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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한중의 수호자들 (4) (46/250)

46화 한중의 수호자들 (4)2022.03.18.

랑아대는 당향촌을 향해 쉬지 않고 내달리고 있었다. 선두에서 무리를 이끄는 소무는 귀를 계속 쫑긋거렸다. 한 시진 전부터 뭔가 알 수 없는 찜찜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는 느낌. 잠시 후 그의 심증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소무가 경공을 멈추자, 대원들이 어리둥절하며 따라 멈춰섰다. 그의 시선은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안광을 빛내자 지평선 끝자락에 쪼그만 점 하나가 보였다. “휴.” 역시나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죽기 살기로 달려오고 있는 아이는 딸이 분명했다. 생각 없이 달려오던 소소는 대열이 멈추자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소무는 경공을 펼치며 재빨리 딸을 향해 다가갔다. 다소 지쳤는지, 숨소리가 상당히 거칠었다. 아직도 심술이 가시지 않았는지 소소는 오리처럼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삼촌들이랑 위험한 데 가는 거야.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어.” 소무는 돌려보내기 위해 딸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그러나 소소는 절대 안 밀리겠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리에 내력까지 불어넣으며 버틸 정도였다. “나도 데려가요!” 딸을 전쟁터에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게 얘기해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소무는 나름대로 진중한 표정을 한 번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서 돌아가.” 하지만 이는 역효과를 보였다. 갑자기 소소가 바닥에 드러누우며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흐어엉……. 안 가!” 검성의 일평생 가장 난감한 순간이었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소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소소가 걱정되어 그러는 거니, 어서 돌아가 있어.” “흐엉……. 아버지가 지켜주면 되잖아!” “휴.” 딸을 이길 수 있는 아비가 얼마나 있겠는가. 소무는 결국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대신 아버지 옆에만 꼭 붙어 있을 수 있지?” 소소는 두 눈을 끔뻑이더니 벌떡 일어섰다. “정말요?” “응.” 언제 울었냐는 듯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두 팔을 벌렸다. 안아달라는 의미였다. “헤헤. 알았어요!” 짧은 다리로 긴 시간을 죽기 살기로 쫓아왔으니, 남은 거리까지는 편하게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딸을 안아 든 소무는 다시 몸을 돌렸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전면을 보니 대원들이 배꼽을 잡고 연신 키득대고 있었다. “큭큭. 내 말이 맞지? 소소가 이긴다니까.” “우리 대장님도 딸한테는 안 되지.” “킥킥. 랑아대의 여포를 어떻게 이겨.” 머쓱해진 소무는 전면으로 나서며 말했다. “시끄럽고, 빨리들 따라오기나 해.” 랑아대는 다시 경공에 박차를 가하며 당향촌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반 시진이 더 지난 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허름한 민가들. 한눈에 보아도 몹시 가난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논두렁을 가꾸는 자들과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 등, 곳곳에 평화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한 것이다. 마을을 바라보던 소무는 고민에 빠졌다. 약탈부대라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기병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천 명과 싸워도 랑아대가 패할 리는 없었다. 문제는 기병들이 작정하고 산개하여 도망칠 때 대응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철수한 후에, 도주했던 놈들이 다시 이 마을을 노릴 수 있다. 한 번에 모두 잡아야 한다.’ 고민 끝에 생각을 정리한 소무가 대원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주민들을 모두 한곳으로 모아.”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주민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반 시진이 지난 후 수백 명의 주민들이 마을의 회관으로 모여들었다. 처음 그들이 품은 감정은 경계와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다들 불안한 눈빛을 한 채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무가 그들의 앞으로 나섰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가 배시시 웃자 주민들은 안도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해하러 온 자들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우리는 한중에서 온 관군이오. 휘나라의 약탈부대가 온다고 하여, 당신들을 지켜주러 왔소.” 주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도시 구경도 못 해본 순박한 촌민들이었다. 당연히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겁먹을 필요 없소. 협조만 해준다면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을 것이니.” * * * 당향촌으로부터 북쪽으로 휘나라의 깃발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약탈부대가 당도한 것이다. 황금빛이 번뜩이는 갑주와 투구. 그리고 한손에는 대부와 장검 등의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말안장에 매달린 거대한 바구니가 연신 덜커덕거렸다. 잠시 후 그들의 시야로 촌락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타의 마을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주민의 수가 유난히 적어 보이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간혹 죽창을 들고 조직적으로 덤벼오는 마을도 있으나, 이곳은 저항조차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대장이 신호를 보내자 기병들이 말에서 내렸다. 길가에는 장애물이 널려있었으며, 민가도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도무지 말을 몰고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여 명이 말을 지키고, 나머지는 바구니를 들고 마을로 진입했다.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아!” 삼삼오오 모인 그들은 사방으로 산개하여 민가를 향해 내달렸다. 그들이 경쟁하듯 서두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을의 여자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미친 듯이 달리는 병사들의 두 눈에는 탐욕과 음심이 가득했다. 잠시 후 어딘가에서 한 병사가 먼저 소리쳤다. “여기 한 명 찾았다!” 근처에 있던 십여 명의 병사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진입한 민가에는 한 여인이 이불로 상체만 가린 채 목재침상에 누워있었다. 얼굴이 궁금했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치마와 다리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비켜!” 십인장급 병사가 갑주를 풀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몇 걸음을 걷더니 이내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등 뒤의 조원들이 물었다. “뭐 하세요?” “조장님?” 앞으로 나선 십인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근데 다리에 털이 왜 이렇게 많아?” 게다가 여자치고는 다리가 너무 탄탄했다. 조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짓을 보내자 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내는 순간,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남자 한 명이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정체는 랑아대의 현정이었다. 현정의 검이 쏜살같이 움직이며 병사의 목젖을 꿰뚫었다. 푸욱-! 병사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뻐금거렸다. 그 순간 현정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병사들의 사이를 후벼팠다. 비좁은 민가 안에 진입해있던 병사들은 피할 수 있는 방위가 없었다. 검기를 머금은 검이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두세 명이 고꾸라졌다. 십여 명의 병사들이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호흡에 불과했다. 현정은 바닥을 뒹구는 시신들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휴.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역할을…….”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아직도 화산파의 제자였다면 차라리 자결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을 구하기 위해서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현정은 치마폭에 검을 숨기고는, 저고리로 얼굴을 가리며 밖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이 민가를 넘어 이십여 장 밖의 논두렁으로 향했다. 백여 명의 병사가 농부들을 포위하며 다가가고 있었다. 십여 명의 농부는 병사들이 다가오든 말든 쇠스랑으로 밭을 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거리가 일 장 이내로 좁혀질 무렵. 농부들이 갑자기 돌변하며 쇠스랑으로 병사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푸욱-! 푸우욱-! “크아악!” “커억!” 결코 일반적인 농부들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심했기에 잠시 밀리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직까진 말이다. 농부들의 결사 항전을 발견한 근처의 병사들이 그곳을 지원하기 위해 내달렸다. 그러나 다가서는 족족 쇠스랑에 꽂혀 참혹한 시신으로 변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오십여 장이 떨어진 당근밭. 밀짚모자를 쓴 여자아이 하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당근을 캐내고 있었다. 잠시 후 뭔가를 발견한 아이가 환희에 젖어 소리쳤다. “아버지, 이거 봐요! 엄청 크죠?” 한눈에 보아도 무지 커 보였다. 다른 당근의 다섯 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크기. 게다가 여러 색깔이 섞여 알록달록한 빛깔까지. 희귀하긴 하지만 변종이라 맛이 없고 푸석하여,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소소가 대왕당근을 발견했구나. 그거 엄청 귀한 거야.” 소소는 대왕당근을 들고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히히. 정말요? 할아버지 드려야지!” 자신이 건네준 당근을 맛있게 먹던 장양 장군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던 것이었다. 이들의 얼굴에서 위기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소무가 고개를 들어올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은밀히 다가오는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수는 이십여 명에 이르렀다. 소무는 묵묵히 손에 쥔 당근을 힘으로 으깨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당근 한 덩어리가 수십여 조각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병사들이 좀 더 다가와야 했다. 거리가 삼 장 이내로 좁혀진 순간, 붉은 기류가 그의 손을 감쌌다. 곧이어 극한의 내력을 머금은 당근 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들은 병사들의 급소에 틀어박히며 둔탁한 소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푸푹-! 푸푸푹-! “크악!” “크으윽!” 소무는 쓰러지는 병사들을 뒤로한 채 다시 당근을 캐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손 머리 위로 얹고 무릎 꿇어! 아니면 이년을 죽이겠다!” 한 명이 용케 살아남았던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병사 하나가 아이에게 검 끝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러나 소소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근을 캐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소무는 피식하고 웃으며 다시 하던 일에 열중했다. “뭐, 뭐야? 죽이겠다니까!” 협박이 씨알도 안 먹히다니. 병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소의 옷깃을 덥석 부여잡았다. “이거 놔요!” 등 뒤를 향해 반사적으로 휘두른 대왕당근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콰직-! 병사는 충격에 목이 돌아가며 기절했다. 그가 정신을 잃으며 쓰러질 찰나. 소소가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힝……. 내 대왕당근 부러졌어.” 자리에서 일어난 소무가 당근 바구니를 어깨 위에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한 바구니 채웠으니까 먼저 쉴게. 소소는 아직 반이나 남았구나? 삼촌들이랑 먹으려면 부족하니, 마저 채우고 와.” “흐잉. 알았어요…….” 소소를 뒤로한 채 몇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이 민가를 향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왼쪽 어깨에는 바구니가, 오른손에는 당근 하나가 들려 있었다. 곧이어 당근의 끄트머리에서 눈부신 빛살들이 튀어나오며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밝게 빛나는 당근은 날카로운 기(氣)를 세 치가량이나 뿜어내며 흉기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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