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마음을 심다 (4)2022.03.23.
뇌옥 안으로 들어간 자는 두 명이었으나, 빠져나온 인물은 한 명이었다. 소무는 바로 금군(禁軍)을 찾았다. 궁중을 수비하는 송나라의 최정예 병사들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십여 명의 금병들이 대열을 갖춰 순찰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에게 다가간 소무는 명패를 내보이며 말했다. “나는 한중에서 절제사의 상소를 가지고 온 자요. 지금 뇌옥 근처에서 수상한 자가 기웃거리고 있으니 확인 좀 해주시오.” 금병들은 명패를 확인한 후 재빨리 소리쳤다. “뇌옥으로 간다!” “서둘러!” 이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무기를 움켜쥐고 내달렸다. 그리고 곧 뇌옥의 입구에서 살해당한 두 명의 관원을 볼 수 있었다. 조장급의 금병이 다급히 소리쳤다. “너는 가서 지원군을 불러와! 나머진 나를 따라 진입한다!” 들어갔던 금병들이 다시 나오는 데는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어깨에는 기절해있는 살수가 걸쳐져 있었다. “금군청으로 압송하여 심문하겠다!” 그곳으로부터 십여 장이 떨어진 모퉁이. 감찰어사 만사설이 이 광경을 숨어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금군이라면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었다. “후……. 나는 이제 망했구나.” 만사설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천하에서 금군을 막아줄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진회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미 그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대면은 바로 이루어졌다. 진회는 흙빛으로 변한 만사설의 얼굴에서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누군가 방해하는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실패했습니다.” “잡아놓은 죄수 하나를 처리 못 해!?” “도와주십시오. 지금 감찰사 소속 관원이 금군에게 끌려갔습니다.” 진회의 동공이 부르르 떨렸다. 최후의 수단까지도 실패로 돌아갔다. 게다가 하필이면 금군이라니. 이미 뇌옥의 주변으로 금병들이 쫙 깔려있을 것이었다. 만사설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무능한 놈. 내가 왜 널 도와야 하지?” “제가 잘못되면 재상께서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궁지에 몰린 만사설은 진회를 협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곤란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피곤한 일은 생길 테지. 네놈이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예……?” 만사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전설적인 살수가 진회의 호위무사로 있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죽여. 피는 튀기게 하지 말고.” 그때였다. 돌연 진회의 그림자에서 검은 연기가 튀어나오며 쏜살같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곧이어 살수의 손날이 만사설의 목젖을 강타했다. 콰직-! 고꾸라진 만사설을 부여잡은 살수는 진회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눈을 제외한 전신을 검은 천으로 휘감고 있었다. “시체는 나중에 처리하고 우선 따라오너라. 폐하를 알현해야겠다.” 진회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었다. 집무실을 나선 그는 궁궐로 향했다. 황제를 알현하여 만사설이 작성해준 심문보고서를 올려야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소무가 은밀히 미행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궐 안으로 들어선 진회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수심전(水花殿)에 있을 시간이로군.’ 화려하게 가꾸어진 야외온천으로, 황제가 주로 유흥을 즐기는 장소였다. 황제를 제외한 모든 남성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기도 하다. 재상 진회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뒤뜰의 정원을 지나 반 각을 더 나아가자, 원하는 위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무는 수심전에서 이십여 장이 떨어진 매화나무 아래에 은신했다. 진회의 호위무사 때문에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처음 보게 된 황제의 모습에 소무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황제는 연꽃잎이 떠다니는 온천에서 만취 상태로 궁녀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숫자는 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대부분이 말도 안 되게 어린 궁녀들이었다. 소무는 치솟아 오르는 살기를 겨우 억눌러야만 했다. 그때 진회의 말이 들려왔다. “폐하, 잠시 얘기 좀 나누시지요.” 결코 황제를 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의 위치가 단번에 짐작되는 대목이었다. 술이 떡이 된 황제는 이미 혀까지 꼬여있는 상태였다. “누구냐!? 아, 경이로구만. 어서 고하거라.” “악비의 심문이 끝났습니다. 심문보고서를 보시겠습니까?” “경이 알아서 하여라. 나는 그놈이 죽기만 하면 되느니라.” “끝까지 자백하지 않기에, 죽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십 년의 징역형으로 처벌하겠습니다.” “나는 황제가 아니더냐. 나의 신하를 내가 죽이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이더냐?” “백성들의 신망이 높은 자입니다. 자백 없이 죽인다면 또다시 민심이 추락하여 반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놈의 신망! 신망! 감히 누가 짐보다 백성들의 신망이 높다는 말이더냐!” “옥체에 해로울 수 있으니, 진정하시지요.” “후. 알겠다. 그럼 나중에라도 죽일 수는 없겠느냐.” 황제는 은연중 진회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세충이 반란군의 토벌을 끝내고 도성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그가 돌아온 이상, 더는 기회가 없습니다.” “후……. 대신 평생 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라. 다시는 그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려에서 재정 지원을 요청해 왔습니다. 응하지 않으면 휘나라와 정전 협정을 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여 황금 천 냥과 비단 삼천 필을 보내서 달래고자 합니다.” “외교 문제는 듣기만 해도 어지러우니, 경이 알아서 하여라.” 말을 마친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궁녀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소무는 혀를 내둘렀다. 황제가 무능한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팔푼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장은 악비 장군을 구해내는 것이 불가능하겠군. 우선 참수를 면하게 한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급한 불은 끈 상황이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심문이 종료되었으니 더는 고문할 이유도 없을 터. 곧 형무소로 이감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곳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는, 장양과 상의해서 풀어나가야 할 문제였다. 황실의 사정이 어느 정도 파악된 것도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한시라도 이 지저분한 곳을 떠나고 싶었다. 은밀히 궐 안을 빠져나온 소무는 다시 한중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그의 움직임이 정지하고야 말았다. 이십여 장 앞이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번뜩이는 은빛 갑주와 더듬이처럼 긴 술이 달린 투구를 눌러쓴 무장이 보였다. 소무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송나라가 보유한 유일한 현경의 고수. 진 만인적(眞 萬人敵) 한세충이 확실했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투지가 끓어올랐다. ‘과연 명불허전이군.’ 성난 맹수의 얼굴을 한 한세충을 백여 명의 금군이 가로막았다. “궐 안은 누구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습니다.” “정식 절차를 밟으셔야 합니다.” 한세충의 미간이 꿈틀댔다. “비켜.” 단 한마디였다. 금병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 누구도 감히 한세충의 앞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서는 태산과도 같은 기개가 서려 있었다. 그때였다. “멈추어라!” 어느새 나타난 진회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록 한세충이 무관으로서 최고의 품계에 올라 있다지만, 재상에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다. “폐하를 알현해야겠소.” “그 누구도 폐하를 알현하려면 나를 통해야 한다.” 한세충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 모습에 진회도 내심 겁이 났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상상 이상으로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 “나에게 말하거라.” “왜 악비 장군을 체포하였소?” “그는 모반의 혐의가 있어 조사 중일 뿐이다.” “수십 년간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켜온 장수가 모반이라니!? 증거가 있소?” “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더냐.” 한세충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 그따위 말장난으로 천하를 속인단 말이오!?” 진회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래도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물러가라. 죄가 없다면 풀려나지 않겠느냐.” “만약 그가 죽는다면, 나도 더는 이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오.” 한세충은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리며 물러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회는 혀를 끌끌 찼다. ‘이놈이 오기 전에 죽여놓고 수습했어야 했는데. 이젠 글러 먹었군.’ 한세충도 밉상이었지만, 유일한 현경의 고수를 내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회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집무실로 향했고, 병사들도 하나둘씩 해산했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이내 한중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한중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다. 성내의 곳곳에 백여 개의 망루가 완공된 이후, 뒤이어 많은 대피소가 지어졌다. 수성전이 벌어지는 경우 성 밖의 촌민들이 성내로 밀려들 것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해자(垓字)를 만들기 위한 수로 공사가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본래 한중성의 성벽 외곽에는, 적들의 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깊은 구덩이가 둘러싸고 있었다. 공호라고 불리는 이 구덩이에 물을 채우면 해자가 되는 것이다. 장양은 수로 공사를 통해 자연하천이 이곳을 통과하여, 한수강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 결과 한중성의 둘레에는 깊고 깨끗한 물줄기가 흐르게 되었고, 한층 더 보강된 방어력을 갖추게 되었다. 장양과 부관 양연정이 함께 걸으며, 완성된 해자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흡족한 표정이 가득했다. “백성들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찌 이렇게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겠나.” “맞습니다. 부호들이 물자와 자금을 보내주고, 주민들이 틈틈이 인력을 보태준 덕분입니다.” “허허. 관군과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축복받은 도시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모두 장군님의 덕망 때문입니다.” 그때 장양의 시선이 근처의 아이들을 향했다. 두 명의 여자아이가 해자에 걸터앉아 성벽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연정은 왠지 모를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소소 언니!” “언니, 빨리 뛰어!” 성벽 위를 올려보자 낯익은 여자아이 하나가 보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맹이가 양팔을 벌린 채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려 십여 장에 이르는 높이에서 말이다. “물러서십시오, 장군. 물이 튈 수 있습니다.” 장양의 고개가 성벽 위로 향했다. 그곳에선 소소가 활짝 웃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할아버지, 나 좀 봐봐요!” “허허.” 털털한 장양의 웃음과 함께 소소가 성벽 위에서 낙하하기 시작했다. “야아압~!” 풍덩-! 해자에서 엄청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양연정은 재빨리 피했지만, 장양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측면에서 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며, 물보라를 완벽히 차단했다. 투투툭-! “장군, 괜찮으십니까?” “허허허. 놔두시게.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니 좋구만.” 양연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장양의 관복에는 물 한 방울 튀기지 않았다. 기의 파동을 발출하려면 화경의 수준에 올라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장양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때 소소가 해자의 물 위에서 헤엄치며 다가왔다. “히히. 재밌어. 할아버지도 한번 해봐요!” “지금은 할 일이 있으니, 나중에 같이 한번 해 보자꾸나.” 양연정이 쪼그려 앉으며 소소에게 말했다. “이 말괄량이 녀석. 어쩐지 공사할 때 와서 열심히 일하더니, 이러려고 그랬구나?” “헤헤. 비밀이에요~.” 소소는 해맑게 웃으며 아해와 청아가 있는 곳으로 멀어져갔다. 아이들을 뒤로한 채 장양과 양연정은 계속해서 걸어갔다. “소소가 저리 신나있는 걸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네.” “무엇입니까?” “평상시에는 해자의 물을 빼내어 얕게 유지하라고 일러두게. 이곳에서 백성들이 물놀이를 할 수 있게 한다면 한층 더 삶이 행복해지지 않겠는가.” “묘안이십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상인들이 들어설 테고, 꽤 괜찮은 유원지가 자연스럽게 조성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물장구치며 노는 모습을 상상하던 둘은 연신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각이 더 지난 후. 그들은 전면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낯익은 인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첨병대를 지휘하는 백문휘 부장이었다. 그는 몹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군. 추밀원사 장준이 지금 군영에 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