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태백산 협곡 전투 (4) (66/250)


66화 태백산 협곡 전투 (4)
2022.04.07.


태백산 어귀의 협곡. 이곳은 처절한 혈투가 한창이었다.

아군 진영의 선두는 백 명의 랑아대였다. 방패를 움켜쥔 그들은 기성과 함께 거칠게 힘 싸움을 하고 있었다.

“밀어내!!!”

“이야아압!!!”

수천 명의 적병이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그들이 다섯 보를 물러서자 대원 중 한 명이 다급히 소리쳤다.

“지금이다!!! 빨리!!!”

뒤쪽에서 기다리던 병사들이 갈퀴같이 생긴 도구를 내밀어, 바닥을 뒹구는 아군을 잡아당겼다.

지이이익-! 지이익-!!

아군이 수십여 명의 부상병을 회수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기도 전에 랑아대에서 신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으윽!”

“큭!”

뒷걸음질 치던 랑아대는 다시 원래 자리까지 밀려났다. 오로지 소무 혼자만 굳건히 버티며 보폭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한중의 군단과 휘나라의 대군은 이 좁은 협곡에서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계속했다.

이러기를 벌써 삼 일이 지났다. 아군에서도 수백여 명이 죽었고, 천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다행히도 부상자들은 후방으로 옮겨져 빠른 속도로 회복해 갔다.

반면 휘나라의 피해는 스무 배에 달했다. 아군처럼 야전 의료부대가 없었기에 중상을 입은 자들은 십중팔구 사망이었다. 그런데도 전력의 차이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듯했다.

“랑아대는 후퇴하시오!”

뒤를 돌아보니 위진철 부장이 이천여 명의 보병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다시 교대할 시간이었다.

“휴. 드디어!”

“이번엔 나도 죽는 줄 알았어!”

대원들은 하나같이 기진맥진했다. 이미 궁수들의 화살은 바닥난 지 오래였으며, 기병들의 공격도 더는 통하지 않았다. 근접보병들이 교대해가며 밤낮으로 계속해서 버티고 있었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틈만 나면 치고빠지는 휘나라의 살라타이 부대였다. 이 정예부대를 막을 수 있는 보병은 랑아대가 유일했다. 그렇기에 대원들은 한시도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금방 다시 오겠습니다, 대장님!”

“그럼 조심하십시오!”

소무를 내버려 두고 대원들이 물러섰다.

그는 하루 한 번의 운기조식을 제외하고 온종일 전장에서 살고 있었다. 게다가 삼 일간 다섯 명의 장수를 참살하기까지 했다.

휘나라의 입장에서는 랑아대와 함께 소무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후미에서 막 운기조식을 끝낸 백문휘 부장이 장양에게 다가갔다.

“장군, 병사들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지휘기를 움켜쥔 장양도 안색이 어두웠다.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가 먼저 후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휘나라의 공세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적어도 하루 안에는 물러나서 정비할 줄로 예상했고, 그 기회를 노려 후퇴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삼 일간 한 번도 쉬지 않고 공격해오다니.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대로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전열이 한 번이라도 무너지면 끝장입니다.”

“후퇴하는 우리를 저들이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지 않은가. 함께 필사의 각오로 버텨보세.”

백문휘 부장의 얼굴에 비장함이 떠올랐다.

“저에게 병사 오백을 남겨주십시오.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그는 결사대를 자처하고 있었다. 장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허락할 수 없네. 우리가 힘든 만큼 적들의 체력도 바닥일 것일세. 강인한 정신으로 버텨낸다면, 모두 살아서 함께 돌아갈 수 있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마시게.”

장양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를 보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백문휘는 손아귀에 움켜쥔 검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다시 보병들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돌연 적진의 후미에서 뿔피리 소리가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뿌우우우우-!!!

“자, 장군!?”

“허허…….”

믿기 힘든 광경에 장양과 백문휘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돌연 휘나라의 군단이 퇴각을 시작하고 있었다. 협곡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적들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물러서는 그들의 모습에 아군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와아아아아아!!!”

무기를 하늘로 치켜든 병사들의 목소리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후퇴한 적들은 후방에서 다시 정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본진 자체를 물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분명 일시후퇴가 아니라 완전한 퇴각이었다.

“협곡의 병사들을 물리지 말고, 우선 장수들을 소집하여 주시게.”

“예, 장군.”

반 각이 지난 후. 모든 장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야전지휘소에 모였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면서 싸웠기에 장수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모두 고생했네. 저들이 갑자기 퇴각하는 것이 수상하여 자네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하네.”

양연정 부관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 휘나라의 사령관은 만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체력이 바닥난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순순히 퇴각할 리가 없습니다.”

곽철 부장이 동조하며 말했다.

“거짓 퇴각은 아닐지요? 우리가 협곡을 벗어나길 기다렸다가, 이곳을 차지하려는 계책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는 의견이었다.

협곡의 바닥이 휘나라 병사의 시신으로 가득 차 있을 만큼, 적들은 피해가 무지막지했다. 곳곳에는 적들의 시체를 모아 방벽을 쌓아 놓은 곳도 있을 정도였다.

백문휘 부장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어쩌면 태백산을 우회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일이 좀 더 걸리더라도, 우회하기만 한다면 한중까지 진격하는 데 막힐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부장들의 말에 장양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소무를 향했다.

랑아대장의 흑갑(黑鉀)은 적들의 피로 얼룩져 혈갑(血鉀)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누구보다 가장 처절한 전투를 했음을 한눈에 직감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군단 최고의 맹장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 며칠만 더 압박했으면 우리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들에게 무엇인가의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자네들의 의견은 모두 일리가 있네. 그럼 우선 이 협곡을 비우지 말고 하루를 기다려보세. 정찰병을 늘려 경계를 강화하고 정보 수집에 애써주시게.”

“예, 장군!”

병사들에게 휴식 명령이 내려졌다. 모두가 모처럼 따듯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쓰러지듯 하나둘씩 널브러졌다. 평소 잠이 거의 없는 소무조차도 오랜만에 숙면을 했을 정도였다.

특별한 일 없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때가 정오에 이르자 한 명의 정찰병이 다급히 지휘소로 나타났다.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연달아 내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 장군! 의병들이 드디어 해냈습니다!”

지휘소에 있던 장수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양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해내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의병대가 휘나라의 보급기지를 기습하여 궤멸시키고, 그곳의 병참을 모조리 탈취해갔다고 합니다!”

장수들이 손뼉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 그게 정말인가?”

“기습한 것도 모자라 탈취까지 했다고?”

이제야 휘나라의 본대가 퇴각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났다. 후미의 보급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 전투를 미룰 수밖에. 추가적인 보급이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꼼짝없이 발이 묶이는 상황이었다.

“허허허. 기어코 소소라는 여장부가 우리를 살리지 않았는가. 엄청난 일을 해냈어…….”

기쁜 소식에 장양도 연신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소소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소무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의 딸아이가 아닌 것을 확신하면서도 말이다.

“그럼 이제 시간은 충분히 벌게 된 셈이로군요.”

“최소한 보름 이상은 더 벌었다고 봐야겠지. 의병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배를 타고 남하한 이후 명아산(明阿山)에 정착하겠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진지를 세울 생각인 듯합니다.”

명아산이라면 한중에 멀지 않은 곳이다. 보급기지를 싹 털었으니 충분한 자본까지도 확보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장양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허허.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일세. 우리의 역할도 이제 끝났으니 어서 한중으로 회군할 채비들을 하시게.”

* * *

명아산은 한때 녹림(綠林)이라는 산도적들이 활동했던 산이기도 하다. 비어있는 이 녹림의 산채에는 지금 의병들이 들어차 진지를 보강하고 있었다.

보급기지에서 약탈한 수많은 병참은 인근 현의 상인들에게 헐값에 팔아넘기거나, 촌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처치하지 못할 만큼 산채의 창고는 가득 찼다.

산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별장이 있었다. 녹림의 두목이 생활했을 법한 그곳은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곳으로 의병대의 행정관인 사마강이 찾아들었다.

“장군, 서유현(西裕縣)에서 불필요한 병참을 모두 매각하고 은자 팔백 냥을 확보하였습니다.”

여자아이 하나가 호피 가죽으로 특수 제작된 의자에 앉아있었다. 화려한 의자였지만, 강아지나 앉을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작아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제 것도 가져왔어요?”

은자는 소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사마강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둘둘 말린 보자기 하나를 꺼내었다.

“무, 물론입니다.”

사마강은 냉큼 달려가서 보자기를 건네었다. 그것을 풀어보는 소소는 입이 귓가에 걸려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과일 열매를 꽂아 만든 탕후루였다. 한중의 거리에서 사 먹었던 이 달콤한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소소는 고양이처럼 혀로 몇 번을 핥더니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음 맛있어. 히히.”

“다른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돌연 소소의 귀가 쫑긋했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률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거 무슨 소리예요?”

“아. 이건 유정 대협이 부는 퉁소 소리입니다.”

“더 듣고 싶어…….”

그리고 가까이서 듣고 싶어졌다. 문밖으로 나가서 재빨리 그곳으로 다가갔다.

산채에서 가장 높은 곳. 나무 위에 걸터앉아 퉁소를 불고 있는 중년인이 보였다.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퉁소의 음률과 함께 가슴이 진동했다. 고개를 들어 지켜보던 소소는 손에 쥔 탕후루를 먹을 생각도 잊은 듯했다.

어느새 뒤따라온 사마강이 물었다.

“솜씨가 꽤 괜찮지요?”

가슴이 두근두근하여 사마강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음악을 듣고 있다 보니 갑자기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났다. 아버지와 삼촌들. 그리고 할아버지……. 이들이라면 할아버지의 위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장양 할아버지 어디에 있는 줄 알아요? 할아버지 보고 싶어.”

관군을 이끄는 장양 장군과 직접적인 만남을 원하고 있다니. 사마강은 탄복하는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계획을 준비 중이시군요. 관군이 철수 중이라고 하니, 한중으로 가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군할 때 만나려고 했던 계획이 이미 틀어져 버렸다. 그렇다면 더는 이곳에서 놀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저는 이제 가봐야 해요.”

사마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

소소는 탕후루를 핥으며 산채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마침 송겸과 무현 부장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눈이 마주친 소소는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아저씨들, 안녕히 계세요~”

무현 부장이 당황하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집에 가요~ 헤헤. 또 놀러 올게요.”

말을 마친 소소는 탕후루를 움켜쥔 채 폴짝폴짝 뛰며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송겸과 무현은 당황하며 손을 내뻗으며 외쳤다.

“자, 장군!?”

“어, 어디 가십니까 장군!?”

그들은 눈을 계속해서 끔뻑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허수아비처럼 무려 일각이나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잠시 후 한 줄기 바람이 휘잉 불어와 그들의 머릿결을 휘날리며 지나갔다. 그들은 동시에 한숨을 내쉰 후 허탈한 표정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가 어찌 저분의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본디 자연과 함께하는 기인은 신선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법이지요.”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주시겠죠……?”

“그러기를 바랄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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