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마음을 심다 (2)2022.03.21.
장양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서신을 다 읽은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집무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소무는 묵묵히 기다렸다. 반 각이 지난 후에서야 장양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좋지 않은 소식인가 봅니다.” “악비 사형이 곤경에 처했네. 기어코 모반 혐의를 뒤집어씌워 참수하려는 모양일세.” 장양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공훈을 세운 충신을 옥에 가둔 것도 모자라 참수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듣기만 해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구해낼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미 황실이 마음을 굳혔으니 쉽게 빠져나오기는 힘들겠지. 그래도 최소한 참수는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장양은 붓을 들고는 다급히 상소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움직이면서도 쉬지 않고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전령을 좀 불러주시게. 늦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겠지.” 휘나라를 피해 이곳저곳을 도망 다니던 황제는 절강성의 임안(臨安)에 안착하여 수도로 정했다. 공교롭게도 한중에서는 거리가 가장 먼 곳 중 하나였다.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너고, 거기서부터 십여 차례나 말을 갈아타야 한다. 전령이 도착하기까지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이었다. 소무는 잠시 고민했다. ‘상소문 하나로 결과가 바뀔 리가 없다. 어차피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이었다.’ 곧이어 결심을 굳히고는 말했다. “전령이 도착할 때면 이미 늦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경공으로 가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제가 가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이틀. 자신이 쉬지 않고 전력으로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자면 진이 다 빠지겠지만 말이다. “그 먼 거리를 경공으로 어찌 가겠다는 말인가. 아무리 자네라도 열흘 이상은 걸릴 것이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습니다.” 장양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아닐세. 나의 사사로운 일로 어찌 자네에게 그런 무리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충신을 구하는 것이 어찌 개인적인 일이겠습니까? 어서 상소문을 건네주십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장양은 결심을 굳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휘하에 자네 같은 자가 있는데, 어찌 유비의 인복이 부럽겠는가. 염치없지만 부탁하겠네.” “그냥 명령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서신을 보낸 자가 누구입니까?” “이번 사건을 담당했던 어사동승(御史中丞) 하주일세. 악비 장군이 혐의가 없음을 재상 진회에게 고했다가 파직당한 인물일세. 지금은 감찰사에서 그 일을 맡고 있다고 하네.” 잠시 기다리던 소무는 상소문을 품속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어서 말씀해보시게.” “장군의 호위무사로 추천하고 싶은 인물이 있습니다.” “고작 나에게 호위까지 필요하겠는가.” “장군은 한중의 기둥입니다. 기둥이 무너지면 한중도 무너집니다.” 장양은 생각이 바뀌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자네의 말도 틀림은 없군. 나 하나의 목숨은 개인의 것이 아니지. 그자가 누구인가?” “저에게 접근해왔던 무림인이 있었습니다. 휘나라에 사문이 멸문당하여 원한을 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력이 대단하여 쉬이 대적할 자가 없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무사를 얻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능력이 있는 자는 당연히 환영을 받아야 하지. 어디서 그자를 포섭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가 장군께 직접 찾아올 것입니다.” “잘 알겠네. 랑아대의 대장이 인정하는 인물이니 든든하군.” 소무는 짧게 묵례를 해 보이고는 마지막 말을 건네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시가 급하니 서둘러야겠습니다.” * * * 집무실을 나온 소무는 바로 랑아대의 막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채비를 마쳤다. 소소도 이번엔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삼촌들이랑 함께 있으니 외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두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막사 밖으로 나왔다. “잘 다녀오세요, 대장님.”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걱정 놓으세요.” “그래, 너희들만 믿겠다.” 소무는 쪼그려 앉아 소소를 다독여주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동안 삼촌들하고 잘 놀고 있어.” 대답이 없었다. 소소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이어지는 대답은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소소 선물 사올 거죠?” 귀여운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럼, 사와야지.” “아해랑 청아 것도요?”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니 선물을 받아 봤을 리가 없을 터였다. 친구들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무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아해랑 청아 것도 사올게.” “헤헤. 정말요?” 소소는 작은 짧은 팔을 내뻗었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소무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까지 비벼댔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진한 작별을 하는 것이리라. 소무는 모두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등을 돌렸다.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일평생 이렇게 먼 거리를 한 번에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군영을 벗어나고부터는 본격적으로 경공의 속도를 올렸다. 폭풍이 휘몰아치듯 그의 등 뒤로 거센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니, 굳이 길을 따라 달릴 이유가 없었다. 전각이 보이면 지붕을 타고 내달렸으며, 장애물이 나오면 도약해서 뛰어넘었다. 화살보다 빠른 속도에 새들이 놀라 흩어지기 일쑤였다. 한 식경을 내달리자 장강의 상류인 한수강이 눈에 들어왔다. 강어귀에는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곳에서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그러나 느긋하게 유람 따위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타앗-! 그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고 솟구쳐올랐다. 무려 십여 장을 전진하여 한수강의 표면에 내려섰다. 이어서 그의 발은 물 위를 박차며, 마치 평지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등평도수(登萍渡水). 어지간한 경신술로는 흉내조차 못 내는 경지이다. 설사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 거리가 한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끝없이 강을 질주하는 그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 * 절강성 임안(臨安). 새로이 송나라의 도읍이 된 이곳은 궁성의 증축공사가 한창이었다. 가장 거대하고 장엄하게 만들라는 황제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인근에 자리한 백성들의 민가를 모두 밀어버려야만 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무수히 많은 백성이 증축공사에 동원되어 강제노역하는 상황이었다. 도시의 민심은 흉흉했지만, 궁궐 안은 매일 같이 축제의 분위기였다. 한중과 양양이 굳건히 버텨주고 있기에 긴장감이 해소된 것이다. 달빛이 내리깔려 있음에도 궐 안의 곳곳에선 음주가무가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유독 험악한 고함이 터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궁궐 어귀에 자리한 감찰사였다. 타앙-!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아직도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니!?” 감찰어사(監察御史) 만사설. 악비의 사건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심문관이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아무리 고문해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모든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 “그럼 아들놈이라도 잡아서 쥐어짜야 할 것 아니야!” “오늘도 기절할 때까지 고문했으나, 아들 악운도 보통 독종이 아닙니다.” 만사설은 머리가 아픈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재상이 우리에게 준 시간이 이틀 남았다. 한세충이 오기 전에 반드시 죽여야 한다더군. 그 안에 자백을 받지 못하면 하주처럼 파직을 당할 것이야. 너도 무사하지는 못하겠지.” “죄, 죄송합니다.” “내가 직접 가서 심문하겠다. 채비하거라.” 만사설은 늦은 시간까지 자백을 받아내야 할 만큼 다급했다. 십여 장 뒤에서 그들을 은밀히 뒤따르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어느새 임안에 도착한 소무였다. 그는 만사설을 뒤따라 뇌옥으로 향했다. 궁성의 외진 곳에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있고, 그곳을 두 명의 관원이 지키고 있었다. 만사설은 인사를 건네는 관원들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내부는 운신의 폭이 좁아 신중해야 했다. 소무로서도 들키지 않고 은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마도 만사설을 뒤따라 잠행할 수 있는 자는 살왕이 유일할 것이다. 소무는 묵묵히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 반 시진이 지난 후. 뇌옥에서 만사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두 손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입에서는 연신 욕지거리가 뿜어져 나왔다. “이 지독한 새끼들.” 인적이 드물어지자 심문관이 뒤따르며 물었다. “이 정도까지 버티면 혐의가 없는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만사설은 눈썹을 꿈틀대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누가 몰라!? 만들라잖아!” “죄, 죄송합니다. 하오나 아무리 쥐어짜도 입을 열지 않는데 어찌합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임안에 악비의 수하가 남아있는지 조사해와.” “예. 날이 밝는 대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무는 다시 뇌옥을 바라봤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두 명의 관원들. 기세로 보아 무공을 익힌 자들임이 틀림없었으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소무가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돌멩이 하나가 그들의 틈새를 파고들며 뇌옥의 천장에 부딪혔다. 타앙-! 난데없는 소음에 관원들의 고개가 뇌옥을 향해 돌아갔다. 그 순간 소무의 신형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쏜살같이 다가간 그는 재빨리 관원들의 혈도를 눌렀다. 푸푹-! 기절한 관원들을 외벽에 기대어놓았다. 다른 순찰병들이 당도하기 전까지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른다. 서둘러야 했다. 특급정치범을 수용하는 뇌옥이라 그런지 감방의 수는 많지 않았다. 뇌옥의 지하에는 다섯 명의 간수가 서 있었으나, 다행히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자는 없었다. “후웁.” 한 번의 심호흡. 그 직후, 전광석화처럼 빠른 속도로 벽을 타고 내달렸다. 간수들의 시선을 벗어난 사각지대였다. 벼락같은 움직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빨랐다. 소무는 순식간에 간수들의 사이를 유령처럼 누비며 혈도를 누르는 것에 성공했다. 풀썩-! 정신을 잃은 간수들을 뒤로한 채 소무는 뇌옥을 살폈다. 대부분이 비어있었으나, 불안정한 세 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중 하나는 기세로 볼 때 자신이 찾던 인물임이 확실했다. 소무는 망설임 없이 그자에게 다가갔다. 양팔이 쇠사슬에 묶인 악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소무의 시선이 그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곳곳의 살가죽이 찢기고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손톱과 발톱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으며, 새끼손가락은 조금 전 잘려나갔는지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를 본 소무는 혀를 내둘렀다. ‘화경의 신체를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는 것도 능력이로군.’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소무는 인기척을 내며 악비를 불렀다. “원하신다면 이곳에서 꺼내드리겠습니다.” 숙이고 있던 악비의 고개가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있어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이로 드러난 맑은 눈동자는, 정기를 잃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