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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마음을 심다 (1) (48/250)

48화 마음을 심다 (1)2022.03.20.

장양 장군이 이끄는 병력 또한 고천읍에서 대승을 거두고 회군했다. 삼천 명으로 두 배의 인원을 기습하여 적군을 궤멸시켰다고 한다. 연이어 당도한 승전보는 한중에 다시 한번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랑아대가 노획한 군마들을 본 장양은 무척 기뻐했다. 이제야 군단이 제대로 된 기마부대를 갖출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백 부장이 이끄는 일백의 기마부대는 이천으로 늘어나 맹훈련에 돌입했다. 이후 아군은 한중에서 백오십여 리가 떨어진 곳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적들의 약탈부대를 각개격파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 개월 동안 추가로 다섯 차례나 요격에 성공하는 전과를 이루었다. 적군이 국경을 넘어 약탈해오는 족족 모두 격퇴한 것이다. 랑아대의 활약이 가장 컸음은 당연했다. 약탈이 막히자, 장안성에 주둔한 휘나라의 군단은 병량 부족으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시선은 다시 인근 마을들로 향했다. 그러나 휘나라의 영토에 포함된 마을들은 이미 농사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수확만 하면 빼앗기는 마당에 누가 농사를 지으려 하겠는가. 이미 점령한 모든 마을을 초토화로 만들어버렸기에, 쥐어짜도 나올 게 없었다. 한중 공략에 실패한 순간부터 모든 전략이 뒤틀려버린 셈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섬서 북쪽 지역에는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들까지도 굶주리고 있는 상황이 계속됐다. 휘나라는 결국 후방의 보급이 확보될 때까지 남진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을 벌게 된 장양은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 * * 남쪽으로 한수강을 끼고 있는 한중은 논농사에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어느덧 둔전의 개간이 끝나고 논 일구기가 마무리되었다. 강에서 물을 끌어다 논둑까지 완성하였으니,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을 준비가 모두 끝난 것이다. 송나라에는 이앙법(移秧法)이라는 발전된 농업기술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논밭에 수천여 명의 농부가 모내기에 열중이었다. 그중 유독 농부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자가 있었다. 장삼의 하의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채, 쉬지 않고 모종을 심어대는 인물이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장군, 이제 그만 쉬시지요. 몸이 상하십니다.” “허허. 둔전의 첫 번째 모내기일세. 이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장양의 고집에 진립 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시간이 날 때면 장양이 홀로 나와 농민들을 돕고 있으니, 눈치가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이 운영하는 둔전이니, 굳이 관군에서 도와줄 의무는 없지 않습니까.” 진립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토지를 빌려줘서 운영하는 민둔(民屯)이다. 농민들은 자유롭게 농사 지으며, 수확을 마친 후 황실에 이 할, 관군에 이 할만 지급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양은 하던 일을 계속하며 털털하게 웃었다. “허허. 왜 상관이 없겠는가. 민둔이라 할지라도 농사가 풍작을 이루면 군단의 비축미는 넉넉해지고, 백성들도 배부를 수 있게 되거늘.” 진립 부장은 한숨을 내쉬며 소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장군이 일을 하고 있는데, 둔전의 관리를 맡은 자신이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돌연 근처의 어디선가 여자아이의 고함이 들려왔다. “이야압! 모두 비켜주세요~” 진립이 그곳을 바라보자, 논두렁에서 모판을 실은 거대한 수레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수레만 보이고 끄는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기이했다. 옆으로 몇 발자국을 이동해보니 밀짚모자를 눌러쓴 소소가 보였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수레를 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레보다 체격이 작으니 안 보일 수밖에. “할아버지! 배달 왔어요!” 논두렁은 땅이 질어 수레를 끌기가 쉽지 않다. 황소도 버거워하는 수레를 여자아이 혼자서 밀고 있다니. 그 모습이 놀라우면서도 기특했다. “수고했다. 어서 삼촌들한테 건네주거라.” 소소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십여 장 거리에서 모를 심고 있는 삼촌들을 발견하더니, 수레 위로 뛰어오르고는 다짜고짜 소리쳤다. “삼촌들, 이거 받아요!” 모종을 모아놓은 목재 모판이 허공으로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정확히 대원들의 머리 위를 향해 날아갔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날아드는 모판을 흔들림 없이 받아내는 대원들의 몸놀림도 일품이었다. “왜 이렇게 많아?” “조금만 줘!” 소소는 사정없이 모판을 던져대며 소리쳤다. “이거 다 심어야 밥 먹을 수 있대요!” 대원들은 모판을 하나씩 움켜쥔 채 소소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소소는 처음 해 보는 농사일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장양 장군을 따라 나와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게다가 장양과 소소는 죽이 잘 맞았다. 전체를 통틀어 이 둘의 작업량이 가장 많았다. 목표했던 작업량이 어느 정도 끝나자 하나둘씩 논밭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논둑 너머로 이미 간단한 식사가 준비되어있었다. 장양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온종일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소소가 보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니,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허. 소소는 오늘 우리가 무엇을 심었는지 아느냐?” “저는 풀을 심었어요! 할아버지는요?” “할아버지는 마음을 심었단다. 우리의 마음이 이 땅에 씨앗이 되고 거름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기쁘고 든든한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 “마음이 자라면 어떻게 돼요?” “마음이 자라 기쁘고 즐거우면 하늘이 감응하는 법이지. 소소의 순수한 마음을 심었으니, 올해는 하늘이 풍년을 내려주길 기대해보자꾸나.” “네, 할아버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소소는 기분이 마냥 좋았다. 바로 앞에 음식이 준비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만두와 육포 등 간단한 음식이었지만, 소소는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장양 장군이 바닥에 주저앉아 만두 한 개를 물었다. 주변에서도 아버지와 삼촌들이 이곳저곳에 걸터앉아 만두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곳으로 농민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났다. 농민들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하나씩 움켜쥐고 있었다. “장군님, 이것 좀 드셔보십시오! 저의 집에서 직접 재워 만든 동파육입니다.” “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오늘 만들어온 잉어찜인데, 한번 드셔보시지요.” “아내가 장군님을 꼭 갖다 드리라며 만든 아압채입니다!” 누가 시킨 이도 없었으며, 부탁한 적도 없었다. 좁은 길가로 음식들이 수북이 깔려 나가자 농민들은 다급해졌다. 급기야 서로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먼저 건네려고 밀치고 있어서, 자칫하면 싸움이 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이를 본 장양이 농민들을 향해 앉으라고 손짓을 하며 말했다. “허허! 헌데 이걸 어찌 나 혼자서 다 먹는단 말이오? 오늘 우리 모두가 더불어 일하고, 미래를 함께 심었으니 앉아서 같이 먹읍시다.” 장군과 함께 식사를 같이하는 것만으로도 농민들에게는 영광이었다. 음식들이 바닥에 줄지어 깔리자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랑아대와 농민들이 식사를 함께했음에도, 음식은 다 처리하지 못할 만큼 차고 넘쳤다. 그때 장양의 시선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소소에게 향했다.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를 모를 장양이 아니었다. 온종일 열심히 일하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닌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허허. 소소는 열심히 일했으니 충분히 자격이 있다. 마음껏 가져가거라.” 함박웃음을 머금은 소소가 장양의 목을 끌어안았다. “히히.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소소는 품속에서 준비해온 보자기를 꺼내더니 음식을 조금씩 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농민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장정 열 명분의 일을 혼자서 해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많이 챙겨가거라, 예쁜 아가.” “마음씨도 착하기도 하지.” “어쩜 저리 얼굴도 예쁘고, 힘도 장사일까…….” 순식간에 음식 보따리를 챙긴 소소는 폴짝거리면서 어딘가로 향했다. 이를 본 소무가 물었다. “딸, 어디 가?” “아해랑 청아 만나러 가요!” 소무는 피식하고 웃었다. “잘 놀다 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소소가 구출해준 아해와 청아의 부모는 가난한 농부로, 그들이 할당받은 둔전의 토지는 이곳의 반대편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다양한 음식을 가져온 이곳과 달리, 그곳에서는 지금까지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일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친구 하나를 잊고 있었군.’ 소무의 시선이 은연중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후. 그의 눈동자는 우측 삼 장 거리에 홀로 자리하고 있는 소나무에 고정되었다. 소무의 손이 재빨리 움직이며, 만두 하나를 그곳으로 쏘아 보냈다. 놀랍게도 만두는 나무에 부딪치기 직전에 증발하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유령이 낚아챈 것처럼 말이다. 워낙에 빠르고 은밀했기에 아무도 눈치챌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행정병 한 명이 이쪽을 향해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성으로 보냈던 전령이 돌아왔습니다, 장군!” 장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수고했네.” 전투가 벌어지면 의무적으로 황실에 전령을 보내야 한다. 그러니 전령이 돌아왔다고 보고한 것은, 황실에서 내려온 교지가 있다는 것을 뜻했다. 식사를 마친 장양은 군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 장양과 함께한 랑아대가 호위하듯 뒤따랐다. “자네는 나와 함께 가지.” 장양은 군영에 도착함과 동시에 소무를 데리고 집무실로 향했다. 이미 그곳에는 군단의 전령이 도착해 있었다. “들어가세.” 전령과 소무가 장양을 뒤따랐다. 그는 진흙이 묻은 장삼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탁상 앞에 앉았다. 그러자 전령이 두 개의 두루마리와 작은 목합 상자를 내밀었다. 용무늬가 각인된 인감. 이것은 황실에서 내려온 교지이리라. 그리고 또 하나는 투박하고 볼품없이 감긴 두루마리였다. “이것은 무엇인가?” “도성을 빠져나오기 전, 정체 모를 사람이 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꼭 장군님께 전해주어야 하는 중요한 서신이라고 하여 일단 받아는 왔으나…….” “음. 잘 알겠네. 고생했으니 돌아가서 좀 쉬어두게.” “예, 장군.” 전령이 사라지자 장양은 먼저 황실에서 내려온 교지를 펼쳐보았다. 희소식이었다. 연이은 승전보에 따른 승진 인사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자네를 교위로 추천했는데, 승인이 떨어졌네. 정식 품계는 정육품 창무교위(彰武校尉)일세. 이제 부장들과 같은 위치가 되었으니 자긍심을 가지시게.” 처음 듣는 얘기였다. 소무에게 직급은 무의미했지만, 장양이 자신을 추천한 마음은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사실 랑아대의 전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네.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겠지. 나도 자네 덕분에 품계가 한 단계 올라갔으니.” 패전의 소식만 들리는 와중에 한중의 군단이 연달아 승전보를 보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장양은 이로써 정삼품으로 절제사의 등급이 되었다. 한 단계만 더 오른다면 절도사의 반열로, 사대 장군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한 끗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 할 수 있었다. 승진을 했음에도 장양은 별로 기뻐하지 않는 눈치였다.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자임이 분명해 보였다. “장군님의 공이 어찌 저만 못하겠습니까.” “허허. 겸손할 필요 없네.” 목합 상자를 열자 두 개의 명패가 들어있었다. 장양은 그중 하나를 소무에게 건네며 말했다. “창무교위의 명패일세. 그리고 임무를 완수한 자네의 부하, 일광은 나의 권한으로 백부장의 직급을 부여할 것이네.” 소무는 묵례를 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장양은 황실의 교지를 내려놓고, 투박한 두루마리를 풀었다. 전령이 정체 모를 이에게 건네받았다고 한 서신이었다. 그것을 읽어나가는 그의 표정은 점차 창백하게 질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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