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한중의 수호자들 (3)2022.03.17.
써컥-! 장진상의 수급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소리였다. 하늘 높이 세워진 장양 장군의 검날에서 한 방울의 핏물이 떨어졌다. 장양의 눈동자가 장진상의 하수인들을 향했다. 그 순간 분노 서린 거센 고함이 뿜어져 나왔다. “한중의 벌레들을 모두 참수하라!!!” 그렇지 않아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던 병사들이었다. 사방에서 검을 뽑아내는 소리가 폭풍우처럼 메아리쳤다. 차창-! 차차차창-! 장신상이 끌고온 조직원들도 저마다 품속에서 무기를 꺼내어 들었다. 그러나 이곳은 군영이었다. 병사들을 상대로 고작 백여 명이 맞서는 모습은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조직원들을 향해 병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선두는 당연히 랑아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자가 있었다. 지면을 도약한 청해가 삼 장을 날아 그들의 중심에 내려섰다. 타앗-! 지면을 딛자마자 왼발을 축으로 한 바퀴를 회전했다. 그의 검기가 반월을 그리는 순간, 세 명의 목이 허공으로 퉁겨 올랐다. 서걱-! 그의 검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며 직선의 두 명을 동시에 꿰뚫었다. 그 순간 나머지 대원들이 당도하며 참수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촤악-! 푸욱-! 곳곳에서 조직원들의 비명이 울려 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성 중에 동정을 보내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이십여 장 떨어진 곳. 랑아대의 대장이 막사의 지붕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판단이 안 서면 좀 더 지켜봐도 좋아. 나도 이만 합류해야겠군.” 소무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에게 말한 것인지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지붕을 박차고 도약한 그는 허공을 질주하며 난전의 코앞에서 낙하했다. 감히 자신의 딸을 인신매매하려던 자들이었다. 미수에 그쳤다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지면에 내려선 그는 일직선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적들의 수급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장진상의 수하들이 항전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단 한 명의 병사도 희생당하지 않은 채, 전투는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한중을 좀먹는 인신매매 집단이었다. 공교롭게도 제 발로 찾아와주었고,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백성들은 후련하다는 얼굴로 하나둘씩 걸음을 돌렸다. 주위가 잠잠해지자 장양이 소무와 일광을 불렀다. “잠시 좀 걷지.” 이들 셋은 전면에 보이는 길목을 따라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물어지자 장양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 많았네.” 일광이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황실로 잡혀간 아이와 여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찌하면 좋겠는가. 어찌하면 이 가여운 이들을 구할 수 있겠는가.” 장양의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옆에서 걷던 소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음을.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을 뿐, 장양은 격노하고 있었다. 울분에 차오른 일광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참에 황제고 뭐고 다 엎어버리시죠.” 소무가 일광에게 눈짓을 보냈다. 민감하고 위험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양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한 번 머금었을 뿐이었다. 잠시 후 그가 화두를 돌리며 물었다. “아직 남아있는 왈패들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소무가 나직이 대답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일과 연관이 없는 자들이라면 그들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 있으면 어디 말해보시게.” “그들을 관군의 감시 아래 치안유지군으로 편성하여 곳곳에 배치하는 것이 어떨지요?” “좋은 생각이네. 허나 남을 괴롭히던 자들이 아니던가. 남을 돕는 일에도 소질이 있을지는 검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일광에게 한번 맡겨보시지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다른 사람들이 되어있을 겁니다.” 장양의 시선이 일광에게 향했다. “물론 확실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네. 하지만 상처 입은 자네를 어찌 또 그곳으로 보낼 수 있겠는가.” 일광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닷새 안에 한중에서 가장 선량한 자들로 만들겠습니다.” “역시 듬직하군. 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치안 유지 외에 좀 더 했으면 좋겠네.”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인구가 많아지다 보니 공간이 비좁아지면서 민가들이 촘촘히 들어서고 있더군. 이러다 화재라도 나면 대형 사고가 발생하겠지. 치안뿐 아니라 소방을 포함한 불의의 사고도 같이 책임져줬으면 하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자면, 저들도 수입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비록 정규군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도 우리 군단의 여유자금으로 녹봉이 지급될 것이네.” 바닥까지 떨어진 왈패들이 군단의 녹을 받으며 백성들을 돕는다. 그보다 더한 동기부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맡겨만 주십시오.” “곳곳에 망루를 세우고, 방화 기구들도 준비해둬야겠지. 이것까지는 군단에서 지원하겠네. 이름은 군순포(軍巡鋪)라고 명하는 것이 좋겠군.” 장군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진 일광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이처럼 장양 장군이 백성들의 삶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면서, 한중은 중원 최대의 도시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무의 걱정은 따로 있었다. 추밀원사인 장준의 가문을 건드렸으니, 언제고 장양에게 위기가 올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고민해보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때 소무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했다. 행정병 한 명이 이쪽으로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장군!” 헐떡이며 다가오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인가?” “긴급 전갈입니다!” 행정병이 구겨진 종이를 장양에게 건네었다. 종이의 끄트머리엔 개방을 상징하는 작은 문양이 보였다. 내용을 읽어보던 장양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잠시 후 그가 행정병을 향해 말했다. “지금 즉시 부장들을 모두 소집하여 주시게. 최대한 빨리.” “예, 장군!” 장양의 시선이 다시 일광에게 향했다. “자네는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니, 맡은 임무를 준비하게.” 전투라고 했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참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일광은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장양에게 항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예, 장군. 알겠습니다.” * * * 군사회의실에 간부급 인사들이 다급히 모였다. 개방에서 온 정보가 시급을 다투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새로 합류한 의료부대의 모청도 자리했다. 장양이 벽면에 설치된 지도를 지휘봉으로 짚어가며 말했다. “장안성에서 약탈부대가 출진했다는 첩보가 당도했네. 육천의 보병이 고천읍으로, 그리고 이천의 기마부대가 당향촌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네.” 휘나라의 약탈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군단의 모든 병참 물자를 약탈만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장양이 거론한 마을들이 접경지역에 있다는 것이었다. 적들은 시일이 지날수록 좀 더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부관 양연정이 물었다. “요격하실 생각입니까?” “물론이네. 백성들도 보호하고, 적군의 숫자도 줄일 좋은 기회이지. 곽철 부장,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있는가?” 곽철은 군단의 정보 수집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개방에서 지급으로 정보를 보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비되었습니다. 거리로 계산해보면 고천읍은 나흘의 여유가 있으나, 당향촌은 기마부대라 당장 내일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고천읍은 강행군으로 앞지른다 하더라도, 당향촌이 문제로군.” 군단이 소유한 기병은 한백 부장이 이끄는 백 명이 전부였다. 제때 당도할 수 있을지도 모를뿐더러, 이들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지도를 살펴보던 소무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당향촌은 랑아대에서 맡겠습니다.” 장양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리 자네들이라도 밤낮으로 달려야 할 걸세. 괜찮겠는가? 게다가 기껏 시간에 맞춰 당도하더라도, 지친 몸으로 이천 기의 기마부대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네.” 아직 랑아대의 전력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인물은 없었다. 랑아대의 경공 수준으로는, 하루면 충분하고도 남아도는 시간이었다. “문제없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그럼 고천읍은 내가 직접 지휘하지. 양연정 부관과 위진철 부장은 정예병사 삼천을 추려서 대기하여주시게. 한 시진 후에 바로 출진하겠네.” “예, 장군.” “나머지 부장들은 이곳에 남아 한중을 지켜주시게.” “알겠습니다.” 장양이 지도의 한쪽을 지휘봉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야전 의료부대도 함께 출진하겠네. 모청 대장은 고천읍에서 십 리가 떨어진 이곳에 의료막사를 구축해주시게.” “예, 장군. 단 한 병의 부상병도 쉬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자, 그럼 시간이 없으니 모두 움직이세.” 시간 싸움인 만큼, 작전 회의는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소무는 바로 랑아대의 막사로 향했다. 한바탕 소란이 있었던 터라, 마침 모두가 막사에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막사의 입구에 서서 잠시 훑어보던 소무는 짧게 소리쳤다. “출진이다!” 대원들은 놀라는 반응이 아니었다. 아마도 일광에게 언질을 들은 모양새였다. “갑옷까지는 필요 없고, 간편한 전투복 차림이면 충분해.” “예, 대장님.” “이미 모두 준비되어있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목표는 당향촌. 반나절이면 충분하겠지. 지금 바로 출발…….” 소무는 말을 하다말고 당황했다. 그의 시선은 소소에게 향해있었다. “네가 전투복을 왜 입어?” 어느새 소소가 훈련복을 홀라당 벗고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던 것이다. 소소는 바지를 추켜올리며 소리쳤다. “나도 같이 갈래요!” 소무는 조심스럽게 소소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지금 가는 곳은 좀 위험해서 그래. 대신, 올 때 선물 사올게.” “싫어요. 나도 갈 거예요!” 이번엔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전쟁터에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법. 소무는 가까이 가서 소소를 번쩍 안아 들고는 말했다. “소소가 조금만 더 크면 데리고 갈게. 금방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소무는 소소의 엉덩이를 다독이고는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입이 삐죽 튀어나온 걸 보니 심술이 난 게 분명했다. “금방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소무는 마지막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대원들을 인솔했다. “한시가 급하니 빨리 출발하지.” 홀로 남겨진 소소는 연신 막사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분이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참새처럼 삐죽 튀어나온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너무해. 맨날 나만 빼놓고.” 역시나 이대로 물러설 아이가 아니었다. 소소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돌연 허리춤에 자신의 검집을 묶기 시작했다. 막사를 나와 보니 까만 점이 되어 멀어져 가는 삼촌들이 보였다. 그러나 소소가 누구인가. 무림제일고수인 검성의 전승자가 아니던가. 랑아대에서 일광과 청해를 제외한다면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비록 다리는 짧지만, 대열의 속도를 쫓아가는 것은 충분했다. 소소의 신형이 랑아대의 그림자를 쫓아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