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한중의 수호자들 (5)2022.03.19.
마을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모두 휘나라의 병사들이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그들의 시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우왕좌왕했다. 이천여 명의 병사들이 소수의 농민한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자존심으로 버텼지만, 지금은 생각이 백팔십도 변해있었다. “모두 퇴각하라!” “당장 후퇴해!” 곳곳에서 퇴각 신호가 떨어졌다. 살아남은 오백여 명의 병사들은 말이 있는 곳을 향해 죽기 살기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호미와 쇠스랑 따위를 움켜쥔 농부들이 뒤쫓기 시작했다. 선두는 바구니를 어깨 위에 올린 채 당근을 움켜쥔 농부였다. 어이없게도 당근에 맞아 죽은 병사들이 가장 많았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부대장급의 장교가 외쳤다. “비, 비켜!” 그는 부하들을 뒤로 밀치면서 앞으로 나섰다. 뒤처지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농부들의 움직임. 그것은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순간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콰직-! 바로 옆에서 따라오던 부하가 투구째로 머리통이 박살나며 쓰러졌다. 단단한 흙더미를 부수는 데 쓰이는 곰방메에 맞은 것이었다. 대장은 언제 죽었는지, 한참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느새 자신을 앞지른 농부가 절구를 들고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앙-! “끄헉!” 갑옷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가슴뼈가 으스러졌다. 전신의 기운이 빠지며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부대장은 지면에 쓰러지며 흐릿한 시선으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가관이었다. 이것이 현실인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도망치는 병사들이 갈대처럼 나자빠지고 있었다. 자신이 당했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때 앞장서서 도망치던 병사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거의 다 왔어!” “빨리!” 이십여 장 앞. 드디어 자신들이 타고 왔던 군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말을 지키고 있어야 할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십여 명의 농부들이 낫과 괭이자루를 움켜쥐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미친!” “도대체 이 마을 정체가 뭐야?” 대대로 무공이라도 익혀왔던 마을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현상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농부만 보면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고 오싹해졌다. 잠시 후 백여 명의 농민들이 병사들을 앞뒤에서 덮치기 시작했다. 이미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쇠스랑이 목을 찌르고, 호미가 갑주를 뚫고 급소를 가격했다. 게다가 당근으로 수급을 자르고 있다니.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오, 오지 마! 크아악!” “사, 살려줘…….” 급기야 정신이 나가서 바닥에 주저앉는 병사들도 나타났다. 한 호흡이 지날 때마다 오십여 명의 병사들이 고꾸라졌다. 무차별적인 학살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십여 명의 병사가 기적적으로 포위망을 뚫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이 말에 올라탄 순간이었다. 당근을 움켜쥐고 있는 농부가 소리쳤다. “보내줘!” 탈출에 성공한 기병들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대원 중 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소무를 바라보았다. “왜 그냥 보내주는 거예요?” “이대로 전멸시키면 다른 부대가 몰려올 수 있어.” 전리품에 비해 마을의 전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본진에 알려줘야만 했다. 득보다 실이 많다면 굳이 약탈을 다시 거행할 이유가 없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뒷산에 숨어있던 주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고 떼죽음을 당할 뻔했다. 주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연신 관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들.” “고맙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촌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렇지 않아도 이들에게 부탁할 게 있었다. 소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관군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촌장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생명의 은인들이십니다. 식량이든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이 군마들을 한중의 군영으로 옮길 것입니다. 그러자면 말몰이를 해야 하는데, 인원이 부족하여 도움이 필요합니다.” 송나라는 지역 특성상 목초지가 부족하기에 군마가 매우 귀하다. 한중의 군영에도 겨우 백 필만 있을 뿐이었다. 몽골 초원에서 자란 이천 필의 군마는 매우 귀중한 전력이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말을 타봤던 자가 거의 없습니다.” 소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훈련이 매우 잘된 군마들입니다.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나 말을 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알려만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십 필은 이곳에 남기겠습니다. 마을에서 민병대를 조직해서 정찰을 계속한다면, 불의의 사고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마을의 모든 장한은 랑아대를 따라 근처의 공터로 향했다. 승마술과 말몰이를 연습하려면 최소한 반나절은 걸릴 터였다. 그때 촌장이 남아있는 여인들을 모았다. “한중에서 온 은인들에게 식사 한 끼 대접하지 못한다면 도리가 아니겠지. 뜻깊은 날이니 오늘 저녁은 모두 모여서 함께하지.” 당향촌의 주민들은 소 한 마리를 끌고 와 도축했다. 마을에서 보유한 소는 고작 네 마리. 이 중 하나를 잡은 것이지만, 주민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재산과 생명을 지켜주었는데 무엇이 아깝겠는가. 게다가 마을이 받은 이십 필의 군마와 비교하면 소 한 마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축된 고기의 손질이 끝나자 각종 찜과 탕, 그리고 장작 구이 등이 하나둘씩 준비되었다. 게다가 밭에서 갓 따온 신선한 채소들까지. 반나절 만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때맞춰 마을 어귀로 나갔던 장한들이 돌아왔다. 회관의 앞마당에 가득 들어찬 음식을 보자 랑아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무도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런 걸 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어찌 이런 대접을 받겠습니까?” “성의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금수도 은혜를 아는 법입니다. 그냥 가신다면 저희는 금수보다 못난 놈들이 되는 것입니다.” 촌장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냥 돌아간다면 대원들에게 두고두고 원망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육포 쪼가리나 씹으며 돌아가야 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음식을 바라보는 소소의 입이 귓가에 걸려있지 않은가.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양껏 드시고, 부족하시면 말씀하십시오.” 랑아대원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소소의 움직임이 가장 빨랐다. “잘 먹겠습니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젓가락을 움켜쥔 채 닥치는 대로 입으로 쑤셔 넣는 것이 아닌가.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소무는 피식하고 웃었다. “맛있어? 천천히 먹어.” 얼마나 급하게 먹는지 소소의 양쪽 볼이 볼록하게 나왔다. 잠시 후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밝게 웃으며 소리쳤다. “웅, 아버지 따라오길 잘했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언제나 이렇게 쉬운 전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험난한 상황이 언제든 닥칠 수 있는 곳이 전쟁터였다. “따라다니는 거 힘들지 않아?” 소소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역시 생각대로 순순히 넘어오질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그때였다. 소소가 젓가락으로 고기를 움켜쥐고는, 손을 길게 뻗으며 애교 서린 표정을 지었다. “아~~~.” 입을 벌리라는 의미였다. 평소 하지 않던 짓까지. 다음번에 놓고 가지 말라고 미리 수작을 부리는 것이었다. 받아먹으면 꼼짝없이 말려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딸이 먹여주는 걸 거부할 수 있는 아비가 얼마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 한입 물었다. “맛있어요?” “그, 그래……. 맛있구나.” 체하는 느낌이었다. 소소는 마치 걸려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헤헤. 여기 하나 더 있어요! 아~~~.”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저히 딸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소무는 고기를 하나 더 받아먹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희낙락거리며 좋아하는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들이 이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오늘 같은 날 일광 형님이 없어서 안타깝네.” “큭큭. 모르는 일이지. 어디서 더 좋은 것을 먹고 있을지도.” 소무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대원들에게 말했다. “많이들 먹어둬. 말몰이하면서 돌아가려면 최소한 닷새는 걸릴 테니까.” 어설픈 솜씨로 말을 몰아 돌아가려면, 적지 않은 시일이 소요될 터였다. 한동안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소무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원들은 경쟁하듯 뱃속에 음식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 * * 한중성의 원강표국. 그들의 재산과 장원은 관군이 모두 압류했다. 인신매매에 관여하여 불법적으로 얻은 이익을 환수하는 차원이었다. 텅 비어버린 이곳은 신설된 군순포의 본부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드넓은 장원에 백색 장삼을 걸친 거대한 사나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의 앞으로는 천여 명의 장한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상 최초로 한중의 암흑가가 통합되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첫 번째는 무엇인가!” 일광이 소리치자 장한들이 동시에 우렁찬 고함을 내뱉었다. “한중의 치안은 우리가 지킨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화재를 진압하고, 불의의 사고로부터 백성을 보호한다!!!” “세 번째는 무엇인가!” “적군이 침입해오면,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도시를 방어한다!!!” 반사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장한들의 반응. 일광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리는 한중의 수호자이자 포수(鋪手)들임을 명심하라! 우리는 군단의 녹을 먹고 있으니 자긍심을 가져라! 만약 백성들을 핍박하고, 그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자가 있다면…….” 일광은 말을 하다 말고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품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곽철 부장이 준비해준 연설 내용의 종이를 분실한 것이다. 뒷부분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시 등을 돌린 일광은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아무튼, 허튼짓하다 걸리면 개처럼 처맞을 줄 알아!” “예, 대장님!!!” “알겠습니다!!!” 왈패들에게 있어서 일광은 암흑가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감히 그에게 반기를 드는 반대세력은 한 군데도 없었다. “모두 쉬어!” 한중의 곳곳에는 곧 백여 개의 망루가 건설될 예정이다. 그동안 군순포의 포수들은 본부에서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이따금 거리를 순찰하면서 말이다. 망루만 완성되면 도시에 물 샐 틈 없는 감시망이 형성된다. 중원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탈바꿈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할 일을 마친 일광은 등을 돌렸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슬슬 다시 군영으로 복귀해야 할 순간이었다. 물론 주기적으로 감찰을 돌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군순포의 부대장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대장님?” 얼마 전 군영으로 백성들을 불러모아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낸 기특한 녀석이었다. 이름은 황개칠. 개칠이파를 이끌던 두목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 집채같은 손이 올라왔다. 일광이 진중한 표정으로 황개칠의 눈을 마주했다. “너는 내가 가장 믿는 놈이야. 내 오른팔이란 얘기지.” 황개칠이의 눈동자가 부르르 떨렸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게 인정을 받아 감격에 차오르는 것이었다. “예, 형…… 아니 대장님!” 습관적으로 형님이란 단어가 튀어나올 뻔했다. “그래, 둘이 있을 땐 형님이라 불러. 망루가 완공되면 그때부터는 네가 대장이니까.” “예……?” “귀찮은 건 질색이거든. 잘하고 있는지 종종 감시할 테니, 허튼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개칠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평생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먼 곳에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며 지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땅을 박찬 일광은 장원의 담벼락 위에 올라섰다. 소란이 이는 곳에서는 믿기 힘든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말들이 한중의 대로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행렬의 선두에서는 말을 몰고 있는 쪼그만 아이가 보였다. “이랴앗!” 짧은 다리로 어떻게 말을 타고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소소는 말을 타는 게 신나는지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 일광과 소소의 눈이 마주쳤다. “히히. 일광 삼촌! 나 좀 봐봐요!”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수천 마리의 말들이 난입한다면 다치는 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소소에게 손을 한 번 들어 보인 일광은 담벼락 아래로 소리쳤다. “개칠아, 군순포의 첫 번째 임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