” “남은 조직원들을 이끌고 간 사람이 바로 장진상입니다. 장군을 만나야겠다고 군영으로 갔습니다. 지금쯤이면 그곳에 도착했을 겁니다.” 왈패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대부호인 장진상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경험으로 볼 때, 계산적이고 치밀한 장사치들은 쉽게 항복하는 자들이 아니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그놈이 왜 장군님을 만나?” “그자의 조카가 추밀원사입니다. 공공연히 다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 애들이 알아보니, 형님을 체포하라고 항의를 하겠답니다.” 추밀원사 장준. 송나라의 사대 장군 중 하나이며, 종이품의 계급을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자다. 일광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어찌 된 일인지 군영으로 가서 알아봐야 했다. “저희는 어찌할까요?” “일단 군영에 좀 갔다 올 테니, 돌아올 때까지 남은 왈패들을 모두 통합시켜 놔. 거절하는 놈들은 내가 찾아간다고 해.” “예, 형님!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일광이 사라지자 왈패들의 두목이 부하들을 모았다. “일단 형님부터 살리는 것이 우선이다. 지금부터 모두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부하들을 향해 무엇인가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 * * 한중의 대부호 장진상. 화려한 청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백여 명의 왈패들을 이끌고 군영에 찾아들었다. 최근에 다리병신이 되었는지 목발을 짚고 쩔뚝거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심술이 가득했다. 그가 하위기관인 관청으로 향하지 않고 직접 장군을 찾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늘어서 있는 그들의 주위로 오백여 명의 병사들이 둘러쌌다. 그중에는 랑아대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때 청색 장포의 노인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당장 장군을 불러와!” 무례한 광경에 병사들이 손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누군가가 명령만 내려준다면 당장에 뛰쳐나가 참수할 기세였다. 잠시 후 장양 장군이 모습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피우느냐!” “나 장진상이오!” 장진상은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자신에게는 추밀원사라는 강력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양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그러나 장양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한 번 더 입을 놀리면 죄를 물어 엄히 다스리겠다!” 뭔가가 이상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생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조금 당황했다. 일단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왈패 한 놈이 거리에서 수없이 많은 살인을 저질렀소. 관군은 왜 그자를 체포하지 않는 것이오?” 장양은 그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의 내막도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군영으로 찾아올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미 조사하고 있으니 돌아가라! 네놈이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니다!” 장진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조사하고 있다고 했소? 관군이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을 본 자들이 여기 여러 명 있소!” 장진상이 뒤를 돌아보자, 기립하고 있던 하수인들이 호응하며 소리쳤다. “분명히 살인 장면을 보고도 관군이 그냥 지나쳤소!” “오히려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한패거리가 분명합니다!” 장양이 잠시 머뭇거리자 장진상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원강표국의 식솔까지 모두 체포하고, 살인범이 거기서 치료받도록 눈감아준 걸 모를 줄 아시오? 내 이번 사건을 황실에 고하여 장군의 횡포를 알릴 것이오!”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장양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곳으로 쏜살같이 난입했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있는 일광이었다. “이 미친놈들아! 인신매매범들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를 쳐!? 거기 있던 식솔들은 다 공범들이야, 새끼야!” 일광은 매우 격분해 있었다. 장진상은 내심 쾌재를 부르짖으며 소리쳤다. “바로 저놈이오! 이곳에서도 횡포를 부리는데 어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오!?” 장양의 두 눈이 호수처럼 깊게 가라앉으며 장진상을 향했다. “저자는 당신들이 인신매매범이라고 말했소. 그 말이 사실이오?” “증거가 있습니까? 이제는 멀쩡한 백성들을 죄인으로 모함하기까지 하는 것이오?” 이곳에 증거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일광을 체포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장진상의 시선이 장양 장군의 등 뒤로 향했다. 그곳에서 허리춤밖에 안 되는 여자아이 하나가 군복을 입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닌가. “나쁜 악당이에요!” 소소를 본 순간 장진상의 눈동자가 경련을 일으켰다. 자신의 다리를 병신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저, 저 쪼막년이…….” 터져 나오는 욕설을 간신히 집어넣었다. 그때 일광이 소리치며 소소를 바라보았다. “여기 증인이 하나 있지 않소! 어서 좀 더 말해봐.” 소소는 자신에게 모두의 시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곤 조금 당황했다. “저, 절 속였어요!” 혼자 외롭게 갇혀있던 기억이 떠오르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소소는 울먹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저 나쁜 아저씨들이 저를 무서운 곳에 가뒀어요…….” 장진상의 눈이 경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저 꼬맹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오! 어찌 어린아이 하나의 말만을 믿을 수 있겠소?” 장양이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그럼 네놈이 감히 백성들의 말을 들어볼 용기가 있느냐!!!” “어디 증거가 있다면…….” 그때였다. 장진상의 등 뒤에서 분노에 찬 거센 고함이 뿜어져 나왔다. “저놈이 내 새끼를 납치했습니다!!!” 거리에서 복면인을 붙잡고 울부짖었던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나타난 인물은 이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저, 저놈이 저를 납치한 사람입니다!” “저쪽에 있는 자가 저를 끌고 온 사람이 분명합니다!” “저 아저씨가 저를 데려갔어요!” 몰려든 백성들은 한눈에 보아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숫자는 지금도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왈패들이 소문을 내서 도움을 요청하자 한달음에 내달려온 백성들이었다. 저마다 장진상의 뒤에 있는 왈패들을 한 명씩 지목하고 있었다. 난입한 군중을 바라보던 장진상은 얼굴이 굳어졌다. ‘이 하찮은 잡것들이 감히…….’ 그때 장양 장군이 백성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내 여러분께 묻겠소! 저자가 무고한 자들을 살해했다는 말이 사실이오?” 갑자기 백성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죄가 있다면 내 새끼를 구해준 죄뿐입니다!!!” “우리를 구해준 게 어찌 죄가 된다는 말입니까!?” “이 나쁜 놈들이 무고하다면 이 세상에 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백성이 이구동성으로 변호하며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광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분노에 찬 장양의 두 눈이 다시 장진상을 향했다. “네 이놈! 아직 더 할 말이 남아있더냐!!!” 안색이 창백해진 장진상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화, 황실로 가는 진상품들이오! 저놈은 황제의 물품에 손을 댄 것이오!” 장양을 포함한 모든 인물의 눈빛에 매서운 한기가 서렸다. 한중의 아이들과 처녀를 납치하여 황실로 보내고 있었다니. 보이지 않는 거센 살기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장진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최후의 수단을 꺼내어 들었다. “내, 내 조카가 추밀원사 장준이오! 나를 보내주지 않으면 장군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네 이놈!!!” 장양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