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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마음을 심다 (3) (50/250)

50화 마음을 심다 (3)2022.03.22.

“당신이로군.” 악비는 소무를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그저 일개 무관일 뿐입니다.” 무림의 명성은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지금은 오직 본분에만 충실할 뿐이다. “돌아가시게.”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장양의 말대로, 심지가 곧은 만큼 유연성은 가지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남은 생을 편히 보내실 수 있습니다.” “내가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진작 그리 할 수 있었네.” 악비의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화경에 이른 고수다. 그것도 최상급의 수준이다. 그에 반해 뇌옥의 감시체계는 너무나 허술했다. 어쩌면 황실에서는 그가 제 발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황실은 어떻게든 장군을 참수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내 발로 걸어 나간다면 모반을 인정하는 꼴이겠지. 나는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네. 치욕스럽게 살아남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는 설득이 무의미했다. 그 누가 오더라도 악비를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이 뇌옥 안에 나의 아들이 있을 것이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악비는 힘겹게 고개를 가로로 한 번 내저었다. “……내 요청은 그것이 아닐세. 불의에 굴하지 말고 명예롭게 죽으라 전해주시게.” 악비와 대화하고 있으니 답답함에 숨이 턱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의 성격이 단번에 파악되었다.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장수이지만, 그만큼 황실에 아부하지 않고 직언에 거침이 없었을 것이다. 내시들을 종용하는 황제가 이러한 장수를 총애할 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제를 부탁하겠네.” 악비는 이 말을 끝으로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입을 여는 것조차 힘겨웠으리라. 뇌옥의 가장 안쪽에 젊은 사내 한 명이 보였다. 악비의 아들임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모진 고문을 당한 듯했지만, 상황이 더욱 안 좋았다. 무공 수준이 약한 만큼, 고통도 더욱 클 수밖에. 이미 정신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를 깨워가면서까지 악비의 말을 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반대편을 향했다. 이 둘보다 더욱 상세가 안 좋아 보이는 중년인이 보였다. 장양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악비의 부장인 장헌으로 이곳에 가장 먼저 투옥된 인물이었다. 이미 폐인이 되어버린 모습이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버티다니…….’ 소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뇌옥 밖으로 나왔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감찰본부의 지붕 위에 은신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기우는 달빛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착잡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덧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뒤, 어젯밤 만사설의 명을 받았던 심문관이 돌아왔다. 소무는 청각을 집중하여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았다. “시킨 일은 마무리했겠지?” “예. 이곳에 그의 부하였던 자를 겨우 한 명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 그의 신상 자료입니다.” “장헌이 동조하지 않으니, 다른 놈으로 대체해야겠지. 이놈이면 적당하겠군.” “어찌하실 참입니까?” “지금 가서 이놈의 일가족을 모두 잡아 와.” “예? 죄명은 무엇으로……?” “일단 잡아 처넣고 만들면 될 것 아니야!?” “애들은 어떻게 할까요?” 타악-! 무엇인가를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나랑 장난해? 모조리 잡아 처넣어, 당장!” 잠시 후 감찰본부를 나서는 심문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소속 관원 몇몇을 불러놓고 뭔가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무슨 짓을 꾸미려는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가족을 고문하고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악비의 모함을 사주하려는 것이리라. 소무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장양의 상소문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상황이었다. 만사설을 죽일까도 생각해봤지만, 궁성에서 소란을 피워 좋을 것은 없었다. 혼란만 가중하여 운신의 폭만 좁아질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의 모략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섣불리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소무는 은근슬쩍 관원들을 뒤따랐다. 자신 또한 정육품의 무관이기에 숨어다닐 필요는 없었다. 여섯 명의 관원들은 궁성을 벗어나 임안의 외진 곳으로 향했다. 반 시진이 지난 후에는 인적이 드물어지며 도시 외곽의 빈민촌이 나왔다. 소무는 관복을 벗어 숨겨놓고는, 민가에서 옷을 한 벌 주워입었다. ‘위치가 확인되면 움직인다.’ 일각이 더 지난 후 목적지가 나왔다. 관원들이 민가 근처에서 뭔가를 쑥덕거리고 있었다. 작전을 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곳을 급습하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했다. “길 좀 물어봅시다. 여기 의원이 어디에 있소?” 관원들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중요한 순간에 불청객이 등장하니 짜증이 난 것이다. “저리 꺼져. 처맞기 전에.” “길만 물어봤는데 너무하시는 거 아니오?” 소무가 가까이 다가가자 한 관원이 앞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여지없이 빗나가고야 말았다. 헛발질을 한 그는 볼품없는 모양새로 자세를 추스르고 있었다. “왜 공격하시오?” 관원은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감히 무공을 익힌 자신의 공격을 피하다니. 운이라 하더라도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개새끼가!” 주먹이 날아오고 있었지만, 소무의 눈에는 굼벵이처럼 느려 보였다. 고개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공격을 흘려보내며 말했다. “자꾸 공격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소.” 소무는 의도적으로 계속 도발했다. 그리고 그 작전은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여섯 명의 관원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소무의 주먹이 그들의 신체 곳곳에 쑤셔박히기 시작했다. 푸욱-! 콰직-! “크헉!” “컥!” 소무는 그들을 쓰러트리는 한편, 한 명씩 기절시키고 있었다. 최소한 한 시진은 일어날 수 없도록 혈도까지 짚었다. 순식간에 일을 마친 그는 서둘러 목적지로 향했다. 민가의 문을 열자 놀란 얼굴을 한 일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두 명은 소소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나쁜 의도로 온 것이 아니니 놀랄 필요 없소.”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중년 남성이 나서며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시간이 없으니 먼저 좀 묻겠소. 악비 장군의 휘하에 있었소?” “그렇소. 난 그분 휘하의 백부장이었소.” 당황하고 있으면서도,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의 상관이었던 자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리라. “악비 장군을 위한다면 지금 즉시 임안을 떠나시오.” “누구신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소무는 문 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관원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저들이 당신 일가족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오. 당신이 악비 장군을 모함하는데 가담할 때까지.” “…….” 이미 눈앞에 펼쳐진 장면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촉박했다.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들은 최소한의 짐으로 순식간에 피난 준비를 마쳤다. 무심코 바라보던 소무는 걱정을 금할 수 없었다. 두 명의 아이와 몸이 불편해 보이는 아내까지. 자칫하면 성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붙잡힐 우려도 있었다. “내가 성문까지는 도와줄 테니, 앞장서시오.” 소무는 쪼그려 앉으며 아이들에게 다가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중년인은 아내를 들쳐 엎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괜찮아. 좋은 분이시다.” 소무는 양쪽 어깨에 아이를 하나씩 얹히고는, 그를 따라 성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콰앙-! 탁상이 부서질 듯 흔들거렸다. 구겨진 만사설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온 거야!?” “죄, 죄송합니다. 코앞에서 웬 무림인이 시비를 걸어왔다고 하여…….” “그럼 성문에서라도 잡아야지, 이 병신들아!” “수색해보았지만, 이미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이런 개…….” 만사설은 뭐라고 쏘아붙이려다, 현기증이 온다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내일까지 황제에게 올릴 심문보고서를 진회에게 전달해줘야 해. 어떡할 거야?” “무죄라고 고한다면 파직당하실 겁니다. 제가 조서를 꾸며볼 테니, 적당한 중죄로 몰아붙이시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증거는 없었지만, 재상이 해결해 주길 바랄 수밖에. “악비와 장헌은 십 년, 악운은 삼 년 징역으로 꾸며봐.” “알겠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소무의 귀에 낱낱이 들어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만사설은 궁궐 근처에 자리한 진회의 집무실로 향했다. 주변으로 철통같은 경계가 펼쳐져 있었기에, 소무도 접근하는 데 애를 먹어야만 했다.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어딘가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진회의 호위무사였다. 존재는 확실히 알 수 있었으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무는 우여곡절 끝에 집무실의 지붕 외각까지 접근한 후 최대한 기척을 숨겼다. “재상, 심문보고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진회가 조용한 것으로 보아, 보고서의 내용을 훑어보고 있는 듯했다. 반 각이 지난 후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예……?”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악비의 죽음이야!”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 한세충이 오면 죽일 기회가 없다. 오늘이 너의 운명을 결정할 마지막 기회란 얘기지.” “묘안을 주십시오.” “죽여.” “악비가 뇌옥에서 죽으면 제가 의심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회는 만사설을 이용해 차도살인(借刀殺人)을 계획하고 있었다. 만사설 또한 쉽게 넘어갈 인물은 아니었다. “마침 예부시랑(禮部侍郞)의 관직이 비어있더군. 이 정도 일도 처리 못 하면 나는 자네의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후. 송구하오나 그토록 악비를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도 목숨을 걸어야 하니, 이유 정도는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지. 뭐 비밀도 아니니. 악비는 조정회의에서 사사건건 폐하와 문관들하고 의견 마찰을 빚어왔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지.” “그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폐하는 몇 년 전부터 성적 기능에 장애가 생겼네. 그래서 변태적인 일탈을 계속해 오는 것이고.”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비가 서둘러 후계를 책봉해야 한다고 직언을 했어. 자기 딴에는 생각해서 말해준 것이지만, 역린을 건드린 것이지.” “미친놈이군요.” “감히 나를 앞에 두고 후계를 논했으니 죽어야지.” “일을 잘 마무리하면 말씀하신 예부시랑의 자리는 저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이상도 약속해주지.” “알겠습니다.” 만사설은 진회의 집무실을 나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는 감찰본부로 돌아가 가장 총애하는 관원을 불렀다. 감찰사 소속 최고의 무사였다. 한참을 속닥거린 이후 관원이 감찰본부 밖으로 나왔다. 이 모든 행적은 소무에게 낱낱이 포착되고 있었다. 날이 저물자 그자는 복면을 쓰고 영락없는 살수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가 향한 곳은 당연히 뇌옥이었다. “누, 누구냐?” 뇌옥을 지키는 감찰사 소속의 관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뽑았다. 그러나 살수는 대답 대신 그들의 사이를 질주했다. 그의 검에서 서늘한 빛이 한 번씩 번뜩이며 관원들을 향해 뿜어졌다. 촤아악-! 푸욱-! 풀썩-! 두 명의 관원이 쓰러지기도 전에, 그자는 뇌옥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무관 한 명이 쏜살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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