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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불청객을 맞이하다 (4) (55/250)

55화 불청객을 맞이하다 (4)2022.03.27.

한중의 거리가 다시 술렁이고 있었다. 백여 명의 악룡대원들이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투구까지 눌러쓴 채 완전무장한 상태로 검까지 뽑아 들고 있었다.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갑옷까지 피로 물들어있는 모습이었다. 흉측한 몰골들이었기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들이 없었다. “비켜라! 추밀원사께서 지나가신다!” “다가오면 죽는다!” 대열의 후미쯤에서 마차 한 대가 등장했다. 마차 안에서 숨 막히는 기세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며 군중들이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지켜보던 백성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쓰레기 놈들, 드디어 한중에서 떠나려나 봐요.” “쯧쯧. 우리 장군님이 해코지는 당하지 않으셨을까 걱정되네.” “어휴, 다시는 오지 마라.” 악룡대의 대열은 어느새 한중의 성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북쪽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한중성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한참을 더 가자 산기슭을 끼고 숲이 등장했다. 악룡대에서 체구가 가장 거대한 병사가 말했다. “어디까지 가야 해?” 대답은 마차 안에서 나왔다. “이쯤이면 된 것 같군.” “그럼 이거 벗어도 되나? 몸에 안 맞아서 숨쉬기도 힘들어.” 그때 마차가 정지하며 문이 열렸다. 놀랍게도 모습을 드러낸 자는 소무였다. 이들은 악룡대가 아니었다. 악룡대의 시신을 유기하고, 그들로 변장하고 나온 랑아대였다. 추밀원사가 한중의 군영에서 죽었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었기에, 백성들의 이목을 속인 것이었다. “모두 잠깐 기다려.” 대원들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장님?” “이제 이거 벗고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소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뭔가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다시 한중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잠시 대기하고 있어.” 말을 마친 소무는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다짜고짜 내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을 미행했던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리춤에 매어진 다섯 개의 매듭과 꾀죄죄한 몰골. 개방의 분타주 허규였다. “혹시나 해서 따라와봤더니 역시 자네였구만.” 소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개방이 눈치챘으니 속임수는 실패로군.” “눈치챈 것은 나 혼자이니 관계없네. 이런 엄청난 짓을 벌일 거면 나한테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나. 우리가 역정보까지 흘려준다면 한결 수월할 텐데.” “그럼 개방에서 좀 도와줘.” 허규는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답했다. “맨입으로? 우리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 말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무는 품속을 뒤져 지폐 뭉치를 꺼내었다. 송나라는 중원의 역사상 최초로 지폐가 통용되고 있었으나, 서민들은 만져보기도 힘든 화폐였다. 얼핏 보아도 황금 수십 냥의 값어치는 있어 보이는 액수였다. “약탈왕이라 그런지 재산을 꽤 모은 모양이더군. 이 정도의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니다니.” 허규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냉큼 낚아챘다. “껄껄. 사실 농담이었는데, 자네의 성의이니 거절하지는 않겠네.” 소무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과연 농담이었을지, 이것을 노리고 떠봤던 것인지 짐작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그동안 허규에게 받았던 도움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언제부터 무소유의 개방이 자본의 노예가 되었어?” “무리해서 비밀분타를 세웠더니 재정이 말이 아니라서 말일세.” “어쨌거나 이걸로 지난 빚은 다 갚은 셈이겠지?” 허규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니. 이만큼의 돈이라면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 정보 하나를 더 줘야겠지. 오늘 들어온 소식인데, 종남파가 무너졌다고 하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 놀랄 것도 없었다. “결국 휘나라가 섬서 무림의 씨를 말려버렸군.” “이제는 소림사도 위험하네. 그래도 그곳은 좀 부담스러운지, 당장은 망설이고 있는 모양일세. 하지만 언젠가는 위기가 닥쳐오겠지.” 소림사는 무림의 태산북두이자 자존심이었다. 휘나라가 그곳을 노리고 있다는 말은 끝장을 보겠다는 것과도 다름이 없었다. “소림사마저 무너진다면 무림이 다시 일어서기 힘들 텐데? 무림맹은 왜 당하고만 있는 거지?” 허규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민하는 시늉을 보였다. “음. 이것까지 얘기하면 내가 좀 손해 보는 건데.” “어차피 토해낼 거 알아.” “껄껄. 무림맹이라고 그냥 지켜보고만 있고 싶겠는가. 정면에서는 상대가 안 되기 때문에 방향을 선회했을 뿐. 관군과 움직임을 함께할지 고민 중인 상황일세.” “이제 와서?” “아직 구체적인 것은 정해지지 않았네. 사실 송나라의 황실도 믿을 수가 없다는 의견이 분분해서 말일세. 내부적으로도 갈등이 좀 있는 상황이네.” “그렇겠지. 무림의 힘이 약해졌으니, 평화가 찾아오면 황실이 예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지도.” “어쨌거나 볼일은 다 봤으니 이만 가봐야겠군. 당분간은 한중의 분타에 계속 상주하고 있을 테니, 시간 되면 술 한잔 사러 오시게.” 술을 한번 사겠다던 소무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허규는 작별을 고하고 다시 한중으로 내달렸다. 대원들에게 돌아가는 소무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백성들의 이목을 속이고, 개방이 역정보까지 흘려준다면 걱정할 것은 없었다. 장준이 어디 가서 객사했다는 소문이 들리든, 알 바가 아니었다. “한중으로 돌아간다!” 악룡대의 갑주는 인근의 숲속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가벼운 관복 차림으로 갈아입고는 한중으로 향했다. * * * 소무는 바로 장양 장군의 집무실을 찾았다. 장양은 탁상 앞에 앉아 뭔가를 고심하고 있었다. 그때 소무에게 살왕의 전음이 먼저 날아들었다. - 방심한 틈에 우리 손에 죽은 것으로 얘기해두었습니다. 어차피 장양은 속일 수가 없었다. 군빈정에 남겨진 전투의 흔적들을 모두 치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혈압이 올라 내가 쓰러졌다고 하더군. 그간 무공 수련을 게을리했던 모양일세.” “장군께서 정신을 잃은 사이 방심하고 있는 추밀원사를 제가 기습하였는데, 그만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어찌 자네들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동안 백성들에게 숱한 해악을 끼쳤으니 벌을 받은 셈이지. 그런데 방금 추밀원사와 부하들이 한중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 “짐작은 하셨겠지만 랑아대가 변장한 것입니다. 개방에서 역정보를 흘려준다고 하였으니, 이곳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입니다.” 장양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소무의 말대로라면 악룡대는 이미 전멸했을 터.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황이었다. 지나간 일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었다. “사건을 수습하고 뒤처리까지 하다니, 자네가 고생이 많았겠군. 그런데 소소는 어찌 되었는가?” 뜻밖에도 장양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바로 소소의 안위였다. “친구들을 만난다고 놀러 갔습니다.” 장양의 얼굴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허허. 그럼 되었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수습하지.” 그때 소무는 무엇인가가 생각났다는 듯 장양에게 말했다. “경황이 없어 도성에 갔던 일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미 악비 장군은 심문이 끝나고 판결이 내려진 상태였기에 상소문을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장양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역시 그리되었군. 결과가 어찌 되었는가?” “우려하시던 참수는 면했습니다. 악비 장군과 장헌 부장은 십 년, 아들 악운은 삼 년의 징역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휴. 정말 다행이로군.” “그래도 십 년이면 짧지 않은 세월입니다. 구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내하고 기다리면 기회가 올 거라고 믿네. 궁성의 뇌옥에 비교하면 형무소는 제법 버틸 만할 걸세. 내 방법을 한번 고심해 보겠네.” “알겠습니다. 장군께서 무사하신 것을 보았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집무실을 나선 소무는 고민에 빠졌다. 이번 사건은 자칫하면 소소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까지 왔었다. 대원 중에서도 장준에게 다친 자가 나왔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직은 화경을 상대로는 무리겠지. 휘나라에 화경의 고수가 얼마나 있는지도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최소한 좀 더 버틸 수 있게라도 만들어줘야 한다는 말인데…….’ * * * 한중은 다시 평상시로 돌아갔다. 대원들도 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번에 자신들의 한계를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모두가 막사에 늘어앉아 내공 수련에 전념하는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꾸억!” 돌연 랑아대의 막사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펴졌다. 놀란 대원들이 서둘러 운기조식을 마무리하며 눈을 떴다. “크, 크헉! 이, 이거 왜 이래?” 당황하는 인물은 일광이었다. 그는 바닥을 뒹굴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 X팔, 손톱이 갑자기 왜 빠져?” 대원들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일광의 손톱과 발톱이 모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일광 형님?” “무,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뿌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드러누운 일광의 신체가 새우처럼 오므려졌다. “끄으윽! 나, 나 죽는 거냐?” 그때 옆에 있던 소소가 손가락을 내밀며 소리쳤다. “일광 삼촌! 머리에서 숲이 자라나고 있어요!” “뭐, 뭐?” 일광은 반사적으로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소소의 말은 정말이었다. 대머리였던 자신의 두피에서 머리카락이 돋아나고 있었다. 일광은 기뻐서 웃다가 다시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치아가 후드득 뽑혀 나왔기 때문이다. “쿠억!” 곧이어 전신의 피부까지 벗겨지기 시작했다. 일광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며, 옆으로 다가온 소소를 바라보았다. “소, 소소야 삼촌 죽는다……. 도와줘…….” “흐잉, 가까이 오지 마요!” 소소는 화들짝 놀라며 청해의 뒤로 가서 숨었다. 그때 화산파 출신의 현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환골탈태(換骨奪胎)인 것 같습니다.” 대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동시에 감탄을 내뱉었다. “화, 환골탈태?” “와! 일광 형님이요?” 환골탈태가 무엇인가. 전신의 살이 새로 돋아나고 뼈가 재구성되며, 무공을 사용하기에 최적화된 신체로 탈바꿈이 되는 것을 뜻한다. 초식을 사용함에 막힘이 없고 마음이 향하는 대로 몸이 반응하니, 매우 향상된 반사 속도를 가지게 된다. 내공을 쌓는 속도 또한 배가되는 것은 덤이었다.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절세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경지인 화경에 이르게 된다면 또 한 번의 환골탈태를 겪게 된다. “역시 환골탈태가 맞는 것 같아요.” 청해까지 동의하고 나서자 더는 의문을 품는 자가 없었다. 한참을 바둥대던 일광은 반 각이 지나 모든 떨림이 멈추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험악한 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머리털이 자라났고 전신에 자리한 흉터가 말끔히 사라졌다. 게다가 매끄러운 피부까지. 사태파악이 된 일광은 환희에 휩싸이며 만세를 부르짖었다. “푸하하하! 얘들아, 봤어? 나 잘생겨진 거 같지 않아? 이 부드러운 피부 좀 봐!” “어떻게 했어요?” “와…….” 현정이 답을 대신했다.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된 거야. 드디어 모든 혈도가 뚫린 것이지.” 대다수의 대원들은 이미 임독양맥을 제외한 모든 혈도가 뚫려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일광이 이것을 해낸 것이다. 물론 소무가 암암리에 도와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기조식으로 내력을 보충한 소무는 다음 날 청해를 도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현정이였다. 그조차도 하루에 한 명 이상은 힘들었다. 다음은 소소의 차례였다. 소소의 거사를 막사에서 진행할 수는 없었다. 대원들이 모두 훈련을 나간 틈에 아이를 데리고 경공수련을 나왔다. 부녀는 어느새 인적이 드문 정군산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경공 수련이 제일 좋아요!” “왜?” “음~ 그냥 아버지랑 같이 달리는 게 좋아요! 히히.” 소소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나직이 말했다. “운기조식 조금만 하다가 갈까?” “좋아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소무는 반 각이 지난 후 은근슬쩍 눈을 떴다. 짧은 다리를 꼬고 강아지처럼 앉아 있는 딸의 모습이 보였다. 활짝 펼쳐진 손바닥이 은밀히 소소의 등을 덮었다. 이윽고 끊임없이 솟구치는 무지막지한 진기가 소소의 임맥과 독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이가 어려 몸속에 탁기가 없기에 다른 대원들보다 수월했다. 일다경이 지난 후. 드디어 소소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환골탈태를 거친다고 크게 외형적인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피부가 좀 더 고와지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지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놀랄 수 있었다. 소무는 망설임 없이 혈도를 눌러 깊은 잠에 빠져들게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에 안아 들고 차분히 지켜보았다. 중원의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에 환골탈태를 겪는 아이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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