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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불청객을 맞이하다 (2) (53/250)

53화 불청객을 맞이하다 (2)2022.03.25.

한중을 향해 내달리는 소무의 등 뒤에는 봇짐이 매어져 있었다. 낙양을 벗어난 그는 몇 군데의 도시를 더 경유했다. 너무 빨리 복귀하면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그동안 소소의 선물을 사기 위해 돌아다녔었다. 무엇을 사야 할지 몰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다. 아이들의 간식들은 물론이고 피리나 퉁소 등의 악기까지. 거의 한 달치의 녹봉을 소비하고야 말았다. ‘휴. 혼자서 딸 키우는 게 역시 보통 일이 아니군.’ 주머니는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선물을 사고 나니 마음은 든든했다. 등평도수로 장강의 물 위를 질주하는 그는 어느새 섬서에 진입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한중의 남쪽인 한수강에 당도하게 될 예정이었다. * * * 한편 한중의 중심가에서는 일광과 악룡대의 대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일광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악룡대의 병사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의 양손에 섬뜩한 권기(拳氣)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막아서느냐!?” 악룡대는 송나라의 유명한 정예부대 중 하나였다. 장교급의 병사 두 명이 앞으로 나서며 검기를 마주 발출했다. 이대 일의 상황이었지만 일광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주둥이 더 놀리면, 머리통 날아간다.” 그 순간 지켜보던 군중들의 대열이 술렁였다. 몇몇이 일광의 얼굴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대, 대협이 나오셨다!” “내, 내 새끼를 구해주신 분이셔!” “암! 저 몹쓸 놈들, 이제 본때를 당해봐야지!” 몰려드는 군중들은 하나둘씩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일광을 보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무적이었다. 반대로 악룡대의 병사들은 몹시 불쾌해졌다. 군중들이 대놓고 자신들을 악당으로 매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곳에서 숱하게 약탈을 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뒤쪽으로 늘어선 병사들이 백성들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입 닥치지 못해?” “한 번만 더 입 열면 죽여 버린다.” 공포에 질린 군중들이 입을 다물 찰나였다. 일광이 악룡대를 향해 도발의 몸짓을 보냈다. “시끄럽고 빨리 들어와. 이빨을 다 뽑아 줄 테니까.”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사망자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두 명의 장교가 일광의 좌우를 포위했다. 잠시 후 그들이 움직임을 개시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호통이 들려오며 모두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네 이놈들! 어디서 감히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장양 장군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백여 명의 랑아대원들이 검집을 움켜쥐고 있었다. 권기와 검기가 동시에 소멸하며 싸움은 중단되었다. 절제사를 앞에 두고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악룡대의 대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추밀원사께서 내린 명령입니다. 장군께서는 막을 권한이 없습니다.” “너희들이 그러고도 송나라의 병사들이란 말이냐!” 악룡대의 대장은 지지 않고 말했다. “지금은 휘나라와의 전시상태입니다. 국법으로 전시에는 모든 도시에서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강제징발 할 수 있습니다. 군정장관(軍政長官)의 권한으로 이미 명령이 내려진 사항입니다.”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장양이 국법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이들이 하는 것은 개인의 일탈을 위한 노략행위였다. 결코, 한중의 백성들을 해코지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추밀원사께서 말씀하시길, 장군께서 징발을 막는다면 체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꼬투리를 잡을 게 없자 장준이 함정을 파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장양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뭐라고 호통치려고 했으나, 이내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먼저 움직인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양 장군을 체포한다는 말에 눈이 뒤집힌 백성들이었다. “아니 도대체 그딴 법은 누가 만들었단 말이오?” “군단에서 부녀자들을 왜 징발해!? 이런 개X끼들!” “우리한테 너희 같은 병사들은 필요 없어!” “이거나 처먹어! 캬악~ 퉤!” 악룡대의 대장은 얼굴이 부르르 떨리며, 전신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평소에는 눈도 못 마주치던 하찮은 것들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반응들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기어오르는 백성들은 공포로 눌러줘야만 한다. 얼음장같이 서늘한 목소리가 부하들을 향해 토해져 나왔다. “지금 입 열었던 놈들 모두 죽여.” 다섯 명의 병사들이 검을 뽑으며 백성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보다 움직임이 더 빠른 자들이 있었다. 같은 수의 랑아대원들이 쏜살같이 날아들며 백성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윽고 그들의 발과 손이 섬전처럼 움직이며, 다가오는 악룡대원들을 동시에 타격했다. 콰직-! 퍼억-! “크윽!” “컥!”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병사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송나라에서 대적할 부대가 거의 없다고 알려진 악룡대였다.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더는 장양 장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악룡대의 대장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오늘 다 죽을 줄 알아!” 외마디 말과 함께 백여 자루의 검이 검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랑아대원들도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 한번 해봐.” 마침 인원수도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악룡대와 랑아대가 서로 마주 보고 섰다. 그러나 호기롭게 먼저 검을 뽑아 든 악룡대는 연신 눈을 끔벅이며 움찔거렸다. 별거 아닌 자들로 여겼던 상대들이 검기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원이 말이다. “해보라니까?” “우리가 갈까?” 랑아대원들의 도발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나 악룡대는 벙어리가 된 듯 주춤거리고만 있었다. 검기가 무엇인가. 최소한 반 갑자의 내공을 보유한 자들만이 가능한 고난도의 기술이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악룡대에서도 검기 발출이 가능한 자들이 여럿 있었지만, 상대는 전원이 가능하다. 싸움이 벌어짐과 동시에 학살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장준이 합류하지 않는 이상 뒤집을 수 없는 전력이었다. 한중의 거리가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그때 장양이 다시 한번 호통을 쳤다. “지금부터 백성에게 손을 대는 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즉시 처단하라!!!” 랑아대원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예, 장군!” “네, 알겠습니다!” 한참을 뻘쭘하게 있던 악룡대의 대장이 기어코 백기를 들었다. “방금 일은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그가 검을 회수하며 등을 돌리자 부하들이 뒤따랐다. 악룡대가 모두 사라지자 백성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장군님 만세!!!” 그러나 당사자인 장양은 마음이 썩 편할 리가 없었다. “모두 해산하거라.” 랑아대를 물린 장양은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도가 지나친 추밀원사의 횡포에 도무지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기를 반 시진. 기어코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콰앙-!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장준이 인상을 쓰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식을 벗어난 무례한 행동에 장양의 눈썹이 꿈틀댔다. 검까지 차고 온 모습을 보아하니, 작정한 모양이었다. “상급자 앞에서 계속 앉아있을 텐가?” 그 말에 장양이 마지못해 일어서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몰라서 묻는가? 자네는 지금 나의 명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방해했다. 항명을 했다는 말이다.” “장진상의 일로 원한을 품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이 있다면, 황실에 고하여 국법대로 진행하십시오.” “감히 누구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 장준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 막히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며 장양을 옥죄어갔다. 그러나 거센 기운은 그에게 당도하기 직전 계속해서 소멸하고 있었다. 집무실에 서늘한 한기가 휘몰아쳤다. 둘의 거리가 일 장 이내로 가까워졌다. 서로가 눈을 마주 보는 가운데, 집무실로 누군가가 후다닥 달려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과일 몇 개가 담겨있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거 먹을래요?” “잠시 이곳에서 나가 있거라.” 무심코 탁상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은 소소는 장준과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소소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얼굴이 경직되며 온몸이 얼어붙었다. 분노한 화경을 눈앞에 두고 그 누가 태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것은 무공을 익힌 자의 본능이었다. 장양이 다시 한번 다급히 말했다. “어서 나가거라!” 군영에 아이 하나가 돌아다닌다고 하여 큰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준의 얼굴에는 회심의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손녀란 말인가?” 장준의 왼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소소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소소는 반항할 수가 없었다. “이거 놔요!” 짧은 손발이 움직이며 바둥댔지만, 장준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가까운 가족을 잃는 고통이 어떤 건지 궁금하지 않아?” 갑자기 장준의 표정과 말투가 바뀌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진 장양은 검집을 움켜쥐며 호통을 쳤다. “그 손 당장 놓으시오!!!” 장준은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수법에 걸려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왼손으로는 소소를 붙잡은 채, 오른손은 내리깔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손바닥이 장양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쩌억-! 무엇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장준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는 손목을 한 바퀴 돌리며 전면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단 말인가?” 장양의 등 뒤에서 흑의를 입은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한기가 감도는 서늘한 눈동자.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살왕의 눈동자가 지그시 장양을 향했다. 그것은 죽여도 되냐고 묻는 눈짓이었다. 장양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를뿐더러, 추밀원사를 죽인다면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심정과는 반대로 장준은 짜증이 솟구쳐오르고 있었다. “네놈은 살수 출신이로군.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검을 뽑아 드는 한편, 왼손에 매달린 소소를 집무실의 벽면으로 내던졌다. 죽일 심산으로 던졌다. 분명 일반적인 아이였으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준의 예상과 달리, 소소는 낙법을 펼쳐 벽면을 집고 안전하게 내려섰다. 그러고는 돌연 집무실의 입구를 바라보며,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흐어엉……. 아버지, 저 나쁜 아저씨가 나 때렸어…….”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여실하게 묻어있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장준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그곳에선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소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투욱-! 소무의 어깨에 걸쳐진 봇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잠깐 나가 있어…….” 소소는 울면서 바닥에 떨어진 봇짐을 챙겨 들고 나갔다. 아이가 사라지자 소무의 입이 달싹이며, 살왕을 향해 무엇인가의 전음을 보냈다. 그리고 한 호흡이 지난 뒤. 돌연 살왕의 손날이 장양 장군의 목 뒤를 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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