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수확을 거두다 (1)2022.03.28.
랑아대의 모든 대원이 환골탈태를 이루는 데는 넉 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매일같이 막대한 내력을 쏟아붓던 소무는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물론 넉 달을 이렇게만 허비한 것은 아니었다. 소무는 딸아이의 무공지도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밤에는 매일 같이 운기조식을 도왔다. 이 험한 난세에서 어느 상황에서도 다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말이다. 뛰어난 재능과 최고의 스승이 만나자, 소소의 성취는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모든 일을 마친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장양의 집무실이었다. “장군, 소무입니다.” “들어오시게.” 장양의 목소리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는 서신 한 장을 움켜쥔 채 집중하여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황실의 직인이 각인된 것으로 보아 교지임이 분명했다. 묵묵히 지켜보던 소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양이 교지를 찢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찌이익-! 찌이이익-! “무엇입니까?” “별거 아닐세. 자네까지 부담을 짊어질 필요는 없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장군께서 홀로 짊어질 필요도 없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장양은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한중의 여자아이들을 차출하여 황실로 보내라는 명령서일세. 음흉한 놈들의 속을 내 어찌 모르겠나. 그리고 어찌 부모의 품속에서 강제로 자식을 빼낸단 말인가.” 너무나도 황당한 내용이었다. 이미 궐내에 수많은 궁녀가 있는 것을 목격한 소무였다. 그 많던 어린 궁녀들은 다 어디로 보내졌단 말인가. 만약 소소를 잡아다가 황제의 시중을 들게 한다고 생각해보니, 분노가 치밀어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다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장진상의 인신매매 사업이 끊겼기에 이제 대놓고 요구하나 봅니다.” “아마도 그런 모양이네. 황제의 변태적인 놀음에 우리가 가담한다면, 장진상이나 우리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대응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오면 이제 어찌 되는 겁니까?” “이미 이러한 서신을 세 번이나 받았네. 이곳 한중과는 달리, 다른 도시에서는 계속 사람을 납치하고 있었겠지. 이런 극악한 짓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일세.” 점차 장양에게 황실의 압박이 거세질 것이 분명했다. 악비도 이러한 식으로 당했으리라. 그러나 장양은 악비보다 유연함을 갖추고 있었다. 앞으로 어찌 대응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그런데 어떤 일로 부르셨습니까?” 장양은 집무실의 벽면에 붙어있는 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휘나라의 본격적인 공세가 임박했네. 서하를 점령하고 회군한 삼십만 대군이 장안과 개봉, 그리고 낙양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네.” “주력이 동시에 움직인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하나같이 무공을 익힌 정예병이지.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군단들이라 봐야 하네.” 심상치 않은 소식이었다. 이 말대로라면 진정한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선에 주둔 중인 병력까지 합친다면 사십만은 넘겠군요.” “그렇다고 봐야 하네. 움직임으로 보아선 이미 후방의 보급로까지 확보한 모양일세.” “목표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중과, 양양을 공격하는 한편, 나머지는 안휘성을 통과하여 도성으로 진격하려는 모양일세.” “어느 한 곳이라도 뚫리면 끝장이로군요. 한중과 양양이 뚫리면 중원 전역이 위험에 빠질 것이고, 안휘성이 돌파당한다면 도성이 위험할 테니.” “아마도 나머지 지역은 유광세와 한세충 장군이 방어에 나설 것이네. 아무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이 들어온다면 한중은 지원군을 기대하기 힘든 처지가 되겠지.” 장양의 말대로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가장 불리한 곳은 한중이라 할 수 있었다. 장양의 군단은 고작 일 만 오천 명에 불과하며, 그중에 반절 가까이는 경험이 적은 신병들이었다. 반면 한세충과 유광세는 송나라의 주력 병력을 인솔하는 상황이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요.” “시간이 있을 때 최선의 준비를 해둬야겠지. 당분간 자네가 신병들의 훈련을 중점적으로 도와주시게. 경험이 부족한 이 병사들을 군단의 영웅이 도와준다면, 사기가 충전하여 능히 일진월보(日進月步)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존의 정규군은 실전경험도 가지고 있으며, 무공을 수련한 지 꽤 오랜 기간이 지났기에 걱정이 없었다. 문제는 정규군과 신병들의 수준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용무를 마친 소무는 집무실을 떠나려다 잠시 멈칫했다.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행정병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장군, 희소식입니다! 둔전이 대풍년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침울했던 장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밝아졌다. 첫 번째 농사에서 대풍년을 이루다니. 그야말로 하늘이 도와준 천운이었다. “허허허! 그게 정말이란 말인가?” 최근 들려온 소식 중 가장 기쁜 내용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농민들에게 받는 이 할이면 병량 창고가 가득 차고도 남을 지경입니다!” “허허…… 허허허!” 장양은 연신 웃음을 금하지 못했다. 그의 눈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물기까지 고여있었다. 모내기에 힘을 보탠 소무도 뿌듯하긴 마찬가지였다. * * * 소무는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오전에는 신병훈련소를 들락날락했으며, 오후가 되면 소소를 일대일로 특훈을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도 아침부터 신병훈련소를 찾았다. 소무의 등 뒤로 칠천여 명의 병사들이 훈련용 검을 움켜쥔 채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앞으로는 백여 명의 랑아대원들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칠천 명 대 백 명의 싸움. 그러나 상대는 일당백의 랑아대원들이었다.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다. 선두에서 두 개의 깃발을 움켜쥔 소무가 명령기를 움직였다. 그러자 삼천여 명의 신병들이 랑아대를 향해 돌진을 개시했다. 인원수가 압도적이었기에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삼십 배에 달하는 적병들과 마주하고 있었지만, 랑아대의 대원들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선두에 있던 일광이 잔인한 웃음을 머금으며 소리쳤다. “하하! 모처럼 몸 좀 풀어보겠구나!” 옆에 있던 청해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신병들이니까 살살 하래요.” “그럼, 살살해야지. 뼈는 상하지 않게.” 그래도 반년 가까이 맹훈련을 받은 신병들이었다. 정규군의 전환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신병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랑아대원들과 몸을 뒤섞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훈련용 검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음이 연달아 뿜어져 나왔다. 퍽-! 퍼억-! 콰직-! “크헉!” “큭!” 개시와 동시에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은 신병들이었다. 단 한 번도 대원들의 몸에 손을 대본 자가 없었다. 그때 소무가 다시 명령기를 휘둘렀다. 천여 명이 좌측으로, 나머지 천여 명은 우측으로 이동하며 좌우에서 압박해갔다. 사방에서 병사들이 밀고 들어오자 랑아대도 슬슬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일방적으로 우세했지만, 운신의 폭이 계속해서 비좁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병들을 계속해서 고꾸라트려도 압도적인 인원수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소무가 마지막 남은 천 명의 신병들을 이끌고 크게 우회하여 랑아대의 후미로 접근해 갔다. 싸움에 정신이 팔려있던 대원들은 시야가 막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합류하면서부터는 싸움의 양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랑아대의 후미를 향해 중앙 돌파를 시도하는 소무. 그의 검이 한 번씩 휘둘릴 때마다 대원들은 크게 휘청이며 물러섰다. 몇몇이 그를 발견하고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대, 대장님이 이쪽에 있어!” “먼저 처치해야 해!” “이쪽이야!” 다섯 명의 대원들이 소무를 향해 맹공을 퍼부어갔다. 그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면서, 소무는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환골탈태를 이룬 후부터 대원들의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았다. 마음이 향하는 대로 몸이 반응하니 엄청난 반사 속도를 뿜어낼 수밖에. 심지어 자신의 일합을 견뎌내는 대원들까지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무가 누구인가. 검성이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개시했다. “어딜!” 자세를 낮춘 소무의 신형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대원들의 사이를 섬전처럼 후벼팠다. 퍼퍼퍽-! “크윽!” “컥!” 대원들을 뒤로한 채 소무는 다시 앞을 향해 전진했다. 몇 대씩 맞고 남겨진 대원들은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거렸다. 이어서 소무를 향해 뒤따르던 신병들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비, 비겁하게!” “오, 오지 마!” “우린 이미 탈락했어!” 몸에 상대방의 검이 닿으면 탈락자의 신세가 되어 검을 내려놓는 것이 규칙이다. 그러나 신병들은 주변이 소란스러워 대원들의 소리를 정확히 듣지 못했다. 다섯 명의 대원들이 신병들의 물결 속에 파묻히며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한편 앞서가던 소무는 랑아대의 중심을 좌우로 양분시키고 있었다. 대원들을 쓰러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진세를 무너트려 랑아대의 위력을 분산시키려는 것이었다. “대장님부터 잡아!” “여기 좀 도와줘!” 십여 명의 대원들이 소무를 포위하기 위해 다가갔지만, 아무도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랑아대의 진형을 사선으로 양분시켜 나갔다. 동료들과 떨어진 대원들은 신병들에 의해 팔방이 포위되며, 압사당할 듯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검기라도 뿜어낸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집단 대련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자존심을 건 대결이라 양측이 모두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었다. 한 식경이 지난 후. 드디어 전세가 확연히 굳어졌다. 팔천여 명의 신병들이 모두 검을 내려놓은 것이다. 반면 랑아대는 이십여 명의 대원들이 생존하여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 소무를 탈락시키지 못했으니,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제법인데?” 대원들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대장님, 이제는 더 괴물이 되었어…….” “어떻게 이겨…….” 일광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겁먹지 말고 랑아검진이나 준비해!” 이십 명의 대원이 순식간에 소무를 포위하며 검을 내뻗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던 소무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선공은 내가 양보하지. 먼저 들어와.” 청해와 일광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상체와 하체를 노리고 두 자루의 검이 다가왔다. 소무는 한 발로 지지하며 상체를 비틀며 검을 마주 휘둘렀다. 카캉-! 반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섯 자루의 검이 그의 전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그 순간 소무의 신형이 폭풍처럼 회전했다. 카카캉-! 다섯 명의 대원들이 뒷걸음질 칠 무렵, 또다른 다섯 명이 다가왔다. 난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좌우에서 동료들이 방어를 대신해주며, 공격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매우 훌륭한 검진이었다. 검진의 위력이 어떤지 몸소 확인했으니 더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소무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화경의 움직임으로 맞서줄 테니 몸에 새겨두어라. 그것이 다가올 전투에서 너희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니.’ 카카캉-! 카카카캉-! 폭풍우가 몰아치듯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검이 부딪치는 속도는 점차 빨라져 갔다. 검진을 펼치는 대원들은 미친 듯한 움직임을 계속했다. 싸움은 쉽게 결판나지 않을 듯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무가 유도한 것이었다. 일각이 더 흐르자 드디어 대원들이 한 명씩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소무가 은근슬쩍 현경의 속도를 한 번씩 뿜어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